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려던 몇가지 이야기가 죽 연결되면서 또 스압.
53.
"거기 떡볶이 맛있죠."
"네, 맛있네요."
"엄마가 오빠들이랑 나 임신했을 때 그렇게 그 집 떡볶이를 좋아하셨대요. 그래서 글쎄 우리 아빠가 직접 가서 사신 적도 있었다구. 그래서 우리 남매들도 다 그렇게 그 집을 좋아하나봐. 근데 이제 항아언니도 그러니 할머니 오래사셔야겠다, 왕실 3대째 야식 책임지시려면."
시경의 손을 쥔 채 앞뒤로 흔들며 기분좋게 복도를 걷던 재신이 깔깔 웃었다. 세자 임신 때 내도록 신궁 근처 재래시장 골목의 떡볶이집에서 떡볶이가 먹고 싶다고 하던 항아가 모처럼 그 생각이 났는지 한밤이 다 된 시간에 나가려는 찰나 어린 세자가 울기 시작해 재신이 시경과 함께 다녀온 참이었다. 할머니이, 시장 구석의 작고 낡은 분식집 문을 열고 들어가며 재신이 애교있게 주인을 부르자 허리가 약간 굽은 할머니가 어이구, 우리 애기공주 왔누. 하고 재신을 반겼다. 우리 애기공주가 이렇게 처녀가 되서 시집을 다 가네. 할머니가 재신의 옆에 서 있던 시경을 쳐다보자 시경이 꾸벅 고개를 숙였다. 신랑이 훤칠하네. 신수가 좋아. 할머니가 홍홍 웃으며 스티로폼 접시에 떡볶이를 싸주었다. 김이 모락모락 새어나오는 그릇이 검은 봉지에 담기자 시경이 비닐봉지를 받아들었다.
「평양새댁은 애기 낳았나?」
「애가 백일도 넘었어요. 완전 쑥쑥 큰다니까요.」
「사내애야?」
「왕자에요. 언니 대박이죠.」
「잘됐네, 새댁 맘고생 좀 덜 하겠어. 그저 시집 와서 아들 낳고 잘 키우면 그게 며느리가 욕 안먹고 잘 사는 길이야.」
「에이, 우리 엄마 시집살이 안 시켜요. 얼마나 이뻐하는데요.」
「청원댁이 맘이 약해서 며느리 잡진 못하디. 어디 보자… 작은왕자가 야채순대를 더 좋아했지. 이것도 가져가.」
「할머니 이렇게 많이 싸주면 장사 어떻게 해요!」
기어코 순대 한 접시를 더 안겨주려는 할머니와 안 받으려는 재신이 티격태격하다가 결국 한봉지를 더 받아들고 재신이 할머니가 안보는 틈에 돈통에 만원짜리를 두 장 꽂아넣는다. 할머니, 또 올게요! 시경의 팔짱을 끼며 재신이 할머니에게 손을 흔들어보였다. 공손하게 고개를 숙인 시경이 차에 오르자 재신이 조수석에 올라 떡볶이며 순대가 든 비닐봉투를 무릎 위에 올려놓는다.
「뜨겁지 않으세요? 뒷좌석에 놓으시는 편이…」
「괜찮아요, 딱 따뜻한 정도인데 뭐. 아, 맛있겠다.」
「많이 오셨나봐요.」
「유학 가기 전까진 진짜 거의 매일 다니다시피 했을걸요. 워낙 어릴 때부터 가서 할머니가 아직도 나만 보면 애기라고 그래요. 연세가 많으셔서 요샌 기억이 오락가락 하시나봐요. 작은 오빠 왕 된게 영 입력이 안되시나봐. 유독 기억을 못하시더라구요.」
「그래도 왕비님은 아시는 듯 하시던데요.」
「언니도 몇번 갔거든요. 할머니가 이북이 고향이셔서. 언니 처음 갔던 날엔 거의 밤새 통곡을 하시면서 언니 붙들고 고향 얘기 들으셨어요. 언니도 정이 가고 그랬는지 많이 가고 그러더라구요.」
재신이 다리를 움직일 때마다 재신의 무릎 위에 놓인 비닐봉투가 바스락바스락 소리를 낸다. 신기합니다. 횡단보도 앞에서 멈추었던 차를 출발시키며 시경이 불쑥 하는 말에 재신이 고개를 돌려 시경의 옆모습을 쳐다보았다. 뭐가요? 그냥, 왕실 사람들도 똑같이 사는구나 싶어서요. 근위대 들어오기 전엔 몰랐습니다. 진지한 얼굴을 보던 재신이 웃음을 터뜨렸다. 그럼 뭐, 왕족들은 매일 치렁치렁 드레스 차려입고 긴 테이블에서 촛불 놓고 칼질만 할 줄 알았어요? 뭐, 다들 그렇게 생각하긴 하지. 재신이 조수석 등받이에 몸을 깊숙히 파묻었다.
