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 특집.
57.
"부르셨습니까, 대비마마."
"어, 왔어요. 은시경씨. 여기 앉아요."
"어, 왔냐. 빨리 좀 앉아."
"이리와요. 소매 걷어줄게. 어라? 정복 소매 못 걷나?"
대비의 부름에 조심스레 응접실 문을 연 시경이 눈 앞에 펼쳐진 복잡한 풍경에 당황해 멀거니 서 있자 재신이 뭐해요, 은시경씨! 하고 시경의 팔을 잡아 끌어 자신의 옆에 앉혔다. 물수건에 손을 닦은 재신이 시경의 소매를 동동 걷어주는 동안 시경은 방 안의 풍경을 다시 한 번 찬찬히 둘러보았다. 한켠에 가득 쌓여 있는 선물 상자와 쇼핑백, 봉투들, 그리고 테이블 위에 이미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 송편과 그보다 더 커다란 대야에 담겨 있는 송편 재료들. 대비, 재하, 항아, 재신까지 차례로 앉아 모두 송편 빚기에 열중하고 있었다.
"이게 무슨…"
"무슨은 무슨이에요, 왕실의 추석 준비죠."
"일손 모자라, 너도 곧 우리 식구니 처가살이 먼저 하는 셈 치고 빨리 도와."
"송편 빚어 봤디요? 아무리 사내라도 요즘 남조선에서 기거 하나 안해봤을라구."
영선이 가장 빠른 속도로 송편을 빚어내고 있었고 재하도 의외로 능숙하다. 항아만 이북에서 하던 습관이 남아 빚어낸 모양이 조금 달랐다. 짠, 됐다 이제. 여기 손 닦구. 얼결에 재신이 소매를 걷어주고 물수건으로 손을 꼼꼼하게 닦아줄 때까지 멍하니 있던 시경이 어쩔줄 모르겠단 얼굴로 앉아만 있자 그 새 송편 한 개를 더 빚은 재하가 고개를 돌려 시경을 쳐다보았다.
"저거 해본 적 없는 얼굴이구만. 군에만 있었는데 해봤겠어."
"오빤 왜 사람을 불러놓고 구박을 해? 봐요, 은시경씨. 이렇게…"
재하를 한껏 째려본 재신이 시경의 손에 송편 반죽을 떼어 덜어주며 시경에게 만드는 법을 알려주었다. 이렇게 속을 넣구, 모양을 잡으면 끝! 쉽죠? 방긋 웃어보이는 재신을 보고 시경이 서툴게 재신을 따라해본다. 영 왕실 일가만큼 날렵한 모양새가 나오지 않는걸 보며 재하가 괜히 신나는 듯 키득키득 웃다가 항아에게 발을 꾹 밟힌다. 생각보다 잘 되지 않는 송편 빚기에 이리저리 반죽을 만지며 골몰해 있는 시경을 영선이 잠시 바라보다가 이내 다시 반죽을 떠냈다.
"그런데 이렇게나… 많이 만듭니까?"
"줄데가 많아요. 명절에 집에도 못가는 근위대와 당직 궁인들도 줘야 하고, 엄마 봉사활동 가시는 보육원이랑 양로원에도 보내야 하구요. 아마 오늘 하루 종일 빚어야 겨우 양 맞출걸요."
"저 선물들은…"
"은시경씨도 받은적 있지 않아요? 궁에서 일하는 사람들 명절 선물이랑 상여금. 명단 하나씩 다 체크해야 하고 액수도 확인한 다음에 이름 일일이 다 써야 해서, 저것도 오늘 내로 해야되요."
여전히 손은 바쁜 재신의 설명에 시경이 명절에 받았던 것들을 떠올린다. 확실히 하나하나 자신의 이름이 손으로 쓰여 있었던 선물과 상여금 봉투. 이렇게 다 일일이 준비하고 있었구나.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마음 씀씀이가 고마워져 시경의 입가에 작은 미소가 떠올랐다. 고맙죠? 다 우리 엄마 덕분이에요. 항상 우리가 고맙잖아요. 보필해주는 사람들한테. 재신이 시경의 옆에서 어깨를 으쓱하며 웃었다.
"재신이 너, 추석 인사 영상은 찍었어?"
"아니, 난 내일 찍는다던데?"
