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은, 잠시 쉬어가는.
87.
"야, 오랜만이다."
"잘 지냈냐? 그동안 못 나와서 미안하다."
"궁에 들어가고 비싼몸 되어서 한 번 얼굴을 안 비추더니 오늘은 웬일이냐?"
"휴가다 휴가."
서 중사는 자신을 반기는 친구들과 장난스레 투닥거리며 빈 자리에 앉았다. 인생에서 절대 잊을 수 없을 폭풍같은 몇 일이 지나간 후 공주의 전담호위 세 사람은 휴가를 받았다. 공식 일정도 거의 없고 하니까 이 때 푹 쉬어요. 다들 고생했잖아요. 꽃같이 웃는 공주님 덕분에 서 중사는 금일봉까지 받고 입대 후 가장 긴 휴가를 얻은 것이었다.
모두가 무사히 돌아온 후에도 궁은 한참 어수선했다. 궁 내의 모든 사람이 사건 함구에 대해 철저히 재교육을 받았고, 재하는 쉴 틈도 없이 언론을 정리하고 물 밑으로 외교 문제를 해결하느라 바빴다. 시경이 급하게 가져온 자료에는 클럽M과 재하가 회담을 가졌던 상대 국가 간의 돈거래와 밀약에 관한 정보가 들어 있었다. 분쟁지역에 인접한 상대 국가는 한참 반군, 군부세력간의 분쟁이며 국경선에서의 크고 작은 싸움으로 무기와 군수비 확보 문제가 시급한 모양이었다. …어쩐지 비협조적이더라니. 소식을 들은 재신이 휠체어에 앉아 혀를 찼다.
홀로 극도의 압박과 스트레스 속에서 싸워온 공주는 돌아온 뒤 긴장이 풀려 시경이나 항아가 곁에 없으면 불안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고 잠도 잘 자지 못했다. 왕실 주치의는 절대적인 안정과 휴식이 중요하다는 당연한 대답을 했고, 재신은 과로로 쓰러졌다는 핑계를 대고 모든 일정을 취소하고 궁 안에서 시간을 보냈다. 식사하고 재활하는 시간 외에는 재신은 거의 죽은듯이 자거나 내실에서 음악을 들었다. 가장 바쁜 사람은 시경이었다. 시경은 재하를 도와 사건의 뒷수습을 했고, 자신의 후임 대대장도 물색했다. 시경이 전역한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근위대 전체가 술렁였다. 부마가 될 시경이 조만간 근위대에서 물러날거라고는 다들 예상했지만 그 시기가 생각보다 일렀고 이렇게 갑작스럽게 찾아올 줄은 몰랐던 터였다. 모든 것을 다 제하고 나서라도 시경은 훌륭한 군인이었고 모범적인 상관이었다. 근위대 본연의 임무인 경호에 대해서도 항상 완벽했다. 그런 시경이 갑자기 빠진다는 것은 근위대원들에게는 충격이었다.
「이렇게 말씀도 안하시고 갑자기 이러시깁니까?」
「뭘, 군대에서 사람 들어오고 나가는게 뭐 대수라고. 어디 가는 것도 아니고 궁에 계속 있을건데.」
「대대장 바뀌는게 왜 대수가 아닙니까? 아 진짜 섭섭하게.」
유일하게 시경에게 툭툭 반항하는게 가능한 동하가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섭섭함을 비추자 시경이 눈썹을 찡그리며 씩 웃어보였다. 시경이라고 섭섭하지 않을리 없었다. 근위대가 할 일이라고는 상상도 못했던 일들을 겪으며 최전방에 있던 시절보다도 더 정이 든 부하들이었다. 밥을 사십쇼. 밥이 뭡니까, 술. 술. 술이다. 양주로 하시죠. 대대 전체에 쏘시는겁니다. 이구동성으로 소리치는 근위대원들에 결국 시경이 애꿎은 동하의 머리만 때렸다. 이 자식이 진짜 애들 바람만 들여놔서. …어? 소령씩이나 달고 구국의 영웅이 이렇게 막 부하를 때리셔도 되는겁니까? 계급장도 뗄거 이제 영창도 안가니 제대로 맞아볼래? 이거 왜 이러십니까, 공주님한테 이를겁니다! 오랜만에 근위대 대기실에서 가벼운 웃음소리가 났다.