응접실에서 넷이 도란도란 앉아 사온 음식을 나누어 먹고 두 사람은 공주궁으로 향하는 어두운 복도를 나란히 걸었다. 최소 밝기로만 전구를 밝혀 달도 잘 보이지 않는 야밤의 신궁 복도는 그림자마저 희미했다.
"와, 에너지 절약정책 한다더니 복도 조명이 이렇게 어둡다니까."
"불편하시면 좀 더 밝게 하라고 이야기하겠습니다."
"전기 모자라다고 난리난리 하는 이 시점에 호화조명으로 왕실이 전기 다 잡아먹는다고 욕 먹을 일 있나? 별로 안 불편하니까 괜찮아요. 그리고 이렇게 어두우면…"
재신이 발을 들어 시경의 뺨에 쪽, 입을 맞추었다. 이런거 해도 CCTV에 잘 안보일걸요. 불시에 공격을 받은 시경의 얼굴이 멍하다가 이내 시경이 재신의 손을 잡아 이끌어 복도를 살짝 돈다. 여긴 아예 사각입니다. 급하게 겹쳐져오는 입술에 재신이 장난스럽게 입을 꼭 다물다고 열어주지 않다가 이내 시경의 목에 팔을 감고 키스에 응한다. 그런데 복도에 이렇게 사각 있어도 되는거야? 그래서 예산 승인 나는대로 교체 예정입니다. 원래 사각이 있었던게 아니라 카메라가 노후되면서 됐다 안됐다 하는 것들이 늘어나서. 저쪽 카메라가 한 대 안들어오고 있었는데 지난주인가부터 저 카메라도 아예 안들어와서 이쪽 복도에 사각이 늘었습니다. 시경이 손가락으로 천장 구석의 카메라를 가리켰다.
밤에 먹어서 살찌면 어쩌지? 좀 더 찌셔야 돼요. 공주님 너무 마르셨어요. 쓰러지실까봐 겁납니다. 에이, 내가 얼마나 건강한데요. 내일 오전에 오찬모임도 있는데 얼굴 부으면 안되는데. 다 먹어놓고 뒤늦게 후회를 하며 재신이 내실 문을 열려고 하는 때였다. 시경이 급하게 재신의 손을 겹쳐 쥐어 문고리에서 손을 떼게 하고는 재신을 자신의 뒤로 숨겼다. 왜, 왜 그래요? 놀란 재신을 향해 시경이 입술에 손가락을 대 보였다. …안에 누가 있습니다. 궁인들이 있을 수도 있습니까? 누가 있다는 말에 눈이 커진 재신이 고개를 저었다. 나 없을 땐 내 방에 아무도 안들어와요. 더구나 이 시간엔.
시경은 재신을 등 뒤로 숨기고 조심스럽게 총을 꺼냈다. 이 시간에 공주궁 내실에 사람이 있을리가 없다. 이쪽 야간순찰이 몇시에 있었지? 시경은 시계를 한 번 쳐다보았다. 안에 있을 침입자에 오감이 바짝 섰다. 한 손에 총을 든 채 시경은 휴대폰을 꺼내 동하에게 문자를 보냈다. 「공주궁에 침입자 발생. 보안 확인하고 즉시 지원할것」 시경은 등 뒤의 재신을 향해 반쯤 돌아서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제 등 뒤에서 떨어지지 마세요. 아셨죠? 곧 동하와 근위대원들이 올테니 걱정 마시구요."
시경의 옷깃을 꼭 쥔채로 재신은 고개를 끄덕였다. 시경은 조심스럽게 문고리를 잡았다. 짧은 순간에 온갖 생각이 시경의 머릿속을 휩쓸었다. 어떻게 들어온 것인지, 무슨 목적인지, 왜 공주궁인지, 전하와 왕비님이 계신 본궁은 괜찮은지. 턱 끝까지 올라온 위험이 전신에 경고를 울렸다. 입술을 깨문 시경이 순간 문을 열어제끼고 안을 향해 총을 겨누었다. 움직이지 마! 총을 겨눈채 시경이 재빨리 실내의 동태를 살핀다. 갑자기 들이닥친 시경에 와르르, 하는 소리가 들리고 방 안에 있던 남자들이 엉거주춤 놀라 시경을 본다.
