어느 근위대원의 날들 - 19
약혼식 前. 결국 한편에 담지 못하고.
그보다 먼저 더 달린 질문에 대한 대답부터 :D
35. 은신스러운 노래?
브금 밑천이 떨어져 가서… 수줍. u/////u 음. 은신스러운지는 잘 모르겠지만 제가 글을 쓰며 많이 들었던/듣는 노래를 두 곡 두고 갈게요.
어느 저녁에 문득 보았네 - 시와
어느 저녁에 문득 보았네
지나간 시간 뒤에 남겨진 발자국들을
선명하게 남아 있었는데
뒤돌아본 적이 내려다본 적이 없었네
어디쯤일까 여기 이곳은
가다가 보면 눈앞이 환해질 거라고 믿었는데
앞으로만 향해 가느라고
뒤돌아본 적이 발 밑을 본 적이 없었네
43.
"실장님, 저희 왔어요!"
양 팔 가득 짐을 들고 차에서 내리는 재신의 손에 들린 것들을 규태가 얼른 받아든다. 오셨습니까, 공주님. 이 먼데까지. 멀긴요, 차 타니까 금방이던데요? 재신이 방긋 웃었다. 주차를 마친 시경이 다시 그 짐들을 받아들며 규태에게 가볍게 인사를 해보였다. 재신과 시경은 규태가 주말에 머무르는 경기도 외곽의 별장에 와 있었다. 최근 몸이 그다지 좋지 않아 주말에는 일을 쉬고 별장에 머무르는 은규태 실장을 한 번 찾아가봐야 하는 것 아니냐며 재신이 시경을 재촉해 한시간정도 차를 몰아 온 참이었다.
"좀 쉬셨어요? 저희 와서 괜히 몸만 더 불편하시구 그러시는거 아니죠?"
"그럴리가 있겠습니까. 공주님께서 이런 시골까지 오셔서 불편하실까봐 오히려 제가 걱정입니다."
"에이, 제가 어릴 땐 막 왕실 별장 뒤를 뛰어다녔는데. 아시잖아요. 은시경씨, 그거 다 부엌에 갖다놔줘요!"
짐을 들고 먼저 들어가는 시경의 등을 향해 소리친 재신이 규태의 팔짱을 끼고 별장 안으로 들어섰다. 와아, 여기 분위기 완전 좋다! 안을 둘러보며 감탄하는 재신을 규태가 따뜻한 눈으로 보았다. 마음에 드시면 나중에 공주님이 쓰시죠. 규태의 말에 재신이 입술을 앙다물고 휙 돌아서서 규태를 본다. 안되요, 실장님! 그런 말씀 하시면. 오래오래 실장님이 여기 쓰셔야죠. 저희는 이렇게 놀러오면 되요. 엄한 얼굴을 한 공주를 향해 결국 실장이 졌다는 듯 웃는다. 전하도 공주님도 노인네를 얼마나 더 부리시려고.
"시경씨가 실장님 낚시하신다고 해서요. 아이스박스도 가져왔구요, 음료수도 가져왔어요."
"다 있는데 무겁게 또 가져오셨습니까. 몸만 오셔도 되는데."
"아이참, 어떻게 그래요! 시아버지 될 분한테 잘보여야지. 그러지 않아도 요즘 지난 30년 돌이키며 실장님한테 죄진거 하나하나 하이킥하는중인데."
"온 신궁의 기쁨이셨는데 공주님이 무슨 죄지은게 있으시다고요."
