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근위대원의 날들 -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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굉장히 많은 분들이 답글을 달아주셔서 @@ 우어 놀랐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_♥
제가 갤에 익숙하질 않아서… 덧글은 지금처럼 편한대로 달아주시면 되어요. 반말도 존댓말도 다 괜찮습니다.
아직도 많은 분들이 은신은신 우시네요. 저도 그래요. 마음이 아프더라고요, 아직도.
오늘도 철벽멘탈을 위해서…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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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가지 이야기. 욕심껏 넣고 싶었던 에피소드들을 다 넣었다.
5.
서 중사가 공주님과 대대장님의 '관계'를 결정적으로 눈치챈 것은 호칭 때문이었다. 공주님은 늘 근위대원들을 계급을 붙여 불러주었다. 염 대위, 서 중사, 김 소위, 때때로는 성에 이름까지 다 붙여 부르기도 했지만 계급을 빼고 부르진 않았다. 그것은 공주님 나름의 장교와 부사관들에 대한 존중의 의미였다. 단 한사람, 은시경 소령만 빼고.
은시경씨.
재신은 늘 시경을 그렇게 불렀다. 다르게 부르는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은시경씨, 은시경씨, 은시경씨. 대대장의 이름이 서 중사의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흔한 성은 아니고, 남자다운 이름도 아니다. 그런데 그 성과 이름, 그리고 공주님의 목소리가 합해져 은시경씨, 라고 공주님이 시경을 부를 때마다 묘한 울림을 자아냈다. 두 사람 사이에 특별한 무언가가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하는 아픈 울림이. 재신은 호칭을 제외하고는 다른 근위대원을 대하는 것과 똑같이 그들의 대대장을 대했지만 근위대원들 사이에 이미 밤에 대대장이 공주궁에 들리는 모습이나, 후원에서 함께 걷는 두 사람을 본 목격담이 심심치 않게 돌고 있었다.
"대대장님과 공주님은 대체 무슨 사입니까?"
근위대 휴게실에서 용감하게 말을 꺼낸 것은 신입이었다. 신입이 들어오면서 막내에서 벗어난 서 중사는 흘끔 신입의 얼굴을 쳐다보고는 모두와 함께 염동하 대위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왜, 왜 날 쳐다봐? 흠칫 놀란 동하가 모두의 추궁어린 시선을 피해 일어나려 했지만 곧장 김 소위에 의해 어깨가 눌러져 다시 자리에 앉혀졌다. 중대장님, 중대장님은 아실 것 같지 말입니다.
"뭐가 그렇게 궁금하냐? 모르는 척들 해, 자식들."
"아니 아무리 대대장님이라도 그러셔도 되는겁니까? 그렇게 막, 공주님이랑."
"공주님이랑 뭐. 대대장님이 뭐 했어?"
"중대장님도 아시지 않습니까. 근위대 대대장이 그렇게 공주님께 개인적으로…"
와글와글 시경에 대한 분노(근위대원들은 대대장으로서의 시경에게 불만이 있진 않았다. 그는 좋은 상관이니까. 단지 그들이 사모해 마지 않는 공주님과 너무 붙어 있어 싫을 뿐.)로 열변을 토하는 근위대원들의 말을 동하가 중간에 잘랐다.
"냅둬라."
"중대장님은 이상한데서 너그러우시지 말입니다."
"너그럽고 뭐고간에, 대대장님 총 맞기 전부터 근위대 있었던 사람들이 왜 다 그 닭살 돋는 꼴들 보고도 가만 있는지 니들은 몰라."
"예?"
"대대장님과 공주님, 옛날부터 그런 사이셨습니까?"
눈이 동그래진 근위대원들을 보며 동하가 한숨을 푹 쉬었다. 아무리 입 가볍고 떠들기 좋아하는 염동하 대위였지만 공주님과 은소령의 이야기에 대해서까진 아니었다. 누구라도 그럴 것이었다. 예전의 두 사람, 그리고 은시경 소령이 없던 2년간의 공주님을 본 사람이었다면.