재신의 몸이 어느정도 회복되자 시경은 전역 지원서를 냈고 예편은 무리없이 진행되었다. 어차피 어떻게 해도 회전문 소리 들을거, 빨리빨리 처리하자며 재하는 시경의 사표, 규태의 사표, 시경의 비서실 발령까지 다 한꺼번에 해치워버리려 했지만 시경은 결혼 준비도 해야 하고 공주님 간병도 해야하니 좀 쉬겠다는 의사를 알렸다. …뭐, 그래. 어쩐지 별 말없이 수락한다 했더니 뒤끝 쩌는 국왕은 어디 가지 않았다.
「쉬려면 푹 쉬어야지. 아주 푹. 」
재하가 시경의 출입증을 가져가버린 탓에 시경은 궁에 출입할 수 없는 상태가 된 것이었다. 물론 아직 발령이 안 났으니 출입증이 없는건 굳이 따지자면 이상한 것은 아니었으나 누가 봐도 의도가 명백했다. 이미 궁 안에선 귀국하기 전 호텔에서 국왕이 공주와 예비부마가 한 침대에 있는 모습을 보고 난리난리를 했다는 소문이 파다하게 퍼진 뒤라 궁인들이며 근위대, 비서들조차 국왕의 유치찬란한 복수에 놀라지도 않았다. 심지어 당사자인 이재신 공주조차.
「맘대로 하라고 해, 그래봤자 자기만 피곤하지 뭐.」
어쨌든 시경이 없으면 가장 고생스러운 것은 재하니 재신의 말은 틀림이 없었다. 일도 없고 입궁도 못하는 시경 덕분에 재신은 오히려 더 태연하게 근위대까지 대동하고 궁 밖에서 시경을 만나 이불을 고른다, 접시를 산다, 사가 벽지를 고르네 시경의 서재에 들어갈 책꽂이를 맞추네 예비 신부의 날들을 즐겼고 재하는 궁 안에서 시경이 없는 답답함에 머리만 쥐어 뜯고 있었으니.
다음주가 넘어가면 스케줄 다시 많으니 지금 쉬어요, 재신이 한 명 한 명 손에 꼭 쥐어준 금일봉을 들고 서 중사는 어깨 펴고 당당히 집으로 돌아왔다. 시경의 순직 후 곤두박질했던 근위대 지원률은 시경의 복귀, 이재신 공주와의 로맨스 이후 치솟기 시작해 요즘은 인지도며 이미지면에서 근위대만큼 좋은 직업도 없었다. 인생 참 알 수 없었다. 번듯한데 취직 못해 부사관 지원한다며 은근히 무시받던 것이 엊그제같은데 간만에 모인 친구들과의 모임에서도 주연은 서 중사였다.
"야, 공주님 진짜 그렇게 이쁘냐?"
"쩔어. 화면은 진짜 공주님의 미모를 1%도 못 보여준다. 얼굴이 진짜 요만한데 완전 입체적이야. 한 번 웃어주시면 진짜…"
"넌 그럼 공주님 맨날 보냐?"
"거의 매일 보지. 전담 호위니까."
"은시경도?"
"넌 뭔데 은시경은시경 하냐? 곧 부마되실 대대장님한테."
전담 호위들 중 가장 막내라 해도 친구들이 눈을 반짝이며 물으면 괜시리 어깨도 좀 펴지고 허세도 떨게 되는 것이 사람 심리였다. 한참 맥주잔을 부딪히며 서 중사의 공주님 이야기가 무르익을 무렵 분위기에 찬물이 확 끼얹어졌다.
"너 그래봤자 그냥 부사관 아니야? 그런 사람 적은 특수 부대에서 부사관 하는거야 장교들 뒤치닥거리라며. 뭐 중요한 일 한다고 되게 아는 척 하네."
새침하게 눈을 뜬 채 서 중사의 기를 확 꺾은 이는 동창 중 한 명이었다. 좀 더 구체적으로는, 서 중사의 옛 여자친구였다. 대학교 때 사귀었던 여자친구는 서 중사가 그다지 학점도 좋지 않고 방황하자 냅다 서 중사를 차고 다른 남자에게 갔다. 불편하지 않다면 거짓말이었지만 동창에다가 친구들이 다 겹치니 서 중사도 불편함을 참고 같이 자리에 앉아 있던 터였다. 서 중사는 그녀의 새 남자친구가 육사를 졸업한 소위라는 것을 얼핏 들어서 알고 있었다. 사관학교 졸업하고 임관하는 장교와 부대에서 구른 부사관들 간의 미묘한 기류는 건드리지 않는 편이 좋다. 근위대에 들어온 후 분위기가 좋아 잊고 있던 것이었는데 이렇게 노골적으로 확 심기를 건드리니 서 중사의 표정도 좋지 않았다. 서 중사가 입을 다물자 그녀의 입가에 묘한 승리의 미소가 떠올랐고 날을 세운 옛 연인들 사이에서 동창들은 안절부절 못하고 있었다.