"그렇게 촉박하게? 좀 미리 찍지."
"그게 원래 오빠랑 언니 찍을 때 같이 찍기로 되어 있었는데 다른 일정이랑 꼬이는 바람에… 내일 새벽에 머리랑 화장 하구 아침 일찍 찍기로 했어."
"은시경은?"
"전 종묘 차례 행사 보안 확인하러 일찍 가봐야 해서 내일 공주님은 2중대에서 따로 모실 것 같습니다."
"아니, 그거 말고 넌 같이 안 찍냐고."
"…제가 말입니까?"
시경의 눈이 또 전혀 모르겠다는 빛을 띠자 재하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저거저거, 진짜 어쩌지. 애가 군인으로서는 훌륭한데 왕족으로서는 맹해가지고. 왕족, 이라는 말에 시경의 어깨가 흠칫 놀란다. 뭘 놀라, 놀라긴. 공주랑 결혼하면 왕족이지. 왕족이 말입니다, 은시경 소령. 보여야 할게 많아요. 추석 되면 인사영상 찍어야 한다고 국민들한테. 근데 너님께서 공주랑 결혼하는데, 같이 찍어야 하지 않겠냐고. 무시하는 티를 팍팍 내면서 설명하는 재하의 발등에 다시 묵직하게 항아의 발뒷꿈치가 올라간다.
"기케 갑자기 말하면 어캅네까? 아직 결혼 안했으니 설부터 하시라요."
"그래요. 이번까지 재신이 혼자 찍고, 어차피 내년 설이면 결혼 직전이니까. 그 때부터 같이 해도 될거 같은데."
"긴장 풀어요, 은시경씨. 지금 당장 카메라 향해 손 흔들라고 안하니까. 그 대신 올 겨울 내내 내가 빡시게 훈련시킬테니까 각오하구요."
으아, 저 왕족 킬러가 우리집 여자들을 다 홀려놔서 난 외톨이야. 외톨이야, 외톨이야, 하고 철지난 유행가를 흥얼거리며 재하가 혼자 송편빚기에 열중하는 척을 하자 결국 테이블에서 웃음이 터져나온다.
시간이 지나자 처음엔 서툴었던 시경도 제법 익숙하게 송편을 빚고 한사람 손이 늘어난 덕분에 예상보다 송편빚기가 일찍 끝나자 여세를 몰아 추석 선물 정리도 쉽게 끝마쳤다. 재하가 이름을 부르면 시경이 명단에서 찾고, 항아와 재신이 상여금 봉투와 선물을 쇼핑백에 이름을 써서 넣으면 마지막으로 영선이 최종 확인을 했다. 응접실 한 켠에 차곡차곡 쌓인 선물 봉투들을 뿌듯하게 본 영선이 기지개를 펴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항아야, 수고 많았다. 재하랑 재신이도 고생했고. 은시경씨, 이렇게 부려서 미안해요. 고생했어요."
"아닙니다. 제가 서툴어서 폐나 끼친게 아닌지, 죄송합니다."
"뭘, 곧 결혼할텐데 이정도는 부려도 되지."
"재하 너."
"알았어, 알았어. 자자. 이제 해산합시다. 내일부터도 바쁘니."
영선의 잔소리가 시작되려는 찰나 재하가 손을 휘휘 저으며 대비전 문을 나섰다. 은시경 동지 오늘 수고했디요. 푹 쉬시라요. 살랑살랑 손을 흔드는 항아에게 인사를 하고 시경과 재신도 나란히 복도를 걸었다. 괜찮았어요, 오늘? 재신이 살며시 시경의 손을 잡으며 묻자 시경이 웃으며 대답했다. 재밌었습니다.
"어우, 처음이라 재밌었나보네. 몇년 해봐요. 재밌나."
"앞으로 저도 오래 하게 될텐데요."
"그래도 은시경씨도 같이 해서, 나도 오늘 재밌었어요. 한동안 넷밖에 없었으니까."
재강과 현주의 빈자리를 떠올린 재신의 눈동자가 쓸쓸한 빛을 띠었다. 큰언니가 송편을 진짜 예쁘게 잘 빚었거든요. 그래서 우리 다 세자나 공주 태어나면 엄청 예쁠거라고, 막 그랬었어요. 재신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는 것을 보며 시경이 재신의 손을 힘을 주어 꼭 쥐었다. 재신의 발걸음이 천천히 느려졌다.
