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도 더운데 은신이나 재우자는 욕망의 은신러…
은시경과 이재신의 두번째 밤.
24. 서 중사는 모르는 이야기 6: 은시경이 돌아온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안녕히 주무세요, 공주님."
깍듯하게 인사를 하고 내실을 나가는 시경의 등 뒤로 문이 닫히자 재신은 뾰루퉁하게 뺨을 부풀리고는 베개를 끌어 안았다. 뭐야, 오늘도 그냥 가는거야? 푹신하고 큰 베개에 턱을 대고 있던 재신의 얼굴이 시무룩해졌다. 오늘도 그냥 간다. 벌써 보름도 훌쩍 넘었다. 시경이 돌아온지. 그리고, …그 밤이 지난지.
시경이 돌아온 날 밤 재신은 거의 제정신이 아니었다. 제주도 별장에서 자신의 방에 서 있던 시경이 죽은 이의 환영이 아니라 살아 있는 사람이란 것을 깨달은 순간 둘은 정신없이 입술을 마주대고 서로의 체온을 찾았다. 재신은 갈급하게 시경을 원했다. 시경이 살아 있다는 증거, 뛰는 심장소리와 자신과 같은 체온을 느끼고자 재신은 몇번이고 몇번이고 시경의 품에 안겨들었다. 공주로서 혹은 여자로서의 자존심도 다 버린 채 시경에게 안겼지만 재신은 후회하지 않았다. 그가 자신의 곁으로 돌아왔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으니.
그 날은 재신의 첫 경험이었다. 하지만 넘쳐 흐르는 감정과 눈물 때문에 재신은 육체적인 쾌감은 인식할 틈조차 없었다. 그저 시경이 자신과 맨살을 맞대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재신은 너무나 벅차올랐다. 자신을 꽉 안아주는 단단한 팔이 있었고 매달릴 수 있는 강한 등이 있었다. 잠깐 잠들었다가 다시 눈을 떴을 때 시경이 여전히 자신의 눈 앞에 있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재신은 비로소 모든 긴장이 풀린 듯 까무룩 긴 잠에 빠져들었다.
그렇게 제주도에서 돌아오고, 시경은 근위대로 복귀했다. 재하의 공식 발표와 시경의 인터뷰, 복귀식, 공식 일정들이 빠르게 지나가고 시경이 돌아온 궁도 일상의 모습을 하나씩 찾아가고 있었다. 모든 것이 다 마음에 들었다. 재신의 얼굴은 평온해졌다. 딱 한가지, 시경이 자신의 방에 머무르지 않는다는 것만 빼고.
그가 돌아온 것이 좋아서 너무 한번에 다 줘버린게 아닌가, 남자들은 진도 다 빼면 잡은 물고기라고 관심 안준다던데. 한숨을 폭 쉬다가도 시경이 그런 사람이 아닌걸 가장 잘 아는 것이 자신이기에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시경의 태도에 달라진 것은 없었다. 그는 여전히 반듯하고 다정했다. 사람들 몰래 손을 잡기도 했고 둘만 있는 후원에서는 제법 대담하게 입을 맞춰오기도 했다. 그런걸 보면 아닌데. 왜. 무릎을 모아 앉은채 발가락을 꼼지락거리던 재신의 생각이 한군데에 멈췄다.
…내가 그날 별로였나?