"좀 그냥 둬. 연애 좀 하게."
"역시 연애였습니까!"
"역시 사귀는거였어."
"그 둘은 연애 좀 해도 돼. 그게 사람 사는거였냐, 진짜."
어렴풋이 다시 떠오른 예전의 기억에 동하가 고개를 흔들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기집애들마냥 이런거에 떠들 시간 있으면 일이나 해라. 어깨를 툭툭 치고 나가는 상관의 뒷모습을 근위대원들은 허망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워낙 떠들기 좋아하는 상관이라 틀림없이 썰을 풀어줄 줄 알았는데 의외였다. 휴게실 문을 닫고 나와 터벅터벅 걷던 동하의 눈이 창 밖을 향했다. 대비마마께서 가꾸시는 화원의 양란이 꽃을 활짝 피우고 있었다. 그리고 그 앞에 쪼그리고 앉아 꽃을 구경하는 공주님과 그 옆에 온화한 얼굴로 가만히 서 있는 은시경 소령. 염동하 대위의 입가에도 픽, 웃음이 서렸다. 잠시 서서 두 사람을 보던 염동하 대위는 다시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6.
어쨌거나 공주와 근위대장의 비밀 아닌 비밀 연애는 그렇게 오래 가진 못했다. 밤낮 왕실 사람들만 쫓아 다니는 파파라치들 중 누군가가 한 건 해낸 것이다. 성곽에 나란히 앉아 있는 연인의 모습. 그리고 손을 잡고 다정하게 내려가는 사진까지. 뒷모습이었지만 누가 봐도 공주였고, 공주를 따스한 눈빛으로 바라보는 시경의 옆모습은 금방 그가 대한민국에서 제일 유명한 군인임을 만천하에 드러나게 했다. 노이즈가 잔뜩 낀 저화질의 파파라치마저도 그림같이 나온 왕실 로맨스에 사람들은 열광했다. 사고 전 재신은 한국에 있을 때면 심심치 않게 파파라치에 등장했지만 대부분 가발 쓰고 노래를 하거나 친구들과 떡볶이를 사먹는 류의 내용이었지 남자와 찍힌 적은 한번도 없었다. 그것이 재신의 공주로서의 최소한의 품위 유지였고 조심스러움이었다. 그런 공주의 남자로 처음 드러난 것이 은시경 소령이었다. 군 지원률 상승에 톡톡한 공을 올리고, 왕의 최측근으로 알려진 근위대장. 사람들이 꿈꾸는 공주와 기사였다.
왕실은 언론을 잘 이용했다. 적당히 떡밥을 흘려주며 두 사람의 사랑을 좋은 모양새로 보여줬다. (물론 실제로 나쁜 연애도 아니었지만.) 공주의 사고 전, 사고 후, 은시경 소령의 언더커버 시절, 토막토막 조금씩 알려지는 두 사람의 사랑 이야기가 연일 인터넷이며 신문을 장식했다. 특히 기억을 되찾고 마음을 닫은 공주를 위해 국왕이 친히 명령해 바리케이트를 치고 두 사람이 만날 수 있게 해준 이야기나, 공주에게 편지를 남기고 떠난 근위대장, 죽었다 알려진 사람을 잊지 못하고 마음에 간직한 공주의 이야기는 영화보다 더 영화같았다.
하지만 막상 둘을 같이 볼 수 있는 기회는 적었다. 은시경 소령은 공주의 거의 모든 스케줄에 직접 호위를 나섰지만 현장에서는 호위에 대한 총체적 지휘를 하는 경우가 많아 기자들은 원하는 투샷을 찍기가 어려웠다. 그렇게 또 공개 아닌 공개 연애를 한 지도 몇 달이 지나갔다.