"불러주셔서 감사했습니다, 대비마마께."
"정말로요?"
"네. 어릴 때 어머니가 돌아가신 이후로 추석이라고 뭐 특별한걸 해본 적이 없어서."
창 너머로 보이는 새끼손톱만큼 보름에서 모자란 달로 시선을 돌리며 시경이 아득하게 말했다. 일밖에 모르던 아버지와 명절이라고 딱히 명절 기분을 낸 기억은 없었다. 왕실의 여러 명절 행사를 주도해야 하는 규태는 명절에도 궁에 있는 적이 많았고, 시경은 혼자 집에 있거나 친척집에서 가시방석에 앉은양 불편한 기분으로 있어야 했다. 육사에 들어가고 임관하면서 군에서 추석을 맞는게 차라리 덜 쓸쓸하고 덜 불편했다. 영선은 규태를 오래 보았을테니 그런 자신도 알고 있었을 터였다. 그래서 부른 것이 아니었을지. 공주궁 복도에 접어들며 시경이 재신의 손가락 끝을 쓰다듬었다.
"대비마마는 좋은 분이십니다."
"…뭘 새삼스레."
재신이 방긋 웃었다. 둘 다 오래 송편을 빚은 탓에 손가락 끝이 반질반질했다. 한참이나 내실 앞에서 서로의 손가락만 만지작거리던 두 사람이 마주보고 다정하게 웃었다.
58.
"공주님, 이제 출발하실 시간입니다."
"아, 왔어요? 가요. 이런 아침에 미안해요."
"아닙니다. 제 일인데요."
재신이 차량에 오르는 것을 확인한 서 중사가 운전석에 올랐다. 재신의 추석 인사 영상 촬영 일정이 밀리는 바람에 원래는 종묘 차례 사전 보안 확인쪽으로 차출되었던 2중대 중 서 중사만 재신의 일정에 함께 하는 상태였다. 중대원들의 좋겠다, 부럽다, 등등의 눈길을 한껏 받으며 서 중사는 한적한 아침 도로를 달렸다.
"명절에 집에도 못가고 고생이 많아요."
"아닙니다. 어머니께서 이제야 밥값한다고 자랑스러워 하십니다. 공주님 모시는 덕분에 티비나 신문에도 가끔 찍히고 해서 친척분들께 체면도 세우십니다."
"그러면 다행이구요."
가벼운 차림의 재신이 서 중사의 시원한 대답에 안심한 듯 웃어보였다. 룸미러로 공주의 얼굴을 훔쳐본 서 중사의 귀 끝이 붉어졌다. 미용실에 내린 재신이 안으로 들어서자 왕실 담당 미용사가 재빨리 재신을 자리로 안내한다. 명절 초입이라 그런지 미용실은 아침부터 머리를 하러 온 여성들로 가득했다. 어, 공주님이다. 대박. 여기 원장님 왕실 출입한다더니 정말인가봐. 거울 앞에 앉는 재신의 뒷모습을 보고 젊은 아가씨들이 소근거렸다. 서 중사는 어디에 서 있어야 할지 넓은 미용실 안에서 혼자 자리를 잡지 못하고 있었다.
"서 중사, 거기 편하게 앉아요. 나 한참 걸릴거에요. 힘들게 서 있지 말구."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서 있는다고 경호 더 잘되는거 아닌거 아니까, 그냥 편하게 있어요. 은시경씨도 없는데 뭘."
재신의 권유에 서 중사는 안절부절 못하다 한쪽 의자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공주님, 죄송해요. 제가 궁으로 들어가야 하는데. 아니에요. 내가 날짜를 급하게 바꿔서 그런걸요 뭐. 명절 대목인거 아는데 원장님을 궁에서 잡아둘수야 있나요. 머리는 설 때처럼 하실거죠? 네, 원장님 솜씨 믿으니까 잘 해주세요. 몇 번이나 재신의 머리를 만져준 적 있는 원장에게 편하게 말을 건네고 재신은 잠이 오는 듯 곧 앉은채로 잠들었다. 서 중사는 시선을 둘 곳을 찾지 못하고 각잡아 앉은 상태로 끊임없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확실히 미용실은 남자에게 편한 곳은 아니다. 그런 서 중사의 어깨를 누군가가 톡톡 두드렸다.