하긴. 경험도 없는데 절반은 우느라 지나갔고 정신도 하나도 없었고 방법도 모르고 무작정 매달리기만 했으니. 별로였으려나. 재신의 긴 속눈썹이 뺨에 그림자를 드리웠다. 다른 여자… 경험 있을까. 은시경씨. 재신은 무릎을 감싼 팔에 고개를 묻었다. 좀 더 안정되고 뭐 좀 더 알고 그러면 그 때 할걸. 지나고 나서야 괜한 후회가 들었다. 재신은 손을 들어 자신의 가슴 부분을 살짝 만져보았다. 가슴도 별로 큰 편은 아니지. 좀 더 글래머였으면 좋았을텐데. 의식의 흐름을 따라가다 그 날 자신의 가슴을 쥐었던 시경의 손길을 떠올린 재신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몰라 몰라 몰라! 나처럼 말랐는데 이정도면 나쁘지 않지 뭘. 고개를 도리도리 저은 재신이 이불을 들추고 몸을 그 안으로 넣었다. 내일은 지방으로의 1박 2일 일정이니 얼른 눈을 붙여야겠다는 생각과 함께.
결국 제대로 잠을 못 잔 재신은 약간 피곤한 얼굴로 차에 올랐다. 걱정스러운 시경의 눈에 재신은 잠을 좀 설쳤어요, 하고 시선을 피하며 창에 머리를 대었다. 어젯밤 내내 그런 생각을 한 탓에 시경의 눈을 보는 것이 조금 부끄러웠다.
도지사를 만나는 저녁식사를 마지막으로 끝났다. 재하를 대신해 온 탓에 가볍게 술을 마신 재신이 호텔로 돌아왔을 무렵엔 이미 밤늦은 시간이었다. 근위대와 궁인들을 숙소로 돌려보낸 재신이 방문을 열자, 어둠 속의 그림자가 천천히 움직였다.
"꺄악!"
"…공주님."
"으, 은시경씨?"
인기척에 비명을 지른 재신이 전화를 하려 휴대폰을 꼭 쥐자 그림자가 급하게 손을 움직여 방 불을 켰다. 익숙한 모습에 재신이 가슴을 쓸어내리자 시경이 성큼 앞으로 다가왔다. 놀랐어요, 불이라도 켜고 있지. 아직도 쿵쿵 뛰는 심장을 꾹 누르며 재신이 시경의 품에 폭 안겼다.
"놀랐잖아요."
"놀라게 해드릴 생각은 없었습니다. 죄송합니다."
"이리 앉아요."
시경이 일정이 끝난 밤 재신의 방을 찾는 것은 일상과도 같았기에 재신은 크게 신경쓰지 않고 시경에게 자리를 권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조잘조잘 하던 재신은 문득 시간이 열두시를 넘어간 것을 알았다. 보통 시경은 열한시가 넘으면 재신의 방에 더이상 머무르지 않았다. 시계를 흘끔 본 재신이 시경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갈시간 지나지 않았어요?"
"…네?"
"은시경씨, 가는 시간 지났잖아요."
"저, 갈까요?"
되묻는 시경의 표정이 묘하게 부어 있었다. 약간 삐죽이는 입술이 불만을 말하는 것 같아 재신은 까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아니, 가란건 아니구. 은시경씨 내가 맨날 잡아도 그 시간 되면 꼬박꼬박 들어가니까 물어본건데. 달래듯 미소짓는 재신의 얼굴에도 묘하게 굳은 표정을 풀지 못하던 시경이 툭, 내뱉었다.
"저 여기 계속 있을겁니다."
"응, 그래도 되요."
"여기서… 잘거란 뜻입니다."
"응, 그러니까… …으응?"
목덜미까지 벌개진 시경의 말뜻을 알아차린 재신의 얼굴도 새빨개졌다. 그, 그러니까. 그게. 고개를 푹 숙이고 있던 시경이 살며시 재신의 눈치를 보았다. …싫으세요? 두 뺨을 손으로 감싼채 눈만 깜빡깜빡거리던 재신이 벌떡 자리에서 일어섰다. 나, 나 더워서… 좀 씻을게요. 후다닥 실내복을 챙겨들고 욕실로 들어온 재신이 문을 닫자마자 콩콩 다리를 굴렀다. 씻긴 뭘 씻어! 꼭 기다렸다는 듯이! 아우, 내가 미쳐… 발을 동동 구르다 샤워를 마친 재신이 김이 뽀얗게 서린 거울에 자신의 몸을 비춰보았다.