"아니에요, 생각해봤는데 너무 많아서 깜짝 놀랐다니까요. 여섯살때 재하오빠랑 실장님 집무실에서 놀다가 실장님 서류 꽂아놓은 스탠드 넘어뜨린 것도 저구요, 재강오빠 만년필 망가뜨려서 혼날까봐 실장님꺼랑 바꿔놓은 것도 저구요, 생각해보면 고등학교 때 너무 밤에 월담도 많이 했고, 홍대에서 파파라치 찍혀서 실장님 곤란하게 만들고…"
하나하나 손가락을 꼽는 재신을 보며 결국 규태가 하하, 웃음을 터뜨린다. 도대체 만년필은 왜 망가진건가 했는데 이십년만에 답을 알았습니다그려. 공주님 때문에 진심으로 곤란했던 적은 없었습니다. 이 노인네를 정말 곤란하게 한건 왕제시절 전하셨죠. 규태의 말에 재신이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를 표한다. 뭐, 그건 부정할 수 없네요. 작은오빠에 비하면야. 자켓을 벗고 팔을 걷은 시경이 거실로 나오자 재신이 시경의 손에 음료수가 담긴 아이스박스를 들려주었다.
"자, 이거 들고 실장님이랑 갔다와요. 못 잡아오면 저녁 먹을거 없는거 알죠?"
"아니, 공주님. 저녁은 별장관리인이 있으니…"
"자자, 실장님도 같이 다녀오세요. 빨리요."
"쉬십시오, 공주님."
부자가 나란히 서서 절대 일하지 말라고 신신당부를 한다. 규태가 음악을 듣는 서재 소파에 재신을 앉혀놓고 나서야 시경과 함께 나서는 규태를 보며 재신은 생긋 웃었다. 상견례까지 마친 이제 와서야 규태가 조금은 자신을 편안하게 대하는 것 같아서 조금 마음이 놓였다. 창 밖으로 강가를 향해 나란히 걷는 규태와 시경의 모습이 작아진 것을 확인하고 재신은 소파에서 일어나 팔을 걷었다. 별장은 관리인이 있어서인지 깨끗한 모습이었다. 거실이며 서재, 부엌을 종종걸음으로 다니며 살펴본 재신은 조심조심 청소기를 돌리고, 먼지가 얕게 얹은 규태의 LP판 케이스를 닦고, 전기밥솥에 밥을 안쳤다. 왕비였다는 것을 제외하면 누구보다 보통의 엄마에 가까운 영선은 재신의 결혼이 가까워져오자 재신을 불러다 살림에 대한 것들을 가르쳤다.
「물론 재신아, 너는 공주고 지금 하는 것 같은 바깥일도 많이 하겠지만 잊어버리면 안돼. 결혼하면 은시경씨 니 남편이고 실장님은 시아버지야. 알지?」
「응, 알지 엄마. 왜 몰라. 나 잘할게.」
「공주라도 여자는 살림을 할 줄 알아야 해. 결혼하면 출궁할텐데, 너 밖에서도 궁인들이 다 해줄거라고 생각하면 안된다?」
「응응, 알았어. 엄마.」
혹여 공주라 버릇없이 자랐다고 책 잡힐까 걱정하는 영선에게 재신은 걱정하지 말라는 듯 고개를 끄덕여보였다. 남편 밥 잘 챙겨줘야 한다느니, 시아버지한테 전화 드리는 것 잊어버리면 안된다느니, 당장 내일 시집 갈 것처럼 결혼까지 반년은 족히 남은 딸에게 잔소리를 하는 영선을 보며 재신은 비로소 자신의 결혼이 가까워져오고 있음을 실감했다. 히힛. 책꽂이에 놓여 있는 규태와 시경의 사진이 담긴 액자를 닦으며 재신은 괜히 기분이 좋아져 빙글빙글 돌았다.