"저기, 공주님 경호원이에요?"
"…예?"
"공주님 경호원이시냐구요."
"예, 그렇습니다만."
"우와, 대박. 진짜 근위대래. 나 근위대 처음 만나봐."
"어려보이는데. 몇살이에요? 공주님만 경호해요?"
재신 또래의 여자들이 호기심에 반짝이는 눈을 하고 서 중사에게 질문을 건넸다. 임무 수행 중 민간인과의 사적인 대화는 금지되어 있다. 아무 말도 안해, 근위대 원래 말하면 안되나? 안될걸? 그래도. 저기요, 같이 사진 한장만 찍어주면 안되요? 어느새 주변의 시선이 자신에게 집중된 것을 느끼는 서 중사의 등에 식은땀이 흘렀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는 서 중사의 귀에 익숙한 웃음소리가 까르르 들렸다.
"왜 우리 근위대 괴롭히고 그래요, 그 사람 어려서 대답 잘 못해요. 봐요, 무서워하고 있잖아."
어느새 잠에서 깬 듯 재신이 거울로 뒤쪽을 보며 웃고 있다. 서 중사, 편하게 대답해도 되요. 아무도 서 중사 안 잡아먹으니까. 그리고, 임무 수행중인 근위대와 같이 사진 찍는건 안되니까 예쁜 언니들 사진은 자제해주세요. 깔끔하게 교통정리를 마친 재신이 다시 눈을 붙이고 서 중사는 여자들의 질문공세에 띄엄띄엄 대답을 하며 남은 시간을 보냈다. 공주님, 제발. 제발 빨리.
"서 중사, 나 다 끝났어요. …어? 은시경씨?"
자리에서 일어나던 재신의 입에서 나온 이름에 서 중사의 시선도 자연스레 미용실 입구를 향했다. 미용실의 유리문을 열고 시경이 들어오고 있었다. 꺅, 은시경이다! 톤 높은 감탄사들이 튀어나오는 가운데 시경이 망설임없이 곧장 재신을 향했다.
"끝나셨습니까, 공주님. 모시러 왔습… 공주님?"
"딱 맞춰왔네. 지금 막 끝났어요. 왜요, 별로에요? 이상해?"
"아니요. 공주님 머리색이…"
새카만 검은색이 되어 있는 재신의 머리를 시경이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재신의 트레이드 마크와도 같은 오렌지빛 굽이치는 머리는 단정한 검은색이 되어 틀어올려져 고전적인 머리장식이 가득 꽂혀 있었다. 쳐다보기만 하고 말이 없는 시경을 올려다보는 재신의 얼굴 표정이 살짝 미묘하게 변했다.
"한복 입고 인사 영상 찍어야 하니까 검은색으로 했는데… 은시경씨는 별로 마음에 안드나봐."
"아니요. 까만 머리도 예쁘십니다."
서 중사는 두 사람이 이야기하는 사이 재신의 옆얼굴을 몰래 한참 뜯어보았다. 원래의 붉은 머리가 이국적인 느낌으로 화려하다면 까만 머리의 재신은 차분하고 동양적인 고혹미가 있었다. 마치 과거 어느 시대의 공주같은, 머리색을 바꾼 것 뿐이었는데 분위기가 확 달라졌다. 예쁘다는 말에도 한참을 의심스러운 눈으로 시경을 보던 재신이 삐죽 웃었다. 이거, 임시로 한거에요. 감으면 다시 빨간 머리. 속았죠? 혀를 쏙 내밀어보이는 재신이 눈에 띄게 안심한 얼굴이 된 시경을 보고 결국 웃음을 터뜨렸다.
"뭐야아, 맨날 공주의 품위품위 그래서 까맣게 하면 단정하다고 좋아할줄 알았더니. 의외로 빨간 머리가 취향이에요?"
"공주님은 어떻게 하셔도 다 예쁘시지만 굳이 고르자면… 흠흠."