"별로 나쁜 몸매는 아닌데…"
오늘도 별로라고 생각하면 어쩌지. 더운 공기에 발갛게 뺨이 상기된 채로 이리저리 몸을 비춰보던 재신이 속옷을 꺼내입고 실내복을 걸쳤다. 그대로 욕실을 나서려다 …화장, 화장. 급하게 화장 도구를 꺼내 옅게 화장을 한 재신이 조심스럽게 욕실 문을 열었다. 시경은 아까 그 자세 그대로 침대 옆에 앉아 있었다. 어찌나 긴장했는지 뒷모습만으로도 그 긴장감을 느낄 수 있을 정도였다. 문소리가 들렸는지 시경이 고개를 돌려 재신을 바라보았다. 촉촉하게 젖은 머리카락과 뽀얀 목덜미에 눈이 머무른 시경의 얼굴이 다시 확 달아올랐다.
"다 씻으셨어요?"
"으응…"
어, 어떡해. 은시경씨한테도 씻으라고 해야하나. 그런데 옷도 없고… 재신은 난생 처음 느끼는 긴장감에 머리가 팽팽 돌았다. 이건 아직 각오했던 것이 아닌데. 시경도 긴장을 풀지 못하는지 각 잡히게 앉은 시경의 무릎 위 놓인 손이 안절부절 못하고 있었다. 꼼지락거리는 그 손을 보니 갑자기 시경이 귀엽게 느껴져 재신이 웃음을 터뜨렸다.
"뭐에요, 아까 그 패기는 어디 가고 왜 그렇게 긴장했어요?"
"…아닙니다."
"아니긴."
웃고나니 한결 마음이 편해진 재신이 시경에게 가까이 다가가 침대에 앉았다. 물기가 채 마르지 않은 재신의 긴 머리카락 끝이 실내복을 적시고 있었다.
"진짜 여기서 자고 갈 각오로 들어온거에요?"
"…네."
"나 그 날 별로였던거 아니었어요? 난 그래서 맨날 그렇게 칼같이 밤에 내 방에서 나가는줄 알았는데."
"아, 아닙니다!"
갑자기 튀어나온 큰소리에 재신이 몸을 움츠렸다. 불쑥 큰 소리를 낸 시경이 이리저리 눈동자를 데구르르 굴리다가 벌겋게 달아오른 뒷목을 만지작거렸다. 같이 발그스름해진 얼굴을 하고는 깜빡깜빡 시경을 훔쳐보던 재신이 아랫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아니긴 뭐가 아니에요. 궁에 오고 한번도 밤에 오지도 않구선. 맨날 열한시 되면 칼같이 갔으면서. 아닌 남자가 그래? 아무리 내가 처음이고 그래서 서툴어도 그렇지. …그, 그렇다고 내가 막. 기다렸다거나. 그런건 아니에요. 나 그렇게 쉬운 공주 아니야. 솔직하고 거침없는만큼 재신은 거짓말이 서툴다. 혼자 두 뺨을 감쌌다가 고개를 홱 돌렸다가 다양하게 표정이 바뀌는 재신을 보던 시경의 입가에 약하게 꿈틀거렸다. 드륵, 말없이 재신을 바라보고만 있던 시경이 일어나자 의자다리가 바닥에 끌렸다. 조명을 등지고 일어선 시경 때문에 재신의 머리 위로 큰 그림자가 졌다. 왜, 왜, 왜. 왜요. 시경을 올려다보는 재신의 목소리가 잔뜩 긴장했다.