결혼. 30년 가까이 공주와 실장으로서 봐온 규태와 새로운 관계가 된다는 것은 재신에게 낯설면서도 설레는 일이었다. 비록 그 사이에 왕실과 비서실장은 돌이킬 수 없는 사이가 될 뻔했지만 재신은 과거를 곱씹으며 규태를 미워하지 않으려 했다. 왕과 왕비, 공주를 제외하고는 아무도, 심지어 영선조차 모르는 일이다. 지울 수 없는 과오를 안고 살아가는 것만으로도 늙은 비서실장은 충분히 고통스러울 것이다. 재신은 허리를 똑바로 폈다. 공주는 이제 똑바로 서서 걸을 수 있다. 그 날에서 살아남은 것은 재신뿐이었다. 그것은 용서를 할 사람도 재신뿐이라는 뜻이었다. 재신은 마음을 굳게 먹었다. 시경을 위해서라도. 재강이었어도 그랬으리라 생각하며, 재신은 부엌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시경과 규태는 나란히 앉아 낚시대를 드리우고 있었다. 벌써 세 마리째 낚아 통발에 넣은 시경과 달리 규태의 찌는 움직일 생각을 하질 않는다. 시경의 입가에 미묘한 웃음기가 돌고 어느새 떡밥만 쏙 빼먹어 흔들리는 낚시바늘에 새 떡밥을 끼우며 규태는 너털웃음을 지었다.
"오늘 처음 온 네가 나보다 낫구나."
"원래 이런건 처음 하는 사람이 운이 좋은 법이잖아요."
시경이 또 한마리를 건져올린다. 제법 사이즈가 되어 먹어도 될 법 보였다. 서툰 시경을 대신해 물고기의 입에 걸린 낚시 바늘을 빼고 잡힌 물고기를 통발에 넣은 규태가 저수지 건너편의 숲으로 시선을 돌렸다. 수도권 근교에 이런 곳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저수지는 평온했고 시경과 규태 외엔 낚시꾼조차 보이지 않았다. 풀벌레 소리만이 바람에 실려 두 사람을 스쳐 지나갔다.
"해가 점점 짧아지는구나."
"요샌 일곱시면 어둡던데요."
"저녁 먹고 바로 올라가거라. 너무 늦으면 공주님 피곤하시니까."
"예."
말이 많지 않은 부자는 같은 곳을 바라보며 말없이 앉아만 있었다. 더이상 시경에게도 초보자의 운이 통하지 않는지 두 사람의 낚시대는 잠잠하기만 하다.
"시경아."
"예."
"공주님께 잘하거라."
"예, 아버지."
"애비의 죄를 너에게 넘기는 것은 옳지 않으나 전하께서 덮어주시고 공주님이 용서해주신다 해서 애비의 죄가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사실 애비에게 무슨 자격이 있어서 공주님같이 귀한 분을 며느리로 맞겠니. 그러나 그럼에도 공주님은 너와 살아가는 것을 선택하셨으니."
공주님이 얼마나 강하신 분이냐. 못난 애비를 대신해 네가 공주님을 평생 지켜다오. 규태의 시선이 아득했다. 시경은 물끄러미 아버지의 옆모습을 바라보았다. 뒷모습만을 바라보았고, 닿을 수 없다고 생각했고, 닿았다 생각한 그 순간엔 함께 추락했고, 어쩌면 다시는 마주치고 싶지 않았을 수도 있었다. 지금도 자신에게 말은 안하지만 가끔씩 다리가 불편해보이는 재신을 보면 마음 한 구석이 아려왔다. 아버지의 원죄에 공주를 지키지 못한 자신의 죄책감까지. 하지만 그 또한 시경이 지고 가야 할 삶의 몫이었다. 늙고 점점 힘이 없어져가는, 그의 아버지 또한. 공주님이 용서하신다면 자신도 용서할 것이었다. 그것이 시경이 내린 결론이었다.
"해가 지기 전에 돌아가자꾸나. 공주님 기다리시겠다."
규태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낚시대와 잡은 물고기를 챙겨 돌아오는 길, 부자는 말은 없었지만 표정은 편안했다.