엉망진창이 된 방 안, 온통 열려 있는 서랍과 드레스룸에서 던진 듯한 재신의 옷가지들. 영락없는 도둑이었다. 총을 겨눈채 시경이 한 발 더 방으로 들어선다. 두 명 중 한 명이 창문으로 뛰어내리려 창가를 향하는 순간 시경이 달려 남자의 뒷덜미를 잡아채 팔을 꺾고 그와 동시에 복도에서 급박한 발소리가 들린다.
"대대장님!"
순식간에 근위대가 남자들을 둘러싸고 총을 겨눈다. 잭나이프를 휘두르던 남자들은 간단히 제압당하고 동하와 김 소위가 남자들을 체포했다. 전문 절도범으로 보이지도 않는 도둑이 공주 내실까지 들어오다니, 말도 안되는 일이었다. 엉망이 된 방 안에서 근위대가 남자들을 연행하는 가운데 재신의 비명이 내실을 울렸다.
"아, 어떡해!"
"공주님?"
"은시경씨. 하니가, 하니가…"
재신의 팔에 한 쪽이 크게 찌그러진 새장이 안겨 있었다. 그 안에서 죽은듯이 움직이지 않는 앵무새를 보며 재신의 눈이 바르르 떨렸다. 어떡해요, 하니가, 하니가 안 움직여… 아무래도 침입자를 보고 시끄럽게 울었을 새를 새장째로 집어던진 것 같았다. 서 중사가 재빨리 휴대폰을 꺼냈다. 연락해서 왕실 수의사를 부르겠습니다. 전하께 바로 보고 올리고 이 새끼들 취조실에 넣어. 신속하게 지시를 내리는 시경의 표정이 딱딱했다. 시경은 천천히 다시 방을 둘러보았다. 제멋대로 던져져 발자국이 찍힌 재신의 고운 옷들, 흩날린 악보들과 이리저리 뒤엉켜 남자들이 들고 있던 가방에 담긴 패물들. 감히 공주의 방에 들어온 것도 모자라 재신의 손이 닿고 재신이 아껴왔던 것들을 짓밟은 침입자들을 시경은 도무지 용서할 수가 없었다. 시경은 분노를 가라앉히려 애쓰며 재신을 돌아보았다. 재신은 옷가지나 악세사리는 아무래도 좋다는 듯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앵무새만을 살피고 있었다.
"공주님."
"우리 하니 잘못되면 어떡해요… 왜 눈을 안뜨죠?"
"괜찮을거에요. 보세요. 숨 쉬고 있어요. 우선 여기는 두시고 자리를 옮기셔서 좀 쉬세요. 왕실 수의사가 곧 도착할겁니다."
시경이 재신의 손을 잡으며 부드럽게 위로했다. 입술을 꼭 깨물며 재신은 고개를 끄덕였다. 공주님, 전 여기 일을 처리해야 해서… 말끝을 흐리는 시경을 보며 재신이 고개를 저어보였다. 괜찮아요. 서 중사랑 갈게요. 때마침 연락을 받은 당직궁인들이 급하게 재신을 모시러 오고 재신은 쓸쓸한 눈으로 방 안을 한 번 돌아보고는 새장을 들고 자리를 피했다. 현장 사진을 찍고 내실을 수습해나가는 광경을 보며 시경은 이마를 짚었다. 내실은 재신의 사적인 공간이었다. 재신이 유일하게 몸도 마음도 편하게 가질 수 있는 공간인데, 이렇게 더럽혀지다니. 시경은 천천히 허리를 굽혀 열린 신발장에서 튕겨져 나와 크게 흠집이 난 재신의 구두 한 짝을 집어들었다. 몇달 전 자신이 재신에게 선물했던 구두였다. 엉망이 된 방만큼 시경의 가슴이 욱씬, 아파왔다.
자려던 찰나 보고를 받은 재하는 대노했다. 뭐?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해? 어떻게 도둑들이 내실까지 들어와! 보안을 어떻게 하길래 공주궁 내실을 다 뒤지는 동안 아무도 그걸 몰라! …죄송합니다. 시경은 죄송하다는 말 외엔 할 말이 없었다. 신궁 경비는 근위대의 중요한 임무 중 하나였고 큰 사고가 발생한 지금 총책임자인 시경이 고스란히 분노를 맞는 것도 당연했다. 차라리 혼이 나는 편이 마음이 편했다. 약혼식 이후 시경은 누구보다도 바빴다. 재신과 함께 종친들에게 인사도 다녀야 했고 왕실예법교육도 받아야 했다. 공주의 공식적인 파트너로서 대내 행사에도 빠질 수 없었다. 그렇다고 본래 일을 소홀히 해서는 안되는 거였는데. 깊은 자책감이 시경을 지배했다.