달깍, 시경이 왼손에 찬 손목시계를 풀었다. 협탁 위에 시계를 내려놓은 시경이 이번에는 자켓을 벗어 의자 등받이에 걸쳤다. 시경이 손을 목깃으로 가져가자 스르륵 천이 스치는 소리가 나며 넥타이가 시경의 손으로 풀어져 흘러내렸다. 재신이 마른침을 삼키는 소리가 조용한 방에 유달리 크게 울렸다. 재신은 시경의 동작 하나하나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것이 몹시 부끄러운 일임을 알면서도 눈 앞에서 슬로우모션처럼 움직이는 시경의 모습에 온 감각과 정신을 다 빼앗긴 듯 재신은 멍하니 시경을 올려다보았다. 셔츠 단추를 하나 풀고 소매의 단추까지 푼 시경이 다시 재신을 내려다보았다. 왕족을 내려다보는 것은 불경한 태도다. 누구도 재신을 이렇게 내려다보는 일은 없었다. 불쾌해야 마땅할 일임에도 재신은 아무 생각조차 하지 못한채 역광으로 어둡게 보이는 시경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공주님."
"으응…"
시경이 손을 뻗어 재신의 어깨를 쥐었다. 가냘프고 마른 어깨뼈를 가볍게 만지작거리던 손이 그대로 어깨를 부드럽게 밀어 재신을 침대에 눕혔다. …아. 순식간에 눕혀져 시경에게 팔목을 고정당한 재신이 시경을 쳐다보았다. 시경은 재신이 한 번도 본 적 없는 낯선 눈을 하고 있었다. 아무리 남자 경험이 없는 재신이라도 시경의 눈동자 속에 일렁이는 것이 무엇인지는 알 수 있었다.
"밤늦게까지 공주님 방에 있으면 궁에 공주님에 대해 안좋은 소문이라도 날까 걱정했어요."
"그, 그래도. 그렇게 일찍 갈 것까진 없잖아."
"공주님은 몰라요."
"뭘 몰라, 내가?"
"늦게까지 머무를수록… 점점 주체가 안된단 말입니다."
언제 봐도 알 수 없는 사람이다. 재신은 시경을 보며 그렇게 생각했다. 눕힐 땐 언제고 이제 와선 또 답답한 얼굴을 하고 있다. 아까까지만 해도 내도록 자신의 어디가 시경의 마음에 차지 않았는지 고민했는데 어느새 그 생각은 재신의 머릿속에서 눈 녹듯 사라지고 없었다. 이리와요. 재신이 팔을 뻗어 천천히 시경의 몸을 당겨 옆으로 눕혔다. 그리고 약간은 떨리는 손으로 시경의 옷깃을 쥐었다. 내가, 해줄게요.
"정말, 나 별로인거 아니었어요?"
"무슨 그런 말씀을…"
"나 괜히 걱정했네. 난 그 날 밤에… 내가 별로 은시경씨한테 만족스럽지 않았나 해서… 솔직히 내가 여자로서 좀, 음. 이런 말 하기 자존심상하지만 너무 말랐구, 다리도 다시 걷게된지 얼마 안되서. 가슴이 큰 것도 아니구, 막 테크닉이 좋은 것도 아니…"
"공주님을 감히 어떤 누구와 비교합니까."
서툴게 시경의 셔츠 단추를 풀어내리며 작은 목소리로 변명하듯 말하는 재신을 시경이 단호한 목소리로 잘랐다. 움찔 놀란 재신이 시경을 마주하자 망설임 없이 곧은 눈이 재신을 바라본다.
"공주님은 세상의 어떤 다른 여자와도 비교할 수 없습니다. 다른 여자를 안아본 것도 아니고, 그러고 싶은 마음도 없습니다. 그리고, 공주님…"
공주님이 얼마나 매력적이신지, 얼마나… 아름다운 몸을 하고 계신지. 공주님은 모르실겁니다. 톡, 재신의 손이 마지막 단추를 풀어내자 시경이 다소 급하게 셔츠를 벗어낸다. 으, 은시경씨. 불… 불 환한데… 눈 앞에 바로 드러난 시경의 맨몸에 재신이 꺅, 하고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붉어진 뺨을 한 재신이 살며시 손가락을 열어 시경을 훔쳐보다 시경의 단단하게 근육이 잡힌 몸, 심장 바로 아래의 큰 흉터를 발견하고 눈이 커진다. …아. 총상이다. 그 날도 보았던, 시경을 잃을뻔 했던 그 총상. 재신이 살며시 손을 뻗어 시경의 흉터를 매만졌다. 보지 마세요. 시경이 재신의 손목을 잡아 손을 떼내려 했지만 재신은 오히려 더 가까이 손가락으로 상처부분을 쓸었다.