별장 안으로 들어서는 시경과 규태의 코 끝에 음식 냄새가 스며들었다. 부엌으로 발을 옮기자 전을 부치고 있던 재신이 밝게 웃으며 뒤돌아 두 사람을 맞았다. 오셨어요? 공주님, 이러시면 안됩니다. 곤란한 표정의 규태의 손에서 짐을 받아들며 재신이 등을 떠밀었다. 에이, 그거 이리 주시고 거실에서 TV라도 보세요. 은시경씨는 이리 와서 나 좀 도와요. 재신이 시경의 소매를 잡아 끌자 시경이 재신과 나란히 선다. 재신에게 밀려 거실 소파에 앉은 규태가 부엌에 나란히 선 두 사람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재신이 시경에게 뒤집개를 쥐어주자 시경이 후라이팬 앞에 미동도 없이 서 있다. 다정한 한 쌍이다. 언젠가 아들이 결혼할거라곤 생각했지만 그 상대가 공주님일거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예전의 규태였다면 분명 시경에게 포기하라 종용했을 것이다. 비서실장으로서 그래야 했다. 공주의 혼사조차 그의 손을 거쳤을테니, 그는 비서실장으로서 왕실에 보탬이 되는 혼처를 찾을 의무가 있었다.
그러나 많은 일이 있었고, 그는 이제 늙었다. 죽었다 알았던 아들이 돌아왔을 때, 규태는 눈에서 흐르는 뜨거운 눈물을 감출 수 없었다. 그리고 다시 꽃처럼 피어난 공주를 보며 규태는 자신의 작은 욕심에서 시작되었던 기나긴 뒤틀림이 국왕과 공주, 그리고 아들의 손으로 되돌려졌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죄인이었으나 아들은 영웅이었다. 아들은 나라를 위해 목숨을 내놓았고 지키고 싶어하는 여자를 지켜냈다. 그 여자가 공주라는 것은 더이상 문제가 아니었다. 규태는 무겁게 진 마음의 짐을 추스렸다. 그리고 아들을 위해 온전히 이 짐을 죽을 때까지 내려놓을 생각 하지 않고 지고 가겠다고 다짐했다. 그것만이 아들을 위해 할 수 있는 아버지의 마지막 도리였다.
"실장님! 저녁 드세요! 실장님이 많이 잡아오셔서 매운탕이 얼마나 잘 됐는지 몰라요."
"시경이가 잡은겁니다, 허허."
"에이, 괜히 아들 띄워주시려고. 은시경씨 서툴어서 하나도 못 잡았다던데요?"
앞치마를 한 재신이 고개를 기울이며 환하게 웃었다. 고개를 돌려 시경을 바라보자 쑥쓰러운 듯 시경의 입가가 씰룩, 움직인다. 규태의 입가에도 미소가 번졌다. 허허, 오래 사니 왕족 며느리 밥상도 다 받습니다. 규태의 발걸음이 정갈하게 차려진 식탁을 향한다.
44.
"입맛에 맞으세요?"
"맛있습니다, 허허. 공주님 솜씨가 대비마마를 닮으셨습니다. 예전에 가끔 마마께서 식사시간에 같이 부르시곤 했는데 마마도 꼭 이런 간의 음식을 하셨습니다."
"에이, 엄마 따라가려면 한참 멀었죠 뭐. 저 너무 서툴어서. 시경씨도 괜찮아요?"
"네. 지난번보다 더 맛있는데요."
"정말요? 나 그 사이에 연습했거든. 요새 일정도 별로 없고, 완전 신부수업해요. 엄마가 장난 아냐."
"지난번이요?"
"네, 지난번에 시경씨 집에 갔을 때… 헙."
"…시경아."
"…………죄송합니다, 아버지."
"그, 그게 아니구요. 실장님. 진짜로, 그게."
"결혼 전 발표할 거리를 늘리지만 말아 주십시오, 공주님. 전하 때도 수습하기 힘들었습니다."
"그런거 아니에요, 실장님! 진짜로! 은시경씨, 뭐라고 말 좀 해요!"
45.