"어? 서은규."
"응? 어? 대대장님, 충성!"
"충성. 조용히 해. 대대장 아니라니까 이제. …아, 휴가였지 너."
"예 그렇습니다!"
"조용히 하라니까."
어깨를 툭 치는 손길에 뒤를 돌아본 서 중사의 눈이 커졌다. 사복 차림으로 서 중사를 내려다보고 있는 사람은 다름 아닌 시경이었다.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 서 중사의 경례를 가볍게 받으며 한 손에 물잔을 든 시경이 서 중사의 친구들을 한 번 둘러보았다. 난데없이 등장한 시경에 서 중사의 친구들도 모두 얼어붙어 눈만 커져 있었다.
"대대장님은 여기 어쩐 일로…"
"아."
시경이 눈짓으로 한 쪽 귀퉁이의 테이블을 가리키자 시경의 시선을 따라간 서 중사의 눈이 더 커다래졌다. …공주님? 재신이 테이블에서 환하게 웃으며 맥주잔을 들고 있었다. 재신과 함께 있는 사람들은 서 중사도 몇 번이나 봐서 얼굴을 알고 있는 재신의 밴드 멤버들이었다. 공주님이 나오고 싶다고 하셔서. 그제야 문 쪽을 쳐다보니 열린 문 틈으로 익숙한 의전 차량도 눈에 띈다. 소란 피우지 마. 잘 놀고. 간다. 서 중사의 어깨를 툭툭 친 시경이 다시 발걸음을 옮기려는 찰나, 테이블에 앉아 있던 재신의 고개가 이쪽을 향했다.
"어?"
종종걸음으로 달려온 재신이 시경의 팔짱을 꼭 끼며 서 중사를 쳐다보았다.
"여기서 보네요! 휴가 잘 보내고 있어요?"
"아, 예. 공주님 덕분에 잘 쉬고 있습니다."
"언제 복귀더라? 모레였나?"
"토요일입니다."
"아, 맞다맞다. 궁에만 있었더니 시간 가는걸 잘 모르겠네. 푹 쉬고 재밌게 놀다 들어와요. 다음주부터는 또 바빠질테니까. …친구분들이에요?"
"예. 대학교 동창들입니다."
예비부마에 이어 공주까지 등장한 상황에서 서 중사의 전 여자친구를 비롯한 동창들은 포스에 눌려 눈만 껌뻑거리고 있었다. 어찌나 조용히 있었는지 방금 전까지는 공주가 한 공간에 있다는 것조차 눈치채지 못했는데 가디건에 스키니진의 가벼운 차림에도 불구하고 바로 눈 앞에서 보는 공주는 예쁘고 다정하면서도 범접할 수 없는 분위기가 있었다.
"오랜만에 보는걸텐데 서 중사한테 술 사달라고 해요. 내가 보너스 줘서 서 중사 요즘 돈 많을걸요."
친구들에게 농담을 던지며 재신이 까르르 웃었다. 나 곧 갈거니까 신경쓰지 말아요. 재밌게 놀구요. 손을 살랑살랑 흔들어보인 재신이 시경을 이끌어 자신의 테이블 쪽으로 사라졌다. 멀찍이 공주가 다시 자리에 앉은 것을 본 후에야 후, 하고 숨이 터져나왔다. 모두의 시선이 서 중사를 향했다. 야, 너 진짜 공주님이랑 친한거였어? 난 얘가 존나 허세떠는건줄 알았어. …전담호위라니까 왜 사람 말을 못 믿어. 너 그럼 공주님 전화번호도 알아? 호위인데 일단 알기야 알지. 내가 걸 일이야 없지만. 공주님이 보너스도 주냐? 어, 뭐 이번에 주셨다. 명절에 챙겨 주시고. 쏟아지는 질문공세에 일일이 대답하며 서 중사는 맞은편에 앉아 있는 옛 여자친구를 슬쩍 쳐다보았다. 형용할 수 없는 표정의 전 여자친구를 보니 묘하게 기분이 통쾌했다.