"뭐하는 놈들인지, 어디서 들어온건지 조용하고 신속하게 처리해. 기자들이 냄새 맡기 전에."
"알겠습니다."
"이 시점에서 언론에서 터지면 끝이야. 너 여지껏 잘해온거 한순간에 무너져. 알지? 너 여태까지랑은 입장 달라."
"알고 있습니다."
"긴 말 안할테니까 빨리 해결해. 궁인들이랑 근위대 입단속 잘 시키고."
"네."
"재신이는 어때. 많이 놀랐을거 아냐."
"지금 왕비마마와 같이 계십니다. 키우시는 새가 다쳐서 많이 놀라셨는데 왕실 수의사 호출했습니다."
"일 끝나면 바로 재신이한테 가봐. 길어지면 문자라도 보내고."
시경은 목례를 해보이고 돌아섰다. 은시경. 집무실을 나서려는 찰나 재하가 시경을 불러세웠다. …재신이 혼자 들어갔으면 진짜 큰일날 뻔 했어. 고맙다. 시경은 짧게 다시 한 번 고개를 숙였다. 복도를 걷는 시경의 걸음이 빨랐다. 재하의 말은 틀린게 없었다. 언론에 나가면 근위대의 능력과 기강에 질타가 가해질 것이었고 시경에 대해서도 좋은 말이 나올리 없었다. 더구나 지금 그는 부마로서의 능력과 자격을 한참 시험받는 입장이었다. 언론은 알 권리라는 미명 하에 연일 예비부마의 과거며 육사시절, 임관한 뒤의 일들, 심지어 규태의 비서실장으로서의 일생까지 전부 샅샅이 뒤져 방송하느라 바빴다. 이런 타이밍에 왕실 경비가 이렇게 허술하게 뚫린 것이 드러나면 온 언론이 시경을 물어뜯을 것이 뻔했다. 자신이 개인적으로 욕을 먹는 것은 상관없지만 더이상 개인일 수 없는 입장이었다. 부마로서의 자격이 논해지고, 과거의 공적까지 깎아내려지고, 재하와 재신도 입장이 곤란해진다. 시경은 입술을 꼭 깨물었다.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이상했다. 어떻게 내실까지 저렇게 들어올 수 있었지. 평소라면 재신은 그 시간에 내실에 있었다. 오늘같이 밤에 자리를 비우는 것은 드문 일이었다. 그리고… 보안카메라. 노후되어서 그렇다고 넘길 일이 아니었다. 시경이 취조실 문을 열어제끼자 남자들을 다그치고 있던 동하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가서 보고 올리겠습니다. 취조실 밖으로 나오는 동하의 표정이 복잡했다.
"어떻게 된거야."
"일이 좀… 커질 것 같습니다."
"그게 무슨 말이야."
"내부에 관련인이 있습니다."
동하의 말에 시경의 눈썹이 지켜올라갔다. 김 소위가 가져온 진술서를 파르륵 넘기는 시경의 얼굴이 굳었다. 근위대에 동조자가 있다니, 이게 무슨. 남자들은 동거하는 술집 접대부가 있었고, 이 접대부의 손님 중 근위대원이 있었던 모양이었다. 근위대원은 이 여자에게 빠진 나머지 여자에게 잘보이고 싶어 왕실의 이야기를 떠벌렸고 여자는 근위대원에게서 빼낸 정보를 바탕으로 남자들과 절도를 계획한 것이었다.
"근위대원이 끝이 아닙니다."
"…뭐?"
"남자들 중 하나가 공주궁 궁인 한 명에게 의도적으로 접근했습니다. 오늘 공주님이 출타하신 것도 그 궁인이 말해줬다고 합니다. 그리고 공주궁 복도 보안카메라도…"
"관련자들 싹 다 잡아와. 지금 당장."
시경의 명령에 동하가 무전기를 든다. 사안이 중대한만큼 근위대원들은 신속하게 움직였다. 유리창 안으로 남자들을 차갑게 노려보던 시경은 휴대폰을 꺼냈다.
-은시경씨.
"공주님. 괜찮으세요?"
-으응, 괜찮아요. 걱정 마요. 하니도 깨어났어요. 던져져서 충격에 기절한거라구… 며칠 동물병원에 입원시키기로 했어요. 나 언니랑 같이 있을게요.
"…죄송합니다, 공주님."
-은시경씨가 왜 죄송해요.
"신궁 경비는 제 책임입니다. 제가 부족했습니다."
-그런 생각 말아요. 자책은 나중에 해도 되니까, 우선은 일부터 먼저 해결해요.
"그리고… 공주궁 궁인 중 내통자가 있습니다."
-뭐… 라고요?