"…아파요?"
"아니요. 그냥 흉터입니다. 하나도 아프지 않습니다."
"많이 아팠죠, 그 땐."
"아닙니다."
"아니긴 뭐가 아니야… 죽을 뻔 했다면서."
피가 엄청 많이 났다고, 오빠가 은시경씨 죽을까봐 엉엉 울었다고 그랬어요. 흉터를 보는 재신의 눈동자가 일렁였다. 고개를 숙인 재신이 흉터에 입술을 가져다대자 시경이 불에 데인 듯 화들짝 놀랐다. 그러지 마세요, 공주님. 이런 흉한 곳에 공주님… 흉하지 않아요. 재신이 가만히 시경의 넓은 상처 부분을 따라 입술을 옮기며 말했다. 은시경씨 몸에서 흉한 부분, 하나도 없어요. 명치까지 이어진 긴 흉터에 빠짐없이 다 입을 맞추고 나서야 재신은 입술을 떼었다. 내가 걷지 못하고 세상이 두려웠을 때도 은시경씨 나한테 반짝반짝 빛난다고 했잖아요. 나한테도 마찬가지에요. 은시경씨 아팠던 흉터까지 다, 나한테 소중한 은시경씨에요. 옅은 미소를 띤 채 말을 잇는 재신을 보던 시경이 더이상 참을 수 없다는 듯 달려들어 입을 맞추었다. 아랫입술을 강하게 빨아올리다 허락하듯 열린 입술 사이로 혀를 밀어넣은 시경이 끊임없이 재신의 입 안을 탐했다. 고요한 방 안으로 질척하게 혀가 섞이는 소리와 천자락이 스치는 소리만이 울려 퍼졌다. 숨이 모자란 재신이 할딱거릴 때가 되어서야 입술을 놓아준 시경이 재신의 몸 위로 가볍게 올라탔다. 시경의 손이 조심스럽게 재신의 가슴 위, 실내복의 단추께를 향했다.
"제가, 벗겨도 될까요?"
재신이 고개를 끄덕이자 시경은 조심스럽게 재신의 원피스 단추를 하나씩 풀어내렸다. 나비 날개같이 얇고 팔랑이는 재질의 실내복은 단추가 하나씩 풀릴 때마다 사르륵 재신의 흰 속살을 드러냈다. 단추를 모두 풀고 원피스를 끌어내리려 하자 재신이 자신도 모르게 몸을 살짝 들어 시경이 옷을 벗기는 것을 도와주었다. 속옷 차림이 부끄러워 재신이 팔로 가슴을 가리자 시경이 재신의 손목을 가만히 잡았다.
"보고싶은데… 보여주시면 안될까요."
허락을 구하는 시경의 눈이 욕망을 가득 품고 있으면서도 묘하게 경건해 재신은 시경에게 이끌려 팔에 들어간 힘을 풀었다. 시경의 손에 의해 재신의 손이 치워지고 시경은 떨리는 손으로 재신의 몸에서 속옷을 벗겨내었다. 가녀린 목에서 이어지는 쇄골과 어깨는 평소에도 재신이 자주 드러내던 부위였지만 그 아래 옷으로 감싸져 숨겨져있던 희고 매끄러운 피부와 부드러운 가슴, 가슴에서 아름다운 곡선을 이루며 이어지는 가느다란 허리는 여지껏 어떤 남자도 본 적 없던 곳이었다. 황홀한 듯 재신의 몸을 보는 시경의 눈길이 지나치게 정직해 부끄러워진 재신이 두 손을 들어 얼굴을 가렸다.