두시간 뒤 기분 좋게 취한 서 중사가 의기양양하게 계산을 위해 카운터에 섰을 때, 사장이 내민 것은 카드 영수증이었다. 부마님이 계산하고 갔어요. …쩔어. 모두의 입이 딱 벌어졌다. 마지막까지 근위대원 기를 팍팍 살려주는 공주와 예비부마였다.
88.
"아, 기분 좋다."
밴드 멤버들과 헤어지고 시경과 밤거리를 걷던 재신이 팔을 쭉 뻗어 기지개를 켰다. 제법 쌀쌀해진 밤공기에 재신이 감기가 들지 않도록 시경은 자켓을 벗어 재신의 어깨에 걸쳐주었다.
"엄청 오랜만에 나온거 같아요, 밖에."
"그러게요."
"오늘은 별똥별 안 떨어지려나."
"확인해봤는데 오늘은 없었습니다."
"우와, 미리 본거에요?"
"공주님이 좋아하시니까요."
아, 나 이 왕족킬러한테 자꾸 이렇게 빠지면 안되는데. 그렇게 말하면서도 재신은 팔짱낀 팔을 당겨 시경에게 꼭 붙어서 걸었다. 팔과 팔이 맞닿자 체온으로 온 몸이 따뜻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어디까지 걸을거에요? 공주님 다리 아프시기 전까지요. 그럼 궁까지 걸어갈래. 그건 안됩니다. 아우, 정말. 맨날 안된대. 된다고 말하는 날은 언제야 대체. 공주님이 될만한걸 말씀하시는 날이요. 한마디도 안 져, 하여간에. 가끔 작은 오빠가 짜증내는 이유를 알 것 같다니까. 고운 입술을 삐죽거리며 재신은 달빛이 스며드는 은행나무길을 천천히 걸었다. 가로등이 노랗게 물든 은행잎을 비추고 재신의 플랫슈즈가 하나 둘 쌓이기 시작한 낙엽을 사각사각 밟았다.
"여유로와서 좋아요. 다시… 모든게 제자리로 돌아온거 같아."
"제자리에서 다시 걸어갈겁니다. 평화롭게."
"그랬으면 좋겠어요. 이젠 위험한 일도 싫고, 힘든 일도 싫어. 어릴땐 나에게 덧씌워지는 공주 이미지가 싫었는데 지금은 그냥 차라리 동화 속 공주처럼 사는게 나을거 같단 생각도 들어요. 이래서 사람이 안 겪어보면 모르나봐."
"동화 속 공주처럼 사시면, 괴물한테 잡혀서 탑에 갇히시는데요?"
"그럼 뭐 어딘가에서 기사님이 나타나 구해주겠지."
그냥 탑에서 기사님 기다릴래. 바람에 흩날리는 머리카락을 쓸어넘기며 재신이 장난스레 웃자 시경이 재신의 눈을 마주하며 미소지었다. 기사가 좀 느려서 한참을 기다리셔야 할텐데요. 모르는구나? 내가 제일 잘하는게 기다리는 건데. 재신이 허리를 숙여 곱게 노란색으로 물든 은행잎을 하나 주워들었다. 빙그르르, 은행잎이 재신의 손에서 나비 날개처럼 팔랑였다. 가로등에 은행잎을 비추어보는 재신의 옆모습이 달빛을 받아 반짝였다. 다시 바람이 불며 나뭇가지에서 팔랑팔랑 바람을 견디지 못한 잎들이 재신과 시경의 머리 위로 떨어지고, 구름이 환하게 뜬 보름달을 가린 순간 시경이 재신의 몸을 돌려 그대로 품에 안았다.
"기다리시게 하는 일, 이제 없을거에요."
"기다리지도 않을거야. 이번처럼 찾으러 갈거에요."
노란, 따스한 가로등의 불빛이 두 사람을 비추고 있었다. 바람이 낙옆을 훑고 지나가는 가을밤의 거리에서 두 사람은 오래도록 입을 맞추었다.
_
원래는 예비부부의 알콩달콩 결혼 준비하는 이야기를 쓰려 했는데 어쩌다보니 다음편으로.
가을밤, 은은하고 따뜻하게. 오늘 보니 단풍이 참 좋더군요.
_
제목에 충실한 내용으로 돌아왔다!
_
현재 상태.
은시경 (33, 무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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