왕실 주최의 문화사업 관련 포럼의 기조연설을 위해 재신은 단상에 앉아 있었다. 많은 기자들과 관계자들을 앞에 두고 재신은 답지 않게 약간 긴장한 얼굴이었다. 정문 쪽의 경호를 확인하러 간 시경은 대회장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었다. 문가에 정자세로 선 서 중사는 목을 빳빳이 세웠다. 이재신 공주가 주도하는 문화사업은 다른 왕실사업들에 비해 정치성이 옅었고 긴장감도 덜했다. 이재신 공주님이십니다! 사회자의 소개에 재신이 자리에서 일어나 손을 가슴께에 올리고 인사를 했고 객석에서 박수가 터져나왔다.
그 때였다. 객석에서 한 남자가 불쑥 일어나 앞으로 걸어 나왔다. 그리고 품 안에서 총을 꺼내 공주를 겨누었다. 그것은 무척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서 중사는 돌발상황에 순간적으로 얼어붙었다. 머리로는 공주님을 보호해야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발이 움직이질 않았다. 재신의 눈이 커지고, 그가 방아쇠의 안전장치를 푸는 것이 슬로우모션처럼 보였다.
그리고 그 순간, 탕, 하는 총소리가 나고 남자가 손에서 총을 떨어뜨렸다. 문가의 시경이었다. 시경은 재빨리 객석의 테이블 위로 뛰어올라 테이블과 테이블을 건너 뛰어 남자에게 달려들었다. 남자의 어깨부터 짓눌러 바닥에 엎드리게 한 시경은 바닥에 떨어진 총을 확보하고 남자의 팔을 꺾어 움직이지 못하도록 제압했다.
"모든 출구 봉쇄해!!! 개미새끼 한마리 못 빠져나가게 막고 안에 있는 사람들 모조리 신원확인, 소지품검사해!!!"
총소리에 염동하 대위를 비롯한 밖의 근위대원들이 뛰어들어오고, 비상벨이 울렸다. 우왕좌왕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기자들은 사진을 찍느라 바빴고 서 중사는 시경의 일갈을 듣고 나서야 정신없이 움직였다.
제압한 테러리스트를 동하에게 넘기자마자 시경은 재신을 쳐다보았다. 재신의 큰 눈이 바르르 떨리고 있었다. 시경은 재신에게 달려가 재신의 어깨를 쥐었다.
"공주님, 공주님! 괜찮으세요? 저 알아보시겠어요?"
"응… 은시경씨. 나 괜찮아요. 괜찮아… 조금 놀랐을 뿐이에요. 은시경씨는 괜찮아요?"
"괜찮습니다. 지금 바로 궁으로 돌아가세요. 호위를 붙여드리겠습니다."
"은시경씨는…"
"저는 여기서 상황을 정리하고 다른 사람들을 다 체크해야 합니다. 같이 가드리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공주님. 최대한 빨리 정리하고 갈테니까, 무서우시면 대비마마나 왕비마마와 같이 계세요. 바로 연락드리고 가겠습니다."
걱정스러운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는 시경을 향해 재신이 입술을 꼭 깨물며 웃어보였다. 나, 괜찮아요. 진짜에요. 나, 얌전히 궁에 가 있을게요. 서두르지 말고 여기 일 잘 해결해요. 은시경씨 근위대장이잖아. 괜찮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 역력한 재신의 얼굴을 살피던 시경이 아직도 약하게 떨리고 있는 재신의 어깨에 자켓을 벗어 걸쳐주고는 근위대원과 궁인들을 불러 궁으로 모셔가게 했다. 회장을 나가던 재신이 시경을 한 번 돌아보고는 옅게 웃어보였다.
테러를 감행한 남자는 조직의 소속이거나 하지 않았다. 테러라기보다는 스토킹에 가까웠다. 남자의 집에서 가득 발견된 재신에 대한 자료와 사진들 때문이었다. 남자는 재신이 태어났을 때부터 줄곧 재신에게 집착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런 재신이 연애를 한다는 것이 알려지자 가질 수 없었던 공주를 죽이기 위해 범행을 저질렀다고 남자는 자백했다.
그리고 그 날 서중사와 근위대원들은 그들의 대대장이 얼마나 무서운 군인인지 몸소 체험할 수 있었다. 조인트를 까인 것도 아니었고 큰 소리가 난 것도 아니었는데 여태까지의 군생활 중 이렇게 상관이 무서운 것은 처음이었다.