신궁 전체가 연일 바쁘게 움직인다. 재신과 시경의 약혼식 발표가 내일 아침으로 다가왔고, 여러 준비에 모두가 바쁜 움직임을 보이고 있었다. 실제 약혼식까진 아직 한달이란 시간이 남았지만 궁의 일은 언제나 시간이 오래 걸리기에 이미 신궁 안은 축제 분위기였다. 지지난주, 왕실 가족과 시경, 규태가 식사하는 자리가 있었다는 정보가 어느 궁인에게서 흘러나오자마자 궁에서 일하는 모두의 시선이 새삼 재신과 시경에게 쏠렸다. 근위대도 예외는 아니어서 날마다 변함없는 그들의 대대장을 몰래몰래 관찰하기 바빴다.
의상팀이 양손 가득 카탈로그를 들고 가는 광경을 보며 서 중사는 대대장실을 향했다. 벌써 어둑어둑하게 땅거미가 진 시간이었다. 노크를 하고 문을 열자 이미 염 대위가 서 있고, 나갈 채비를 한 시경이 자리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부르셨습니까, 대대장님?"
"어. 외출 준비해."
"공주님 외출하십니까?"
"아니, 내가."
아, 예. 차 준비하겠습니다. 주차장 관리인에게 연락을 하며 서 중사는 고개를 갸웃했다. 어지간해서는 외출 잘 안하시는 분인데. 시경이 지시하는 주소로 내비게이션을 찍은 서 중사는 번화한 거리의 공영 주차장에 차를 대었다. 신궁과는 전혀 다른 거리의 풍경에 서 중사는 눈이 휘둥그레해져 연신 주변을 둘러보았다. 샛노란 금발을 한 여자가 서 중사의 바로 옆을 짙은 향수냄새를 풍기며 지나갔다. 기타를 든 남자, 거리에서 노래를 하는 밴드, 색색으로 빛나는 조명과 그 아래에서 삼삼오오 담배를 피우고 있는 젊은이들. 섞이지 못하고 있는 것은 딱 떨어지는 수트 차림으로 그 거리를 걷고 있는 서 중사와 염동하 대위, 그리고 바로 앞의 시경 뿐이었다. 시경의 발걸음이 거침없이 어느 클럽 뒷문으로 향했다. 목적지를 정확히 아는 시경의 뒷모습을 보며 서 중사는 묻고 싶은 것들을 꾹 참고 쫓아갔다. 도대체 왜, 대대장님이 공주님도 없이 혼자 이런 곳을 찾았는지.
반지하 건물의 좁고 어두운 복도를 지나 반쯤 글자가 떨어진 '대기실'이라고 적힌 문을 열자 튜닝을 하고 있던 남자들이 놀라 눈을 동그랗게 뜨고 시경과 일행들을 본다. 커다란 뿔테안경이며 요란한 차림이 그들이 밴드 뮤지션이라는 것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었다.
"엥? 은시경 소령님 아냐?"
"웬일이셔요? 재신이, 아니 공주님 안 왔는데."
"숨겨준거 아니고 진짜! 진짜 안왔어요! 요새 온 적 없는데."
"압니다. 공주님 궁에 계십니다."
그간 시경에게 얼마나 당했는지 얼굴을 보자마자 남자 넷이 일제히 만지고 있던 악기를 놓고는 공주님 여기 없다며 손사래를 쳤다. 당황한 표정의 밴드 멤버들에게 고개를 저어보인 시경이 한 발, 대기실 안으로 들어섰다. 시경이 재신을 찾으러 온 것이 아니란 것을 안 밴드 멤버들이 그제야 긴장을 풀고 시경과 뒤의 근위대원들에게 일단 의자를 권했다.
"앉, 앉으실래요? 무슨 일이시래."
"아니요. 긴 이야기는 아닙니다."
시경이 앉지 않자 동하와 서 중사도 뒤에 그대로 서 있다. 둘을 슬쩍 돌아본 시경이 밴드 멤버들이 권해준 자리에 앉는다. 여전히 머리 위에 물음표를 띄운 밴드 멤버들의 앞에 시경은 자켓 안주머니에서 작은 봉투를 꺼냈다.
