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근위대원의 날들 - 5
한두편 내에 끝날 줄 알았는데 영원히 안끝난다…?
14.
"공주님, 너무너무 예쁘세요!"
"오늘 공주님이 틀림없이 가장 예쁘실거에요!"
"공주님, 구두 은색 신으시면 어때요?"
"아냐, 하늘색이 더 예쁠거 같아."
드레스 차림을 한 재신을 둘러싸고 궁인들이 악세사리를 대주느라 소란스러운 장면을 근위대는 두 발정도 떨어져 기다리고 있었다. 재신은 굴지의 재벌가에서 주최하는 파티에 왕실 대표로 참여하기 위해 단장중이었다. 명목상이야 주최 기업이 대형 중동 건설 수주를 따낸 기념으로 하는 파티라지만 실상은 서로서로 눈도장 찍고 세력 자랑하는 자리라는 것을 모르지 않았고, 워낙 큰 사업인지라 왕실에서도 그 쪽 체면은 차려줘야 할 판이었다. 아오씨, 거기서 왕실에 기부 하는 돈 생각하면 얼굴 한 번 비추어 줘야 하긴 하는데. 세상에서 제일 가기 짜증난단 표정이 역력한 재하의 얼굴을 본 재신이 결국 그 날 마침 일정이 비어 왕실 대표로 참석하게 된 것이었다.
"그래도 명색이 공주인데 예뻐야지."
연한 하늘색의 미니드레스를 입은 재신이 궁인들이 권하는대로 이 구두 저 구두를 신어본다. 재신이 구두를 고르는 동안에도 재신을 둘러싼 서너명의 궁인들이 옷매무새를 만져주고 귀걸이를 달아준다. 음, 은색이 더 나을거 같아. 이걸로 하죠. 구두를 신고 마지막으로 머리 장식을 마친 재신이 거울에 자신의 모습을 한 번 비춰본다. 서 중사는 한껏 치장한 공주님의 모습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재신의 목에 걸린 화려한 목걸이가 빛을 받아 반짝인다. 때마침 호위 점검을 마친 시경이 공주를 모시러 방 안으로 들어오자, 재신이 시경 쪽으로 휙 돌아선다.
"은시경씨, 나 어때요?"
"예쁘십니다."
"뭐야, 그게 다에요?"
"…원래도 예쁘시지만 오늘은 특히 더 예쁘십니다."
흐음, 말주변 없는 시경의 감상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눈을 가늘게 뜨고 시경을 보던 재신이 어깨를 으쓱했다. 좋아, 준비 끝났으니 이제 가요. 중동에서 수주 따온 기업, 목 빳빳이 들고 서 있을거 구경 좀 해주러 가야지. 차에 오르는 재신도 재하만큼은 아니지만 그다지 내키는 얼굴은 아니었다. 여지껏 이런 행사가 적었던 것도 아닌데 유독 알러지 반응을 보이는 왕족 남매가 조금 낯선 서 중사가 운전석에 오르자, 시경이 바로 조수석에 탄다.
"아, 진짜 싫다. 그 인간 볼 생각 하니까."
창 밖을 보며 재신이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그 인간이요? 룸미러를 통해 재신의 모습을 보며 서 중사가 무심코 되물었다. 서 중사도 가면 싫어도 보게 될거에요. 딱 보면 내가 누구 말하는건지 알걸요. 공주가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 사이 어느새 차는 파티장에 도착했다.
왕족으로 사는 건 정말 사소한 것까지 다 계산해가며 살아야 한다는 뜻이다. 파티장에 왕족이 등장하는 시간. 너무 늦어도 안되고, 너무 빨라도 안된다. 너무 빨리 걸어도 안되고, 너무 느긋하게 걸어도 안된다. 시선의 높이도, 얼굴의 표정도, 전부 하나하나 계산되어 있다. 스무살에 유학을 떠나 자유롭게 산 재신이라도 어릴 때부터 몸에 밴 왕족의 품위는 이런 상황이 오면 어김없이 의식하지 않아도 겉으로 드러났다.