또 한가지는, 다음날 신문에 대문짝만하게 실린 시경의 사진이었다. 어느 운좋은 기자가 절묘하게 찍은 스토커를 향해 총을 겨누는 시경, 스토커를 제압하는 시경, 무엇보다 관심을 끈 공주에게 자켓을 걸쳐주는 시경의 모습. 1면에 걸린 기사 타이틀은 다음과 같았다.
「기사, 또 한번 공주를 구하다」
조간신문에 실린 그 모습에 공주님은 웃었고 대대장님은 말은 없었지만 부끄러워했다. 그리고 그 장면은 아홉시 뉴스에 영상 버젼으로 현장이 나오면서 또 한번 리바이벌 되었다.
7. 서 중사는 모르는 이야기 2
"공주님."
"아, 은시경씨. 왔어요?"
"지금 끝났습니다. 대비마마, 왕비마마, 위험한 상황을 만들어 죄송합니다."
"아니에요, 죄송하긴요. 은시경씨가 우리 재신이 목숨을 구해줬는데 오히려 우리가 고마워해야죠. 너무 고생 많았어요. 이런 일이 다 생기네요."
"기거이 뭐하는 놈이랍니까? 테러리스트입네까?"
"테러리스트는 아닌 것 같습니다. 공주님의 스토커로 보입니다."
"스토커?"
"스토커? 기게 뭡네까?"
"공주님이 태어나셨을 때부터 공주님에게 계속 집착해온 것으로 보입니다. 근위대와 경찰이 확인한 결과 집에서 수천장의 공주님 사진과 공주님에 대한 신문기사, 자료들이 발견되었습니다. 공주님의 것으로 보이는 소지품도…"
더이상 듣고 싶지도 않다는 질린 표정의 항아와 대비, 그리고 아직도 약간 불안한 표정의 재신을 보며 시경이 말 끝을 흐렸다. 재신아, 너 이제 들어가서 좀 쉬어. 은시경씨가 재신이 좀 데려다주세요. 대비가 재신을 향해 걱정스러운 얼굴을 하자 재신은 고개를 끄덕여보였다. 대비와 항아를 향해 허리를 숙여 인사해보인 시경이 문가를 나서는 재신을 따랐다.
"고생 많았어요, 은시경씨. 놀랐죠."
"죄송합니다, 공주님."
"뭐가 또 그렇게 죄송해요. 은시경씨 때문도 아닌데."
조용한 심야의 복도에서 재신의 뒤에서 걷고 있던 시경이 조심스럽게 한 발을 더 내딛어 재신의 옆에 섰다. 아직 불안한 두 사람의 손이 꼭 쥐어졌다. 재신의 손이 자신의 손 안으로 온전히 들어온 것을 느끼고 나서야 시경은 작게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바깥을 확인하고 회장으로 들어오는 문을 연 때, 남자의 총구가 재신을 향한 것을 본 순간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하는 것만 같았다. 총을 꺼내 발사한 것은 거의 본능에 가까웠다. 생각하고 한 행동이 아니었다. 생각하고 행동했다면 아마 자신은 남자의 총이 아니라 심장을 겨냥했을거라고 시경은 생각했다. 재신에게 총을 들이댄 것만으로도 시경에게는 사살의 이유가 충분했다. 시경의 불안을 알아챈 듯 재신이 시경 쪽으로 몸을 약간 기울여 체중을 실어 기대었다.
"고마워요. 나 구해줘서. 다행이에요."
우리, 다치지 않았잖아요. 그 말에 시경의 발걸음이 멈추었다. 그리고 같이 멈춘 재신의 몸을 조심스럽게 마주해 그대로 품에 당겨 안았다. 품에 가득찬 재신의 머리카락에 얼굴을 묻으며 시경은 길게 숨을 들이켰다. 그 숨결 속에 들어 있는 복잡한 감정을 느낀 재신이 팔을 뻗어 시경의 등을 가만히 쓰다듬었다. 괜찮아요. 괜찮아요, 은시경씨. 그렇게 두 사람은 한참을 끌어안고 서 있었다.