"이게 뭐죠?"
"초대장입니다."
"초대장이요?"
금빛 테가 둘러진 고급 봉투에는 왕실인장이 찍혀 있었다. 열어서 카드를 꺼낸 밴드 멤버들의 눈이 휘둥그레해진다. 언론사에는 내일 아침 공표될 예정입니다. 카드에는 재신과 시경의 약혼식 장소와 밴드 멤버들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멤버 명수만큼 놓인 초대장을 하나씩 나눠 받아든 밴드 멤버들이 일제히 시경을 쳐다보았다.
"그, 뭐냐, 약혼식은 귀하신 분들 와서 그러는거 아니에요? 막, 엄숙하게. 그런거."
"공주님이신지라 대중에게도 공개될 예정이고 중계도 됩니다. 국왕 전하 약혼식 때 생각하시면 됩니다."
"그래도 우리같은 일개 밴드가…"
"공주님 친구분들이시지 않습니까."
그야 그렇긴 한데… 멤버들이 살며시 시경의 눈치를 보며 서로 눈빛을 교환했다. 정말 받아도 되나. 재신과 함께 음악을 했지만 그간 시경의 태도로 보아 자신들을 별로 탐탁지 않게 생각하는 줄 알았던 밴드 멤버들의 표정이 영 계속 어리둥절하다. 서 중사는 상관의 뒷모습을 쳐다보았다. 서 중사도 가끔 재신의 밴드멤버들을 본 적이 있다. 더이상 재신은 밴드 활동을 하진 않았지만 가까운 사이였던만큼 간혹 술자리에 참석하거나 하는 적이 있었고, 그런 재신을 모시러 가면서 서 중사도 언제나 시경의 딱딱한 얼굴을 봐왔기에 초대장을 주는 시경이 의아했다.
"정말 가도 되는거에요?"
"오시면 공주님께서 기뻐하실겁니다."
사무적으로 말을 잇던 시경이 빙긋이 웃었다. 시경의 웃는 얼굴을 처음 보는 밴드 멤버들이 툭, 굳었다. 한가지, 부탁이 있습니다. 그 뒤로 시경의 입에서 나온 말에 더더욱. 시경의 눈동자가 온화하게 빛났다. 시경의 말을 끝까지 들은 밴드 멤버들의 눈이 반짝였다.
"그거라면 우리한테 맡기세요, 소령님."
"완전 잘할 수 있죠. 전문. 전문."
믿고 맡기라는 듯 가슴을 탕탕 두드려보이는 밴드 멤버를 보며 시경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당일은 여기 있는 두 사람이 도와드릴겁니다. 그럼, 당일에 뵙죠. 인사를 꾸벅 해보이는 멤버들을 보며 서 중사도 마주 인사를 했다. 가볍게 경례를 붙인 시경이 대기실에서 나와 계단을 올랐다. 서 중사는 재빨리 먼저 건물 밖으로 나와 주차된 차를 향하며 어깨를 으쓱했다. 하여간, 예측하기 어려운 사람이야. 대대장님.
공주님이 좋아하셔야 할텐데. 좋아하시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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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혼식을 한 편에 몰아 올리려 했는데 길어져서 결국 두 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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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 하늘이 맺어준 운명같은 인연.
재신에게도 새 가족이 생기고 시경에게도 새 가족이 생긴다. 재하, 항아, 영선. 누구보다 시경을 아껴줄 왕실의 가족보다도 어쩐지 신경이 쓰이는건 홀로 남은 은규태 실장. 돌이킬 수 없는 죄를 안고 살아가는 기분이란 어떤 것일지. 그리고 그 죄를 지고 삶의 마지막을 꾸려나가는 그에게 남은 아들과, 공주. 그가 용서받아야 할 존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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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저녁엔 제법 춥네요. 건강 조심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