"박진희씨가 관련되어 있습니다. 지금 근위대가 연행하러 갔습니다. 곧 조사에 들어갈겁니다."
휴대폰 너머의 재신은 충격을 받은 듯 말이 없었다. 공주궁 궁인들은 모두 재신의 소관이었다. 재신이 걱정되어 전화를 건 것도 있었지만 재신의 아래에 있는 궁인을 체포해야하니 재신에게 보고를 해야 했다. 재신은 궁인들과 친하게 지냈다. 그런 자신의 아랫사람들 중 관련자가 있다는 것은 보통 충격이 아닐 것이었다. 재신에게 보고를 올리는 시경도 마음이 편치 않았다. 가뜩이나 놀랐을 재신에게 전해야 하는 말의 내용이 또 잔인했다. 한동안 말이 없던 재신의 목소리가 떨려 나왔다.
-알겠어요. 데려오면 나한테 다시 연락 주세요.
"…공주님."
-내 사람이에요. 내가 만나보게 해주세요.
재신의 말에 시경은 한숨을 짧게 내쉬었다. 알겠습니다. 전화를 끊은 시경이 서 중사에게 짧게 전화를 걸었다. 한시간 뒤에 공주님 모시고 취조실로 와. 연행되어 온 근위대원은 얼굴이 하얗게 질렸고 궁인은 공포에 질려 이미 울음을 터뜨린 상태였다. 의자에 앉혀진 근위대원을 보고 성큼성큼 취조실 안으로 걸어 들어간 시경이 그대로 의자를 발로 차자 큰 소리를 내며 근위대원은 그대로 바닥에 나동그라졌다. 시경은 폭력을 쓰는 사람이 아니었고 감정이 격한 사람도 아니었다. 군대내 폭력 금지조항 때문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폭력을 쓰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끌려온 근위대원을 보는 순간 시경은 끓어오르는 분노를 참을 수가 없었다. 그는 들어온지 얼마 안된 사람도 아니었다. 시경이 언더커버로 간지 얼마 안 되어 들어온 부사관이었기에 이미 몇년을 궁에 있었다. 그런데, 그런데.
"너 이새끼, 니가 지금 제정신이야? 왕실이 우스워?! 근위대가 술집 여자한테 혼이 팔려 왕실의 정보를 떠벌려?!"
멱살을 잡아 일으키는 시경을 뒤에서 김 소위가 급하게 붙들어 말렸다. 대대장님! 대대장님! 시경은 이를 악물었다. 그 여자가 계획한게 절도 따위가 아니었다면. 그 여자가 그 정보를 다른데 팔았다면. 노린게 재신의 귀금속같은게 아니라 목숨이었다면. 생각만 해도 아찔했다. 시경의 눈 앞이 붉게 변했다 하얗게 질렸다를 반복했다. 다른 근위대원이 내민 물병을 잡아채 들이키며 시경은 냉정해지려 애썼다. 의자를 끌어와 앉아 시경은 두 사람을 취조하기 시작했다. 다행이 그 이상 정보가 많이 새나가진 않은 듯 했다. 똑똑. 노크 소리가 들리고 서 중사가 들어와 경례를 붙였다.
"공주님 오셨습니다."
공주가 왔단 말에 궁인의 어깨가 흠칫 떨렸다. 문이 열리고 약간 굳은 얼굴의 재신이 취조실 안으로 들어섰다. 차가운 벽과 파르라니 빛나는 조명. 공주와는 어울리지 않는 공간이었다. 시경이 일어서서 의자를 내어주자 어깨에 가디건을 걸친 채 조심스럽게 들어온 재신이 궁인과 근위대원의 앞에 앉았다.
"공주님… 잘못했어요, 공주님. 잘못했어요."
"진희씨."
왜 그랬어요. 담담한 재신의 목소리에 서운함이 담겨 있다. 내가 말했잖아요. 진희씨는 곧잘 질나쁜 남자한테 걸려드니까 남자친구 생기면 나한테 꼭 말하라고. 고개를 푹 숙인 궁인이 후회의 눈물을 뚝뚝 흘렸다. 흘러내리는 가디건을 추스리며 재신이 아득하게 한숨을 쉬었다.
"이건 큰 일이에요. 그리고 나는 진희씨를 도와줄 수 없어요. 처벌을 받도록 하세요."
최소한 미워하지 않도록 노력은 해볼테니. 눈을 내리깐 재신이 흘끔, 근위대원을 보았다. 재신은 그를 알고 있었다. 직계경호 담당은 아니었지만 가끔 인원이 많이 필요하면 지원을 오던 대원이었다. 이지석 중사였나요. 공주의 부름에 근위대원이 퍼뜩 고개를 들었다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다시 책상을 보았다.