8.
야, 오늘 고기 먹는다! 갑작스런 소규모 회식에 모두들 신나게 고기집으로 몰려갔다. 대대장님 좀 늦으신다니까 먼저 먹고 있으랜다, 염동하 중대장의 말에 근위대원들은 모두 앞다투어 불 위에 고기를 올리기 시작했다. 한참 잘 먹을 나이의 직업군인 여섯명. 서 중사는 자기 앞의 고기에 젓가락을 뻗는 동기에게서 고기를 사수하며 상추도 싸지 않은 채 고기를 입에 우겨 넣었다. 야, 좀 천천히들 좀 먹어라. 고기 도망가냐? 그렇게 말씀하시는 중대장님이 제일 많이 드셨지 말입니다. 시끄러, 먹는데 방해되니까 말 시키지 마. 왁자지껄한 고기집에서 술과 함께 하는 회식은 점점 분위기가 달아올랐다. 그 때, 식당에서 틀어놓은 티비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안녕하세요, 대한민국 왕실의 공주 이재신입니다. 오늘 이렇게 월드뮤직페스티벌에 많은 분들이 와주셔서 저도 무척 기분이 좋아요! 재작년보다 작년이 더 좋고 작년보다 올해가 더 좋을 것 같은 예감이 드네요. 제가 여기서 너무 길게 말하면 재미 없죠? 저도 빨리 축하 끝내고 야광팔찌 끼고 내려가야겠어요. 모두들 오늘부터 3일 밤, 마음껏 즐기세요!」
뮤직 페스티벌의 축사를 하는 재신의 모습이 정보방송을 타고 있었다. 아, 우리 공주님 예쁘시기도 하지. 근위대가 다들 멍하니 TV를 보는 동안, 옆 테이블의 시끄러운 목소리가 섞여들었다.
"어? 이재신이다."
"아 이재신 진짜 존나 이쁘다. 쟤 고쳤냐?"
"어릴 때도 똑같던데? 이재하랑 완전 닮았잖아. 눈 커다래가지고."
"와 진짜 왕실 유전자 쩔어 시발."
"아 뭐 이쁘면 뭐하냐 남의 여잔데."
거나하게 취한 젊은 남자 둘이 TV 속의 재신의 모습을 보며 큰 소리로 떠들고 있었다. 서 중사는 은근히 옆 테이블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은시경은 이재신이랑 해봤겠지?"
"야 진작에 따먹었겠지. 쩐다 진짜. 공주 따먹는건 무슨 기분이지?"
"시발. 근위대도 다 따먹어본거 아냐? 존나 공주면 골라잡을 수 있을거 아냐."
"아 존나 한번 벗겨보고 싶다."
갈수록 더해지는 공주와 공주의 연인에 대한 모욕적인 음담패설에 다른 테이블의 손님들도 흘끔흘끔 눈치를 주었지만 이미 만취한 두 남자는 사람들의 시선도 아랑곳하지 않은채 자기들끼리 분위기에 취해 떠들고 있었다. 야, 남이 길낸…
그 순간이었다. 서 중사가 남자에게 달려들고, 음식점의 문을 열고 시경이 들어선 것은. 눈 앞에서 벌어진 싸움판에 눈이 커진 시경이 서둘러 달려와 근위대와 옆 테이블의 남자들을 떼어놓았다. 술에 취해 앞뒤 보이지 않는 젊은 남자는 욕설을 섞어 소리를 고래고래 지르고 있었고 서 중사도 씩씩거리며 입술을 꽉 깨물고 있었다. 시경이 등장한 순간 주인부터 주변테이블까지 모두 조용해져 있었다. 경호수트 차림 그대로 온 시경을 제외한 나머지 근위대는 모두 사복차림이어서 근위대일거라고는 다들 생각도 못한 탓이었다.
"이게 무슨 상황이야."