시경이 괜한 헛기침으로 말 끝을 흐렸다. 어차피 결혼하고 나이 더 먹으면 언제까지 이런 색으로 있을 수도 없는데, 할 수 있을 때까지 이 머리 할거에요. 시경의 팔을 톡톡 두드리며 재신이 벚꽃잎같이 연한색으로 물든 입술을 당겨 웃었다. 어,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네. 서 중사, 가요. 스튜디오 가서 옷 갈아 입고 영상 찍으려면 빠듯하겠다. 언니, 오늘 고마웠어요! 명절 잘 보내요! 급하게 원장에게 인사한 재신이 서 중사를 부르자 서 중사는 곧장 주차장에 세워둔 차를 입구로 가져왔다. 재신이 뒷좌석에 오르는걸 확인하고 시경이 조수석에 올라탔다. 손거울을 꺼내 이리저리 머리를 비춰본 재신이 만족스러운 얼굴로 셀카까지 팡 찍었다.
"서 중사는 어때요?"
"예?"
"내 머리. 까만게 나아요, 원래 색이 나아요?"
"그… 공주님은 늘 아름다우시지만 저는 개인적으로는 까만 머리 하신거 좋습니다!"
"음, 이런 시원한 대답 마음에 들어. 착한 서 중사한테 공주가 까만 머리 셀카를 하사해야지."
"감사합니다!"
"안됩니다."
"뭐래, 빨간 머리 좋아하는 은시경 소령님한테는 안 줄거에요."
뺨에 와닿는 시경의 시선에 서 중사가 결국 아닙니다, 공주님. 저는 아름다우신 모습 보는 것만으로 좋습니다. 하고 꼬리를 내렸다. 그제야 시경의 눈길이 다시 정면을 향하고, 턱을 괸 채 창 밖을 보는 재신의 얼굴도 그런 시경이 싫지는 않은 듯 눈꼬리가 가늘게 접혀 있었다.
59.
추석 당일, 아침 일찍 종묘 차례를 마친 재하가 기지개를 켜며 집무실로 돌아왔다. 그 뒤로 항아, 항아의 품에 안긴 세자, 재신, 시경까지 차례로 들어오자 재하의 책상 부근이 복작복작하다. 자, 이제 장인어른께 인사 올려볼까. 재하가 영상통화를 거는 동안 오랜만에 아버지의 얼굴을 볼 항아가 재빨리 거울을 보며 매무새를 다시 점검한다. 신호가 몇 번 가지 않고 바로 화면에 남일의 얼굴이 보인다.
"장인 어른, 안녕하셨어요?"
- 전하도 무탈하십네까. 내래 전하 덕에 잘 지내고 있시요.
"아바디."
- 일없다. 어이구, 우리 손자. 벌써 기케 컸네?
화면 너머로 세자가 꺄르륵, 웃자 남일의 주름진 얼굴이 활짝 펴진다. 어르신, 안녕하셨어요? 재신도 곱게 인사를 건네고 시경도 꾸벅, 허리를 숙여 보였다. 공주의 결혼 소식을 들었다며 남일이 WOC 멤버들에게 들은 시경의 칭찬을 한껏 하자 시경이 쑥쓰러워 눈썹을 만지작거렸다. 돌아가며 인사와 안부를 전하고 재하와 항아가 통화를 더 하도록 재신과 시경은 먼저 집무실을 나섰다.
"시경씨, 오늘 일정 더 없죠?"
"특별히는 없습니다. 어디 가실데라도…"
"가실데? 당연히 있죠! 잠깐 기다려요."
시경을 두고 잠시 사라졌던 재신이 양팔 가득 짐을 들고 나타났다. 얼떨결에 재신에게 떠밀려 짐을 받아들고 차에 싣고 나서야 시경이 의아한 얼굴로 재신을 보았다.
"어디… 가시는겁니까?"
"명절에 차례 지냈으니 성묘를 가야죠."
"성묘요?"
"응. 은시경씨 어머니한테."
"…예?"