재신이 파티장에서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는 동안 근위대는 파티장 입구와 재신에게서 약간 떨어진 장소에서 빈틈없이 재신의 호위에 최선을 다했다. 그리고, 재신이 그 고운 얼굴을 찡그리면서 만나기 싫어했던 인간이 누구인지도 금방 알게 되었다.
"꺅!"
오늘의 주최기업인 대양그룹 회장의 둘째 아들 박서준이 엉덩이를 만지는 손길에 놀란 여종업원 한 명이 비명을 지른다. 품위도 없이 파티장을 휘젓고 다니며 여자 종업원들을 희롱하고 다니는 모습에 다른 사람들도 얼굴을 찌푸리고 있었다. 하지만 대양그룹의 가장 유력한 차기 회장 후보이기에 찍소리도 못하는 것이 현실이었다. 대양그룹은 거대 재벌들 중에서도 가장 가파르게 덩치를 키우고 있는 그룹이었다. 끊임없이 사업을 확장하고 정, 재계를 장악해나가고 있었다. 밉보여서 좋을 것이 하나도 없기에 저런 망나니짓도 묵인될 수 있었다.
샴페인 잔을 들고 있던 서준이 파티장 한 쪽 구석에서 바깥 상황을 무전으로 전달받던 시경에게 다가가 일부러가 확실한 몸짓으로 툭, 부딪혔다. 아, 죄송합니다. 곧장 시경이 허리를 숙여 사과하자 서준이 아니꼽다는 듯 턱을 들고 시경을 훑어보았다.
"이거, 요새 왕실 근위대는 막 사람을 치고 다니나보지?"
"급하게 지나가느라 미처 주변을 잘 보지 못했습니다. 죄송합니다."
"이야, 은시경 대대장 아니셔 이거. 유명인을 몰라봤습니다."
공주를 등에 업고 눈에 뵈는게 없나봐? 잔뜩 뒤틀린 심사가 흉측하게 모습을 드러낸다. 멀리서 지켜보고 있던 근위대원들이 다 발끈했지만 시경은 묵묵히 평소 그대로의 딱딱한 얼굴로 사과를 반복할 뿐이었다. 진짜 인내심 하나는 최고라니까. 욱한 마음을 애써 가라앉히며 서 중사는 시경과 서준을 지켜보았다. 그러고보니 예전, 공주님과 은시경 소령의 사이가 드러나기 전 인터넷에서 서준이 가장 유력한 부마 후보중 하나라고 했던 찌라시 기사가 떠올랐다. 공주와 기사의 로맨스가 드러나면서 닭 쫓던 개 신세 된 유력가문이 많다더니, 그 화풀이인건가? 이러나 저러나 참 찌질하기 짝이 없는 모습이었다.
"아주 좋겠어? 아버지부터 대대로 왕실 개 노릇이나 하다가 장애인 공주 잡았는데 운도 좋지, 그 공주가 다시 걷게 되었으니. 총 맞아 뒤질뻔해 국민적 영웅 되고, 좀 있으면 별 다시겠어?"
서준이 입에 올린 모욕적인 말에, 시경의 주먹이 꽉 쥐어졌다. 왜, 치겠다? 비웃는 입꼬리를 묵묵히 보던 시경이 무어라 입을 열려다 다물었다. 이 자리에서 문제를 일으키면 공주님에게 폐가 된다는 것을 모두들 잘 알고 있었다.
"개면 개답게 주인한테 꼬리나 흔들면 되지, 어디서 주인 옆자리를 차지하려 들어? 지금 공주가 좀 예뻐해준다고 부마라도 된 기분인가보지? 어차피 그 부마 자린, 정해져 있어. 일개 군인 따위가 있을 곳이 아니야."
와, 저 씨발새끼를. 참지 못해 박차고 나가려는 서 중사의 뒤에서 예상치 못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누가 개고 누가 주인인데요?"
"…공주님?"
또각, 공주님의 구둣소리가 한 발 더 가까워져왔다. 분명 아까는 회장과 인사하느라 저 쪽 멀리에 있었는데 언제 여기까지 오신건지. 재신을 보자마자 서준과 재신 사이를 막아서려는 시경을 손짓으로 물린 재신이 서준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제 근위대가 무슨 실례라도 저지른 모양이네요."
"아니요, 그냥 이야기나 나누던 중이었습니다. 파티가 무료해서요."