"너무 그렇게… 보지 말아요."
"공주님은 정말 아름다우십니다."
"부끄럽게 무슨 말을 하는거에요, 진짜."
"공주님도 모르실거에요. 공주님이 얼마나 아름다우신지."
시경의 입술이 재신의 목덜미에 닿았다. 살갗에 와닿는 뜨거운 숨결에 재신의 입에서 한숨이 새어나왔다. 앞으로 자신에게 일어날 일들에 대한 예상이 묘한 긴장과 흥분을 만들어 재신의 몸을 뒤덮었다. 목덜미부터 쇄골을 타고 내려오던 입술이 재신의 가슴 바로 위에서 잠시 멈추었다. 그리고 봉긋하게 올라온 재신의 탄력있는 가슴에 시경이 그대로 얼굴을 묻자 등줄기가 울리는 것 같은 짜릿한 느낌에 재신은 저도 모르게 시경을 꽉 끌어 안았다. 중추신경을 타고 올라오는 낯선 쾌감은 재신만의 것은 아니었는지 재신은 맞닿은 하반신에서 시경이 흥분하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희고 부드러운 가슴에 입술을 대던 시경이 조심스레 가장 봉긋한 부분에 입술을 가져다 대었다. 꽃이라도 대하듯 조심스럽게 혀로 핥고 입술로 빨아들이자 흐읏, 재신의 입술에서 낯선 신음이 새어나왔다. 아, 시, 시경씨… 재신의 허리가 뒤틀리자 재신이 움직이지 못하도록 시경이 팔로 재신의 허리를 단단하게 밀착해 안았다. 아, 아앗… 시경의 품 안에서 재신은 점점 열기가 오르며 몸이 젖는 것이 느껴졌다. 시경에게 모든 것을 보이고 있다는 부끄러움에 품에서 빠져나오려고 몸을 움직여봐도 결과적으로는 시경의 몸에 더 맞닿으면서 흥분만 더해질 뿐이었다. 재신에게 가장 낯선 것은, 부끄러우면서도 점점 더 그 느낌을 원하게 되는 자신이었다.
하아, 공주님. 가까스로 재신의 가슴에서 입술을 뗀 시경의 목소리도 한껏 거칠어져 있었다. 시경이 한 손으로 급하게 벨트와 바지의 버클을 풀었다. 금속이 부딪히는 소리에 재신의 몸이 다시 한껏 긴장했다. 재신의 허벅지 안쪽을 쥔 시경이 살며시 다리를 벌리자 재신은 시경이 원하는대로 자리를 잡을 수 있게 해주었다. 가느다란 발목부터 종아리, 무릎과 허벅지 안쪽을 차례로 매만진 시경이 재신의 다리 안쪽 가장 은밀한 부분에 조심스럽게 손을 대었다. 아… 한겹뿐인 속옷의 얇은 천 너머로 이미 한껏 젖었음을 들킨 재신이 부끄러움에 다시 얼굴을 가린다. 시경이 손가락이 재신의 속옷을 끌어내리고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나체가 된 재신은 시경의 허리에 다리를 감아 시경을 끌어당겼다.
"은시경씨…"
이름을 부르는 한마디일 뿐이었지만 모든 것을 허락한다는 뜻이나 다름이 없는 재신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아프시면, 말씀하세요. 낮은 속삭임과 함께 시경의 몸이 조심스럽게 재신에게 겹쳐졌다. 아, 앗…! 익숙하지 않은 아픔에 한껏 긴장한 재신의 몸이 좀처럼 열리지 않자 시경의 미간도 찡그려졌다. 공주님, 공주님… 시경이 몇번이고 재신의 등을 길게 쓰다듬었다. 그 다정한 손길에 재신의 몸이 서서히 긴장이 풀리자 이윽고 시경은 재신의 안으로 완전히 들어갈 수 있었다. 이제, 다 들어왔어요…? 눈물이 그렁그렁한 재신의 눈이 시경을 올려다보았다. 별이 넘쳐날 듯 일렁이는 그 큰 눈과 붉은 입술을 마주하는 순간, 시경의 눈 안에서 불꽃이 확 일었다.