"왜 그런 어리석은 행동을 했나요."
"죄송…합니다."
"왕실이 근위대원에게 그 정도의 충성심과 자부심도 주지 못했나요."
…이런 일이 어떻게 처리되는지도 잘 모르고 군법도 모르는 내가 말하는 것도 주제넘네요. 그래도 도둑맞은게 내 방이니 그냥 공주가 간섭 한 번 하러 왔다고 생각하세요. 금방 자리에서 일어나는 재신의 목소리가 메마르고 차가웠다. 갈게요. 고생들이 많아요. 취조실을 나서는 뒷모습이 떨리는 것 같아 시경은 재신을 부르려다 입을 다물었다. 서 중사가 급하게 재신의 뒤를 좇았다.
"나 때문에 고생이 많아요."
"아닙니다. 저희 때문에 공주님 내실이 엉망이 되어서 오히려 저희가 죄송합니다."
"그런말 말아요. 근위대 다들 잘 하고 있는거 아니까. 이제 들어가봐요. 할 일 많을텐데."
왕비 내실의 문을 열며 재신이 서 중사에게 웃어보였다. 경례를 붙인 서 중사는 재신이 문을 열고 항아의 내실로 들어가는 뒷모습을 서서 지켜보았다. 후, 공주님한텐 뭐 이리 안 좋은 일이 많이 일어나냐. 한숨이 새어나왔다. 도난도 도난이지만 자신의 궁인이 관여되어 있단 사실에 재신은 크게 상처를 받은 듯 보였다. 서 중사는 몸을 돌려 바쁘게 다시 근위대 건물을 향했다.
일은 신속하게 처리되었다. 두 절도범과 여자, 궁인은 경찰에게 넘겨졌고 근위대원도 헌병대로 넘어갔다. 밤새 사건을 처리하느라 한숨도 자지 못한 시경은 아침이 되자마자 보안카메라를 전부 새걸로 교체할 것을 명했다. 야밤에 일어난 난데없는 큰 사건에 다음날 내내 궁 안의 사람들이 모두 큰 소란을 겪었다. 그나마 미수로 끝난 것이 다행일 정도였다. 재신의 내실은 금방 정리되었다. 드레스룸과 신발장이며 서랍들도 예전처럼 다 정리되었다. 물질적 피해는 찢겨진 옷가지 몇 벌과 구두 몇 켤레, 체인이 끊어진 목걸이 한 개 정도였다. 피해를 보고 받은 시경의 얼굴이 어두웠다. 시경에게는 사사로운 피해가 아니었다. 재신의 소유가 하나라도 상처를 입은 것, 그리고 그 방에서 다시금 재신이 느껴야 할 불안감까지. 시경은 서류를 든 채 빠른 걸음으로 공주궁을 향했다. 열린 내실 문 틈으로 방 한가운데에 서 있는 재신이 보였다. 재신의 손에는 시경이 선물했던 구두가 들려 있었다.
"망가졌어요. 굽도 부러지고. 이제 못 신겠네, 이 구두…"
"공주님이 원하시는걸로 새로 사드릴게요. 너무 마음 쓰지 마세요."
시경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위로였다. 재신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그대로 구두를 신발장에 넣었다. 시경이 재신의 곁으로 걸어가 재신을 뒤에서 끌어안았다. 죄송합니다, 공주님. 제 탓이에요. 제가 근위대 기강을 제대로 관리 못해서. …그렇게 따지면 공주궁 궁인은 내 사람이에요. 내 잘못도 있어. 재신이 허리에 감긴 시경의 손을 만지작거렸다. 어쩔 수 없지, 뭐. 그래도 아예 도둑맞은 것보단 낫잖아요. 현장에서 잡았고. 애써 밝게 말하며 재신이 돌아서서 시경을 마주보았다.
"나… 부탁이 있어요."
"말씀하세요."
"오늘, 내 방에서 자면 안되요?"
"…네?"
"아니, 그러니까, 그런게 아니구. …무서워서 그래요. 조금. 언니랑 같이 잘까 했는데 세자도 있고 언니 힘들잖아. 내가 언니랑 자면 오빠도 불편하구. 엄마두… 요새 가뜩이나 잠 얕아져서 힘든데. 여기서 자긴 해야겠는데, 좀…"
"알겠습니다. 전하께 말씀드리고 그렇게 하겠습니다."