왜요? 우리 이제 결혼할 사이인데 예비 시어머니께 인사 드려야죠. 내 친구들도 결혼하기 직전 명절에는 다 인사 드리러 가고 그러던데? 은시경씨도 같이 송편도 빚고 명절 준비 했잖아요. 오늘 차례도 지냈고. 무엇이 문제냐는 듯 곱게 차려입은 재신의 얼굴이 해사하다. 시경은 할 말을 잊고 재신을 바라보았다. 정말 한 치 앞을 알 수 없는 사람이다, 자신의 눈 앞에 있는 이 공주는. 시경은 어머니를 여읜지 20년이 넘었다. 어머니가 없는 삶이 익숙했고, 어느덧 자신에게 가족이라 함은 아버지인 규태 뿐이었다. 그런데 재신은 아무렇지 않게 처가에 인사를 올렸으니 시댁에도 가야한다는 말을 한다. 가슴을 누르는 묵직한 무게에 시경은 심장께를 움켜쥐고 싶어졌다. 내가 정말 이 사람과 결혼해도 될까. 이렇게 고운 사람과. 말이 없는 시경을 재촉하듯 재신이 시경의 소매를 잡고 흔들었다.
"빨리요, 얼른 안 가면 막혀요."
시경의 차가 경기도 끝자락의 한적한 동네를 향했다. 야트막한 선산을 오르는 재신의 구두를 신은 발걸음이 버거워지자 시경이 업히세요, 하고 등을 돌렸다. 안돼요, 결혼도 안한 새애기가 벌써부터 남편 부린다고 어머님이 안 좋아하셔. 고집있게 한걸음 한걸음 발을 내딛는 재신의 속도에 맞추어 시경도 천천히 발걸음을 떼었다. 작은 언덕의 중간에 옆자리를 비운 채 작은 묘소가 홀로 외롭게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양 손에 든 비닐봉지를 내려놓은 시경의 눈에 비죽 솟은 풀 하나 없이 잘 정돈된 묘의 풍경이 들어왔다. 앞에 놓인 꽃과, 공기중에 희미하게 섞여 있는 향기로운 술냄새. 누군가가 먼저 다녀간 흔적에 돗자리를 펴던 재신이 살짝 웃었다.
"은시경씨, 거기 비닐봉지 안에서 접시 좀 꺼내줘요."
재신의 부탁에 시경이 비닐을 뒤적이자 일회용 접시와 나무젓가락, 그리고 작은 비닐팩에 잘 싸여있는 음식들이 차례로 나온다. 아직 온기가 남아 있는 전이며 산적들에 시경이 재신을 돌아보았다.
"음식들…"
"빈 손으로 그냥 올 순 없잖아요."
"공주님이… 하신겁니까?"
"별거 없어요. 실장님이 도와주셔서 난 별로 한 것도 없구. 다른 봉지 안에 과일 있는데 그것들 좀 큰 접시에 담아줘요. 위에 깎을 줄 알죠?"
바쁘게 접시에 음식을 모양내어 담으며 재신이 시경을 재촉했다. 놀랄 틈, 감동할 틈도 주지 않는 자신의 공주를 향하는 감정이 못내 버거워 시경은 고개를 푹 숙이고 눈을 몇 번 깜빡였다. 선선한 바람에 묘소에 핀 들꽃들이 하늘하늘 흔들렸다.
나란히 절을 올리고 무릎을 꿇어 앉은 두 사람이 시경의 어머니를 마주했다. 스커트 끝을 만지작거리는 재신의 오른손에 끼워진 반지에 박힌 보석이 오래전 주인을 알아보는 듯 햇빛을 받아 오랜만에 선명한 붉은색을 띠었다.
"어머님, 처음 인사드려요. 이재신이라고 합니다. 아드님과… 결혼할 사람이에요. 제가 누군지는 아시죠? 공주에요. 어쩌면 예전 연말 만찬 같은데서 뵈었을 수도 있는데… 그 때는 제가 너무 어려서 저는 잘 기억은 나지 않아요. 죄송해요. 많이 부족하고, 허울뿐인 왕족 불편하기만 한 자리인데… 너무 좋은 아드님과 제가 결혼해요. 서툴고 철없는 며느리지만 잘 할게요."
조근히 말을 건네는 재신의 얼굴이 마치 살아있는 시어머니 앞이기라도 한 양 약간 긴장해있다. 시경은 재신의 옆모습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눈동자는 맑지만 단호하고, 콧대는 자존감이 느껴지고, 입술은 사랑스럽고 그 입에서 나오는 말들은 더더욱 향기롭다. 어머니께서 마음에 들지 않아하실리 없다. 인사를 마친 재신이 돗자리를 짚고 일어나 구두를 신었다. 난 바로 요 옆에서 꽃구경 할테니까, 시경씨도 어머니한테 인사해요. 스커트를 팔랑이며 재신이 열 발쯤 떨어진 곳에서 시경에게 등을 지고 들꽃들을 본다. 이 거리에서 저 정도 떨어진다고 안 들릴리도 없는데. 재신의 뒷모습을 보고 빙긋이 웃은 시경이 무릎걸음으로 한 발 묘에 더 가까이 갔다.