염동하. 시경의 차가운 눈이 동하를 향했다. 염동하 대위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티비에 공주님이 나오셨는데, 저 쪽에서 좀 안 좋은 말들을 했지 말입니다. 아시지 않습니까, 공주님에 대해서, 좀 그런. 모욕적인. 차마 말을 다 제대로 전하지 못하는 동하를 보며 시경은 주변을 돌아보았다. 넘어진 의자들과 엎어진 반찬 그릇, 입가가 터진 서 중사와 그보다 더 얻어터진 상대 남자들. 시경이 난감한 표정으로 이마를 짚었다. 그 때, 문가에서 낭랑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게 지금 무슨 일이죠?"
모두의 시선이 문가를 향했다. 재신이 문가에 기대어 팔짱을 끼고 서 있었다. 고, 공주님! 난데없는 공주의 등장에 얻어터진 취객 둘의 눈에도 순간 취기가 싹 가셨다. 또각또각 구두 소리를 내며 걸어온 재신이 시경 앞에 섰다.
"근위대 회식한다길래 밥값 좀 내주러 잠깐 들렀는데, 왜 근위대가 밖에서 이런 상황에 처한거죠?"
"죄송합니다."
"무슨 일이냐고 물었어요, 은시경씨."
시경을 올려다보는 재신의 목소리가 서릿발처럼 차가워 그 자리에 있는 모두가 바짝 얼어붙었다. 평소에 상냥한 공주였던만큼 더 서늘했다. 동하는 몇년 전 홍대의 클럽에서 재신을 처음 봤을 때를 떠올렸다. 그 때도였다. 애먼 사람들만 잡은 근위대를 바짝 잡았던 재신의 표정이 딱 지금과 같았다. 재신의 눈빛을 받으면서도 시경은 고집스럽게 입을 다물었다. 보다 못한 서 중사가 입을 떼었다.
"공주님, 저쪽에서 먼저 공주님에 대해…"
"난 은시경씨한테 물었어요. 서 중사가 대대장이에요?"
시선조차 주지 않는 재신이 대노한 것이 느껴져 서 중사는 고개를 푹 숙였다. 하지만 억울한 마음이 있는 것이 사실이었다. 저 쪽이 먼저 공주님에게 모욕적인 말들을 했다. 공주님을 호위하는 근위대인데 그런 말을 듣고 넘길 수 없는게 당연했다. 그런데 공주님은 애꿎은 그 상황에 있지도 않았던 대대장만 잡고 있었다.
"내가 분명히 말했을텐데요. 바깥 사람들이 왕실에 대해 뭐라고 말하든 가만히 있으라고요. 궁 밖으로 나가면 거리에 있는 모든 사람들, 왕실에 대해 말할 자격 있어요. 좋은 말이든 나쁜 말이든 무슨 말 해도 되는거 몰라요? 내가 말했죠. 밖에 나와서 우월의식 내보이지 말라고. 그게 왕실 욕먹이는 짓이라고 한거 잊어버렸어요?"
"죄송합니다."
"죄송해야죠."
시경을 노려보던 재신이 어중간한 자세로 서 있던 두 남자를 향해 몸을 돌렸다. 공주와 눈이 마주친 남자 둘은 차마 고개를 들지도 못하고 있었다. 재신은 반듯하게 두 남자에게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제 호위 담당들이 경솔했어요. 공주의 사과에 켕기는 것이 많은 두 남자는 제대로 대답도 하지 못했다. 그 옆에 서 있던 사장에게도 깍듯이 고개를 숙여 사과한 재신이 다시 시경 앞으로 걸어와 지갑에서 카드를 꺼내 내밀었다.
"음식값, 파손한 물건 배상, 다 이걸로 처리하세요."
똑바로 잘 처리하세요. 이 상황. 카드를 받아들며 고개를 숙여 보이는 시경을 쳐다본 재신이 뒤돌아섰다. 여전히 근위대원들에게는 눈길조차 주지 않은 채였다. 문가를 향해 걸어가던 재신이 발을 멈추고 살짝 뒤를 돌아 보았다. 여전히 차가운 얼굴이었다.