"그러시면 다행이고요. 전 또, 너무나 예의 바르시고 배려심 많으신 박서준씨 입에서 그런 말씀이 나오게 할 정도로 제 호위담당이 큰 실례를 저지른건가 했네요."
미소띤 재신의 말투가 서늘했다. 서 중사는 순간 재신의 얼굴에 재하가 겹쳐보였다. …국왕 전하도 꼭 저런 얼굴을 한 다음에 폭탄발언을 하시는데.
"얼마나 큰 잘못을 했길래 공주와 사적인 관계에 있는 사람을 동물에 비유하며 하대하시는건가, 신경이 쓰여서 말이죠. 제 근위대가 잘못했다면 제가 사과드려야 하지 않겠어요? 혹시라도 제가 잘 모르고 지나간다면 꼭, 지적해주시죠. 그래야 지난번에 뵈었을 때처럼 직접 제 아랫사람의 무례를 직접 꾸짖으시는 번거로운 일은 안 생기게 하죠."
"무슨 말씀이신지…"
"아, 박서준씨 입장에서는 흔히 있는 일이라 잊으셨나보네요. 왕실 주최 오찬회에서 실수로 박서준씨 발을 밟은 저희 궁인을 친히, 벌하셨다죠? 덕분에 본인 자질이 모자랐다고 생각했는지 그 뒤로 그 궁인이 사표를 냈거든요."
날카로운 재신의 눈이 서준을 똑바로 응시했다. 서 중사는 몇달 전 오찬회 후 불현듯 사표를 내고 궁을 떠났던 조리실 궁인 한 명을 떠올렸다. 무슨 일로 사표를 쓰는지 대비마마, 왕비님, 공주님까지 다 나와 손을 꼭 붙들었고 궁인이 궁을 떠난 후 왕비님은 내래 그 새끼래 목을 따버리겠다며 내도록 화를 내셨다. …그게 이 놈이랑 관련된 일이었나. 예상 못한 재신의 응대에 서준은 말문이 막힌 듯 했다. 재신이 한 발, 서준에게 가까이 갔다.
"궁 안의 사람에 대해서는 궁의 사람에게 맡기시죠. 다른 집 사정까지 신경 쓰시기엔 박서준씨는 너무 바쁘시지 않으신지요? 아니면 혹시 그럴리 없겠지만, 부마자리 하나 꿰차고 싶었는데 어디서 나타난 근위대가 공주의 남자라고 하니 속이 뒤틀려 화풀이를 하시는 속 좁은 짓을 하시는건 아니시겠죠?"
긴장이 역력한 얼굴을 한 서준의 목울대가 움직였다. 서준을 올려다보던 재신의 입가가 호를 그렸다. 오늘 파티, 아주 훌륭하네요. 즐겁게 보내다 가겠습니다. 건설 수주 축하드려요. 가죠, 은시경씨. 공주가 휙 돌아서자 시경은 다시 묵묵히 재신의 뒤를 따랐다. 남겨진 서준의 얼굴은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입구를 지키고 있던 근위대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우리 공주님 최고. 대박.
"신경쓰지 말아요. 패배자가 찌질대는 것 뿐이니까."
"신경 안씁니다."
"나 너무 품위 없었나?"
"아닙니다."
"내 남자는 내가 지켜야지."
"전하를 보는 것 같았습니다."
"…그냥 차라리 품위 없다고 해요."
재하와 닮았다는 말에 입을 삐죽거리던 재신이 손을 뻗어 등을 만졌다. 이상하네, 아까부터 따가워요. 뭐가 있나봐. 제가 봐드릴게요. 재신의 등쪽을 살핀 시경이 끊어지다 만 택을 발견한다. 택이 덜 떨어졌습니다. 아까 궁인들이 채 체크하지 못한 것 같네요. 포켓에서 군용 나이프를 찾던 시경이 재신의 어깨 너머로 멀리 서준과 눈이 마주쳤다. 순간, 시경의 눈이 느릿하게 깜빡였다. 그리고 시경은 그대로 고개를 숙여 재신의 뒷목 가까이에 있는 택을 그대로 이로 뜯어냈다. 갑자기 목덜미에 와닿는 더운 숨결에 재신이 몸을 살짝 움츠렸다.