"어머니."
입술 밖으로 나온 단어가 스스로도 낯설어 시경은 한동안 말을 멈추었다. 기일이나 명절, 모친의 묘소를 찾아온 적은 있지만 이렇게 제대로 된 음식들을 가지고 온 적도 없었고 육성으로 그 이름을 불러본 적도 없었다. 그저 술이나 한 잔 올리고 반나절 앉아 있다 가는게 전부였다. 얼마만에 부른 것인지 알 수 없는 그 단어에 이상하리만치 심장이 뛰었다.
"저… 결혼합니다. 세상에서 가장 귀한 공주님과. 놀라셨죠. 공주님과 결혼이라니. 저도 제가 공주님과 결혼하게 될줄은 몰랐어요. 저에겐 과분한 분이에요. 신분도… 그렇지만, 공주님이 아니셨다고 해도. 하늘의 별처럼 빛나는 분인데, 저에게 오셨어요. 어머니께서도… 만나보셨다면 좋아하셨을거에요. 틀림없이."
시경이 곧게 허리를 폈다. 저희, 잘 살겠습니다. 시경의 입에서 나온 둘을 함께 묶는 호칭에, 돌아서 있던 재신의 입가에도 미소가 번진다.
60.
시경의 등에 업힌 재신의 맨발이 달랑달랑 흔들린다. 아, 한 손에 구두를 든 채 시경에게 업혀 산을 내려가던 재신이 손가락으로 하늘을 가리켰다. 달 떴어요. 벌써 떴네. 그 말에 시경도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해가 진지 얼마 되지 않은 어둑한 밤하늘에 선명한 보름달이 커다랗게 걸려 있었다. 소원 빌어요, 소원. 재신의 팔이 시경의 목을 꼭 감아오자 그 자리에 선 두 사람이 같은 하늘을 바라보았다. 소원 빌었어요? 네. 뭐 빌었어요? 비밀입니다. 에이, 또 세계평화와 국가 안보 빌었구나? 다시 옮겨지는 걸음걸음에 재신의 낭랑한 목소리와 시경의 낮은 웃음소리가 섞여들고 그런 두 사람의 뒷모습을 환한 달빛이 비추었다.
_
지금이 아니면 쓸 수 없다는 마음으로 필사적으로 썼다 으하하
두 사람과 왕실에게 따스한 명절을 보내게 해주고 싶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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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절 잘 보내셨나요. 저는 길이 어지간히 막혀서 간만에 고생을 -"- 일이 있어 일찍 돌아와야 하긴 했지만 그래도 오랜만에 쉬었습니다. 밀린 집안일도 하고… 고생하셨을 분들, 지금쯤은 푹 쉬고 계시길 :D
_
본편에 못 넣은 짤막한 드립.
"짜잔- 명절에 집에도 못가고 고생들이 많아요. 왕실 수제 송편 먹어요."
"우와! 공주님!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공주님! 감동입니다!"
"이거, 대비부터 왕, 왕비, 공주까지 총동원되서 만든거니까 많이들 드세요. 아, 제일 못생긴건 은시경씨가 만든거."
"…공주님."
"꺄하하. 농담, 농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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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혀 다른 이야기지만 얼마전에 본 레거시를 봤는데 이변이 없는한 올해 하반기 내 안에서 폭망의 영화 확정. 본시리즈 팬+제레미 레너를 좋아하는 나에게 이런 시련을 주다니. 하지만 특수요원 은시경과 과학자 이재신의 도망기…는 매우 끌렸다.
더불어 오늘은 테이큰2를 봤는데 역시나 딸이 납치되어 느네 다 죽일거야 하는 은시경과 얼결에 같이 납치된 강한 여자 공주님도 또 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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징검다리 휴일이지만 한 주의 시작은 시작이네요. 늘 그렇듯 화이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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