"죄송합니다, 공주님."
뭐가 또 죄송… 하읏, 안으로 격하게 들이치는 움직임에 재신의 허리가 확 뒤로 꺾였다. 한 번도 본 적 없던 난폭한 시경이 재신의 위에서 움직였다. 재신의 허리를 한 손으로 꽉 붙든채 거칠게 재신의 몸을 탐하는 시경에 재신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아, 앗, 시경씨, 시경씨…! 토막토막 끊기는 생각의 조각들 사이로 재신은 정신없이 시경에게 매달렸다. 감당할 수 없는 쾌감이 재신의 전신을 지배했다. 의식이 희미해질 정도의 격한 움직임이 절정을 맞고, 시경의 몸이 쏟아지듯 재신의 위로 무너졌다. 몸에 와닿는 묵직한 무게와 땀냄새에 재신이 팔을 들어 시경의 등을 힘없이 끌어안았다.
"은시경씨…"
"하아… 죄송합니다, 공주님. 제가…"
"…죄송하단 말 한번만 더하면 다신 못하게 한다."
와중에도 또 죄송하다는 말을 하려는 시경의 입을 재신이 막자 시경이 꾹 입을 다물었다. 몸을 일으켜 재신의 눈을 마주치는 시경은 아까처럼 순한 얼굴로 되돌아와 있었다. 방금 전까지 자신을 몰아붙이던 그 남자가 맞는가 싶어 재신도 힘없이 미소를 지었다.
"은시경씨 의외로 거친 남자였네."
"그게…"
공주님, 때문입니다. 아직 흥분이 가시지 않은 얼굴로 시경이 뒷목을 만지작거렸다. 공주님이 그런 눈으로 올려다보시니까…, 변명을 잇는 시경을 보며 재신이 풋, 웃음을 터뜨렸다. 싫다는거 아닌데. 네? 시경이 재신을 돌아보자 재신이 팔을 당겨 시경을 옆으로 눕히고는 그 품으로 쏙 몸을 안겼다.
"좋다구… 나, 좀 거친 은시경씨가 좋은가봐."
눈을 깜빡거리던 재신이 시경의 가슴팍에 그대로 얼굴을 묻었다. 딱 벌어진 어깨며 보기좋게 근육이 붙은 팔과 가슴은 정복이나 수트를 입었을 때도 충분히 느낄 수 있었지만 이렇게 맨살을 맞대는 것은 또 전혀 다른 느낌이어서 재신의 심장이 쿵쾅쿵쾅 뛰었다. 이렇게 시경이 남자 그 자체로 느껴지는 것은 처음이었다. 재신이 손가락을 들어 시경의 가슴께에 낙서를 하듯 손장난을 했다.
"좋다. 이렇게 은시경씨랑 같이 있으니까."
배시시 웃다가 문득 얼굴이 새빨개진 재신이 시경의 가슴에 얼굴을 더 깊이 묻으며 웅얼거렸다. 그,그러니까. 막. 좋다는게, 그게 아니구. 나 그렇게 밝히는 공주 아니에요. 그런 재신을 꼭 끌어안으며 시경이 재신의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저도 좋습니다, 공주님."
"…정말?"
"네. 정말로요."
"나랑… 한 것도, 좋았어요?"