"먼저 들어갈 테니까 처리 다 하면 카드 돌려주러 오세요, 은시경씨."
재신이 음식점을 나간 뒤 가라앉은 분위기의 음식점 안을 시경을 빠르게 정돈했다. 어지러진 테이블과 의자들을 정리하고, 사장에게 사과의 말과 함께 배상이 필요하다면 연락 달라고 연락처를 남겼다. 그리고 이제는 눈도 마주치지 못하고 있는 두 남자에게 시경이 저벅저벅 걸어갔다.
"저희 근위대원이 먼저 폭력을 썼다고 들었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만일을 위해 확인차 신분증만 좀 보여주시겠습니까?"
"아니, 저…"
"신분만 확인하면 됩니다."
어물어물거리며 신분 확인을 미루는 남자를 시경은 천천히 뜯어보았다. 시경의 시선이 남자의 머리 끝부터 발 끝까지를 한 번 훑었다. 시경이 느릿하게 눈을 깜빡였다. 남자의 목울대가 한 번 움직였다. 시경의 한 쪽 눈썹이 치켜올라갔다.
"관등성명."
"예… 예?"
"관등성명 대라고."
주변의 공기가 찬물을 끼얹은 듯 좍 가라앉았다. 시경의 목소리가 낮게 깔렸다. 모자를 푹 눌러쓴 남자의 귀 근처에 짧게 잘린 머리가 언뜻언뜻 비쳤다. 아… 동하의 표정도 그제야 변했다. 아 미친… 이 새끼들.
"관등성명 대."
시경은 목소리를 높이지 않았다. 그럼으로써 역으로 식당 내에는 더 공포분위기가 조성되었다. 아까와는 완전히 달랐다. 사복으로 갈아입었다고 휴가 나와 입 함부로 놀릴 것이 아니었다. 휴가나와 폭력사건 얽히고 왕실 모욕죄에 눈 앞에 부마나 다름 없는 근위대장까지 있으니 다리가 풀려 주저앉아도 이상할 것이 없는 상황이었다. 눈치 빠른 염동하 대위가 이 새끼들 헌병대로 보내버리기 전에 빨리 불지 못하겠냐며 남자들의 뒷덜미를 잡고 끌고 나갔다. 서 중사는 다른 근위대원들과 함께 주섬주섬 식당 안을 정리 했다. 몇 번이나 사장에게 사과하고 나오자 이미 염 대위와 남자들은 보이질 않았다. 서 중사는 조심스럽게 시경을 불렀다.
"대대장님, 죄송합…"
"나라고 귀 없고 손 없는거 아니야."
"예?"
"이 일 하다보면 패 죽이고 싶어지는 놈들 언제든지 만나. 그 때마다 이렇게 싸움박질 벌일거야?"
"죄송합니다."
"공주님 얼굴에 먹칠하지 마. 앞으로 주의해."
예! 서 중사는 다시 허리를 숙였다. 시경은 보고 있지 않았지만. 허리를 편 서 중사는 먼저 차에 오르는 시경의 뒷모습을 보았다. 그리고 아까 차가운 얼굴로 시경을 꾸짖던 공주님도 떠올렸다. 지나고 나서 도리적으로 생각하면 책임자인 시경이 책임을 지는 것이 맞다. 그렇다 해도, 모두가 공주님과 대대장님의 사이를 아는데 그렇게 공개적으로. 서 중사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대단하다. 그 자리에서 공주로서 대대장에게 책임을 물은 공주님도, 공주라지만 자신의 여자친구가 하는 일갈을 한마디 말없이 듣고 서 있던 대대장님도.
어느새 서 중사는 자신이 공주를 사모했단 사실을 까맣게 잊고 있었다. 서 중사는 자신이 없었다. 저런 대단한 여자와 연애할 자신이.
9. 서 중사는 모르는 이야기 3
"아까 미안했어요."
"아닙니다."