시경의 대답에 재신의 얼굴이 환해진다. …뭐? 이게 이제 막나가려고. 야, 너 아직 결혼 안했거든. 눈을 확 치켜뜨고 성질을 내면서도 재하는 알았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손만 잡고 자라, 손만. 아니 손도 잡지마. 손만 잡고 잔단 놈 치고 그러는 놈 없어. 넌 옆에서 앉아서 자. 그냥 자지 말고 넌 서서 재신이 지켜! 근위대장이 빠져가지고.
"편하게 자요. 어제도 한숨도 못 잤을거 아냐. 오늘도 바빴고."
"아닙니다. 제가 어떻게 공주님 침대에서."
"왜이래, 반년 뒤면 평생 한 베개에 누울 사람이."
"그래도 아직 결혼 전이고 궁 안입니다."
고집 있는 얼굴로 시경이 재신의 침대 머리맡으로 의자를 끌고 왔다. 침대에 기대어 앉은 재신이 기가 막히단 눈으로 시경을 쳐다보았다. 그래서, 진짜 앉아서 자겠다고? 이렇게 불편할거면 그냥 관사 가서 자요. 나 혼자 잘게. 제가 안심이 안됩니다. 자켓을 벗어 의자에 걸친 시경이 그대로 자리에 앉았다.
"옷이라도 좀 편하게 하든가… 넥타이라도 풀어요."
"아닙니다."
"왜, 내가 덮칠까봐?"
"아니요. 제가 덮칠까봐요."
전혀 농담이 아니라는 듯 진지한 얼굴로 대답하는 시경에 재신이 결국 졌다는 듯 자리에 누웠다. 손, 줘요. 손 정도는 줘도 되잖아. 시경 쪽을 향해 누운 재신이 손을 내밀어 같은 반지를 낀 왼손이 얽혀든다. 손가락으로 시경이 낀 반지를 만지작거리며 재신이 푹신한 베개에 얼굴을 묻었다.
"궁에서 살 날도 많이 안남았는데 이런 일이 다 생기네요. 깜짝 놀랐어."
"죄송합니다."
"죄송하단 얘긴 좀 그만 해요. 은시경씨 탓 아니니까. 가뜩이나 오빠한테 대판 깨졌을거 아냐. 은시경씨 있어서 현장에서 잡았잖아요. 나 그냥 혼자 들어갔음 어쩔 뻔했어."
"그렇게 공주님 혼자 들어가시게 절대 안합니다."
"알아요, 그러니까 고맙다구."
"집 구할 때, 좀 더 보안을 철저히 해야겠습니다. 궁에서 가까운 곳으로, 만일을 대비해 지원 오기도 좋게…"
"그런거 말구, 뭐 다른건 없어요? 신혼집 구하는데 꼭 그렇게 딱딱한 얘기만."
자못 심각하게 이야기하는 시경의 말을 재신이 중간에서 자른다. 다른거요? 다른거, 뭐 예를들어 가구는 어떤 스타일이 좋다든가, 빌라가 좋다든가 단독이 좋다든가 그런거. 방은 몇 개 있어야겠다, 뭐 그런 생각 해본적 없어요? 재신의 질문 공세에 시경이 당황한 얼굴로 더듬더듬 대답했다. 전 그런건 잘… 공주님이 좋으신 대로… 뭐래, 나 혼자 사는 집이에요? 결혼해서도 평생 나 상전 모시고 살듯 살거야? 우리 결혼하는거거든요. 은시경씨가 남편, 내가 아내. 민주주의 국가의 평등한 부부관계. 몰라요? 나도 유학시절 말곤 계속 궁에서 살아서 바깥의 집들이 어떤 식인지 잘 모른단 말이에요. 입술을 비죽이는 재신을 보며 시경이 슬그머니 웃었다.
"같이 봐요, 집."
"같이 봐야지 그럼 따로 보려구? 나 은시경씨 다 끌고 다닐거에요. 집이랑, 가구랑, 식기, 옷, 전부 다."
"네, 공주님."
"나중에 결혼하기 싫다 이래도 소용 없어요."
"그럴리가요."