"됐습니다, 공주님."
"아, 고마워요. 한시간 정도 더 머무를거 같아요. 아직 인사 다 못한 사람들이 있어서."
"알겠습니다. 서쪽 입구에서 대기하고 있겠습니다."
재신이 건넨 샴페인잔을 정중히 사양한 시경이 본래 위치로 걸어갔다. 재신은 여느 때와 다르지 않은 표정으로 다시 인사를 위해 사람들이 많은 쪽을 향했다. 하지만 그 장면을 지켜보고 있던 서 중사는 보았다. 택을 뜯어내던 순간 명확히 서준을 향했던 시경의 눈빛을. 여자들도 여자만이 알 수 있는 느낌이 있듯이 남자들도 남자 사이에서만 통용되는 감각이 있다. 그건 명백한 경고였다. 공주를 지키는 기사의 경고가 아니라, 제 여자의 소유권을 주장하는 수컷의 눈이었다. 대대장님도 남자는 남자였어. 서 중사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궁으로 돌아오자마자 재신은 재하와 항아에게 달려가 서준의 발언을 미주알고주알 다 일러바쳤다. 항아는 그 개철처리새끼 자기가 버릇을 고쳐놓겠다며 펄펄 뛰었고 재하는 역시 내 동생이라며 재신의 어깨를 팡팡 때렸다. 그리고 기분이 좋아진 국왕 전하가 준 용돈으로 공주님은 은시경 소령과 함께 맛있는걸 먹으러 간 모양이었다. 공주 커플 데이트 호위까지 따라가는건 어지간한 염장이 아니었지만, 공주님이 직접 사다준 아이스크림을 쪽쪽 빨면서 서중사는 너그러운 마음을 가지기로 마음 먹었다.
15. 공주님은 모르는 이야기
「속보입니다. 대양그룹 박서준 사장이 과거 브로커를 고용해 병역비리를 저지른 것이 적발되었습니다. 박서준 사장은 브로커를 통해 명지병원 정형외과 교수와 병무청 직원에게 각각 현금 1억 5천씩을 건네고 위조된 서류를…」
"쟨 끝났네 끝났어. 우리나라에서 군대 문제 걸리면 이거야, 이거."
뉴스를 보고 있던 재하가 손으로 목을 긋는 시늉을 해보였다. 그 능구렁이 회장, 첫째한테 물려주겠네 그룹. 그렇게 둘째 편애하더니. 어깨를 으쓱하며 걸어가는 국왕의 뒷모습을 보며 서 중사는 침을 꿀꺽 삼켰다. 설마. 서 중사의 머릿속에 며칠 전 시경이 시켰던 심부름이 떠올랐다. 이거 등기 좀 부쳐. 시경이 내밀었던 꽤 두툼한 대봉투. 봉투에 적혀진 수신인은 병무청장이었다.
…에이, 설마. 재하의 바로 뒤에서 언제나와 같은 표정으로 걷고 있는 시경을 한 번 쳐다보고 서 중사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설마.
……설마.
은소령은 처음엔 정말 그다지 기분 나쁘지 않았음. 원래도 개망나니인걸 알고 있어서 그냥 넘어가려고 했는데, 재신과 아버지를 욕보이는 순간 시경도 욱함. 은시경은 망나니가 군면제인걸 알고 있었음. 그래서 그 때 이미 털어버리겠다고 마음먹었는데 공주님이 짠짠 등장해서 레프트 훅 라이트 훅 어퍼컷 날려버림. 방식이 국왕전하 판박이임. 망나니는 공주에게 두들겨맞고 일어나려고 했는데 기사가 링 밖으로 걷어차버림ㅋㅋㅋ
이로 택 뜯어내는 장면은 마츠모토 토모의 순정만화 KISS에 나오는 장면. 예나 지금이나 가장 좋아하는 순정만화. 피아노 선생 고시마가 학생이자 연인인 카에의 원피스 택을 이로 뜯어내는 장면. 그 장면이 너무 좋아서 꼭 써보고 싶었다. 상상만 해도 좋아 남자 은시경 하악하악...
이 장면이 모티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