"내 맘 알죠? 내가 거기서 그렇게 말해야 하는거…"
"알아요. 미안해하지 마세요, 공주님."
시경이 내민 카드를 받아 적당히 협탁에 내려놓으며 재신이 꼬물꼬물 시경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시경의 탓이 아닌 것을 알아 속상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만취한 남자들이 자신에 대해 무어라 말했을지는 대충 짐작이 갔다. 오히려 자신이야 왕족으로 자라면서 수많은 말들을 듣는데 익숙해져 있으니 괜찮았지만 시경을 비롯한 근위대원들은 그렇지 않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마음이야 백번도 더 편을 들어주고 싶었지만 그랬다가는 당장 왕실과 근위대의 이미지가 바닥에 추락할 것이었고 그 책임은 고스란히 근위대장인 시경이 질 판이었다. 시경의 가슴께에 뺨을 댄 채로 허리를 끌어안은 재신의 머리에 가만히 시경이 손을 얹었다.
"공주님 마음 다 알아요."
"미안해요."
"미안한 일, 아니라니까요."
"그래도… 은시경씨랑 나랑 어떤 사이인지 다 아는데."
못내 마음에 걸려하는 재신의 긴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빗어주며 시경이 품 안의 재신을 고쳐 안았다.
"사람들이 나에 대해 뭐라고 말하는거, 듣지 말아요. 난 익숙하니까… 은시경씨도 듣지 말아요."
"들을겁니다."
"…응?"
"사람들이 아무것도 모르면서 공주님에 대해 하는 이야기들, 제가 다 듣고 공주님은 못 들으시게 공주님 귀 막아드릴겁니다."
안돼, 은시경씨 상처받잖아. 은시경씨도 듣지마. 시경에게 폭 안긴채로 재신이 웅얼거렸다. 시경과 같이 있고 싶은 마음과 졸린 몸이 부딪히는 듯한 재신을 보며 시경이 고개를 숙여 재신의 이마에 살짝 입을 맞추었다. 피곤해보이세요. 주무세요. …싫어, 나 자면 갈거잖아요. 궁 안에서는 절대 재신의 방에서 밤 늦게까지 머무르지 않는 시경이었다. 함께 있고 싶은 마음에 오매불망 먼 곳으로 가는 스케줄이 있는 날만 기다리는 재신이었지만 그런 일정이 그리 많을리 없었다. 저 여기 너무 오래 있으면 궁중실장님과 궁인분들 못 주무세요. 부드럽지만 단호한 목소리에 재신이 아쉬운 얼굴로 침대에 누웠다. 손. 목까지 이불을 덮고 내민 손을 두 손으로 감싸쥐고 재신의 머리맡에 앉았다.
"은시경씨…"
"네, 공주님."
"좋아해요. 알죠?"
"저도 사랑합니다, 공주님."
뭐든지 대담하고 거침없으면서도 정작 사랑한단 말은 잘 못해서 늘 좋아한다고밖에 말하지 않는 재신을 대신해 오늘도 시경이 사랑한다고 대답한다. 그 대답이 만족스러운 듯 재신의 눈이 스르륵 감겼다.
공주님이 남들 앞에서 은시경 까는 건 꼭 한번 써보고 싶었다. 저 자리는 공주로서 위엄을 세워야 하고 은시경에게 책임을 물음으로서 결국 은시경을 살려주게 되는 상황이라고 생각했다. 혼내는 쪽이 마음이 아프고 대답하지 않는 쪽이 이해하는 그런거. 사실 정말 쓰고 싶었던건 취객들 군인인거 알고 목 툭, 꺾는 은시경이었는데 어쩌다보니 빠졌다.
공주님 구하는 은소령도. 동화 속 기사님이니까. 작은 스토커 건 정도로 써봤다. 장면은 일드 SP에서 따왔다. 나중에 본격 납치극도 써보고 싶다.
다투고 흔들리고 힘든건 이미 극에서 많이 했으니까, 서로를 보듬고 아껴주는 두 사람이 많이 보고싶다. 사랑만 해도 모자란 우리 은신 (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