조심스러운 물음에 시경이 깊은 키스로 대답을 대신했다. 공주님은 상상도 못하실 정도로, 좋았습니다. 그 날도, 오늘도요. 시경의 대답에 그제야 안심이 되는 듯 재신의 양뺨이 발그레해졌다. 이렇게 공주님과 함께 있으니까… 아직도 꿈만 같습니다. 꿈, 아니에요. 시경의 몸에 입술을 댄채로 재신이 단호하게 말했다. 이제 꿈 아니에요. 나도, 은시경씨도. 같이 있는거 절대로 꿈 아니야. 시경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아요.
"전엔 이런건 꿈도 꾸지 못했습니다."
"이런거 뭐? 나랑 자는거?"
재신의 거침없는 되물음에 시경의 어깨가 움찔했다. …네. 그런데 그 날 이후로, 계속 공주님이 꿈에 나와서. 사춘기 소년같은 고백에 재신이 까르르 웃었다. 나와서 뭐? 나와서 내가 뭐했는데요? 이런거 했어? 짖궂은 물음에 더이상 대답하지 않고 시경이 재신을 안은 팔에 힘을 주었다. 열이 오른 체온과 체향이 뒤섞여 코 끝을 아찔하게 한다. 아침까지 여기 있어요. 이대로. 재신의 말에 시경이 고개를 끄덕였다. 재신의 입가에 미소가 피어났다.
재신의 붉은 머리카락을 동그란 어깨 너머로 쓸어넘기던 시경이 살며시 재신의 어깨를 쥐자 어느새 곤히 잠든 재신이 새근새근 숨을 쉬고 있었다. …공주님. 당황한 시경이 작게 재신을 불렀지만 재신은 미동도 없다.
…공주님.
곤란한 얼굴로 재신의 어깨를 살짝 흔들던 시경이 차마 재신을 깨우지 못한다. 하아, 한숨을 내쉰 시경이 결국 재신의 옆에 몸을 뉘인다. 육사 시절 이후로 한번도 불러본 적 없던 군가를 입 속으로 외우며.
25.
"그런데 은시경씨."
"네, 공주님."
"나 임신하면 어쩌려고 이렇게 대책이 없어?"
"…!"
"걱정말아요, 나 피임약 먹었으니까."
"…약, 몸에 좋지 않은거 아닙니까."
"그래도 뭐, 이미 해버렸는데 어떡해."
"절대 드시지 마세요. 앞으로는 제가 하겠습니다."
"계속 먹는거는 괜찮아요. 주기 조절하는거라고 하면 되는데 뭐."
"그래도 안됩니다. 공주님 약같은거 드시게 할 수 없습니다."
은 소령이 피임을 철저하게 하게된 계기.
26.
"어? 대대장님, 일어나셨습니까? 충성!"
"충성."
아침 조깅을 하던 서 중사는 저만치에서 걸어오는 시경을 보고 경례를 붙였다. 복귀한지 아직 채 한달이 되지 않은 새 상관이 아직 낯설기도 했지만 서 중사는 전설의 영웅인 상관이 자랑스러우면서도 존경스러웠다. 역시 뭔가 달라, 이렇게 아침부터 옷도 다 갈아입으시고. 상관의 뒷모습을 한참 지켜보다 다시 조깅을 시작하는 서 중사는 그 때까지만 해도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시경의 셔츠깃이 구깃구깃하다는 것과, 시경이 걸어온 방향에는 공주님의 방밖에 없다는 것을.
이런걸 써도 은팔찌 철컹철컹 차진 않겠죠 설마…
가뜩이나 어설픈 솜씨가 벽반용을 쓰려니 더… 그냥 둘이 잤다. 잤습니다. 라고만 봐주시면…
그래서 은시경의 군가에 애국가까지 부르는 욕구불만의 날들이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리핏 투 시리즈3)
더위 조심하세요. 올해는 더위 안먹고 지나가나 했는데 끝내 어제 더위먹고 앓아 누웠다 일어났습니다.
정말 끔찍하게 덥네요 ㅜ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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