손을 꼭 쥔 채 두 사람은 결혼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정확히는 재신이 말하고 시경은 고개를 끄덕이거나 긍정을 표하는 것이 전부였지만. 태어난 때부터 계속 궁에서 클래식한 인테리어로 살아서 결혼하면 집은 다르게 꾸미고 싶어요. 궁도 좋긴 한데… 가끔은 좀 올드하지 않나 그런 느낌도 들고. 은시경씨는 원목이 좋아요, 아니면 페인트칠 해서 모던한게 좋아요? 요샌 스칸디나비아식이 유행이래. …잘 모르겠는데요. 어우, 아는게 뭐야 진짜. 전 계속 기숙사나 관사에서 살아서. 나 드레스는 국내 디자이너걸로 입을려구. 의상팀 통해서 해외 디자이너 옷도 협찬 계속 들어오는거 같은데 그럴 필요 없을거 같아. 대한민국 공주고. 뭘 입어도 예쁘실거에요. 웨딩드레스랑, 피로연용 이브닝 드레스랑, 한복… 은시경씨 치수는 쟀어요? 부마도위 정복 어떻게 한대요? 궁중실장님이 아직 디자인이 안 나왔다던데요. 디자인 먼저 결정하고 그 다음에 치수 잰다고. 아, 기대된다. 은시경씨 정복도 멋있을거야. 예법 교육은 어때요? 완전 지겹지. 아니요, 재밌습니다. 재밌을리가 없어 그게. 난 진짜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서. 근데 나도 다음달부터 또 받으라는거 있죠. 결혼하면 뭐가 또 다르대. 뭐가 또 그렇게 다른거야. 잘하시잖아요, 공주님. 그러니까요. 지금도 잘하는데. 사진도 찍어야 하는데. 바쁘네, 바빠. 실장님 양복도 맞춰드려야죠. 겨울 되기 전에 은시경씨가 좀 같이 가서 맞춰요. 의상팀이랑 같이. …제가요? 그럼 은시경씨 말고 누가 실장님 아들인데? 사가는 궁 근처로 구하는 쪽으로 얘기하던데 오빠가. 얘기 들었어요? 네. 아무래도 공주님 일도 많으시고 대비마마나 왕비마마도 공주님이 근처에 계시는 편이 좋으니… 오빠는 뭐 아예 집을 짓겠다던데 굳이 그럴 필요가 있나. 적당한 집이 있으면 리모델링하는 편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소근소근 이야기하던 재신의 말소리가 잦아들더니 어느새 잠이 들었다. 시경은 재신의 잠든 얼굴을 다정하게 바라보았다. 정말로 재신과의 결혼이 성큼 다가온 것이 실감이 났다. 궁은 특별한 공간이다. 신궁의 문을 통과해 출근하는 순간 바깥과는 다른 풍경이 펼쳐지고 다른 사람들이 움직인다. 그 안 깊숙히 존재하는 공주궁 안의 공주. 시경에게는 정말 동화 속의 공주님이나 다름이 없었던 그녀가 어느새 성큼 그의 곁으로 다가왔다. 그의 옆자리로, 그의 일상으로. 시경은 그의 손을 꼭 쥐고 잠든 재신의 손가락에서 반짝이는 약혼반지를 엄지손가락으로 쓸어내렸다. 별. 품으로 쏟아져내린, 나의 별.
창으로 어제는 흐려서 보이지 않던 달빛이 앉은 채로 눈을 감고 있는 시경의 옆모습을 비추었다.
잠든 시경은 재신이 보지 못하는 것이 아쉬울 정도로 근사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얘들 봐라."
새벽 이른 시간부터 궁인들의 말림에도 불구하고 공주궁으로 들이닥친 재하가 한숨을 팍 쉬었다. 그렇다고 진짜 앉아서 자냐, 답답한 놈 같으니라고. 혹시 이 놈이 정말, 하는 마음 반 놀려주려는 마음 반 유치하게 들이닥친 보람도 없이 둘은 손만 꼭 잡은 채 잠들어 있었다. 옆으로 누워 엎드린 채 자고 있는 재신도, 자켓만 벗고 넥타이도 안 푼 채로 의자에 앉아 반듯하게 잠든 시경도 참 두사람다운 얼굴로 평안해보였다. 하여간에 진짜. 휴대폰을 꺼낸 재하가 피식 웃으며 찰칵, 소리내어 두 사람을 사진에 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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떡볶이 사러간 두 사람, 보안카메라 사각에서 키스하는 두 사람, 공주 내실 도둑 들어온 상황, 부하 멱살잡는 시경, 앵무새 다쳤다며 혼이 나간 공주님, 손만 잡고 잠든 두 사람, 나눠서 쓰려고 했던게 쓰다보니 그냥 죽 이어져버렸다. 덕분에 오늘도 스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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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무새는 대세의 흐름을 따라 하니. 이름 짓는게 제일 어렵다. 사람이든 동물이든. 내가 제일 힘들어하는거: 1. 이름짓기 2. 제목짓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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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 함께하는 일상으로 어쨌든 오늘도 한발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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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은 참 금방 가네요. 벌써 3주째라니. 또 태풍이 왔는데 그래도 한 주, 즐겁게 시작하시길 :)
전 한 주를 시작해야 하는데 이시간에 자는게 유머..ㅋㅋ..ㅋㅋ큐ㅠㅠㅠㅠㅠㅠㅠ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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