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신 + 남매 이야기 조금.
쓰려고 했던건 여전히 못쓰고.
29.
"아, 정말 유익한 회담이었습니다."
"제쪽이야말로 이렇게 초대에 응해주셔서 정말 감사드립니다. 아직 저녁시간까지는 시간이 조금 남았는데 궁 안 구경이라도 하시지 않으시겠습니까? 태국에 비하면 화려한 맛은 없겠습니다만."
"무슨 말씀을, 대한민국 신궁은 고전미와 현대미가 어우러져 아름답기로 소문났지 않습니까. 꼭 구경시켜주시죠."
재하와 태국 국왕이 조금 지나치다싶을 정도의 덕담을 나누며 신궁 복도를 걷고 그 뒤를 조금 떨어져 시경을 비롯한 근위대원들이 호위하고 있었다. 서 중사는 옆쪽에서 같이 걷는 태국 근위대를 의식해 어깨를 펴고 목을 바짝 세웠다. 자신 뿐만 아니라 양국의 다른 근위대원들도 제법 서로를 의식하는 듯 잔뜩 힘이 들어간 모습들이었다. 시경만이 맨 앞에서 여느때와 다름없는 무표정한 얼굴로 걷고 있었다.
한국과 태국의 관광에 관한 협정을 체결하기 위해 태국 왕실은 대한민국 국왕 이재하의 초대를 받아 방한한 참이었다. 회담은 화기애애한 분위기에서 진행되었고 내각간의 협약도 무리없이 체결될 것으로 보여 양측 국왕은 둘 다 기분이 좋은 상태였다. 일흔을 바라보고 있는 태국의 노국왕이 대한민국의 젊은 왕에게 옆에 세워두었던 아들을 소개했다.
"제 아들입니다. 제 다음 왕이 될 녀석이죠. 전하에게 비하면 아직 영 부족합니다만."
"아니요, 저야말로 부족한 왕이라. 이재하입니다."
악수를 청하는 재하의 손을 왕자가 가볍게 잡았다. 앞으로 긴 시간, 잘 부탁드립니다. 재하와 왕자의 눈이 마주쳤다. 도전적인 얼굴을 한 왕자를 보며 재하의 입꼬리가 슬쩍 올라갔다. 훤칠하게 키가 큰 왕자의 여유 넘치는 모습에 태국측 근위대도 다소 안심한 얼굴로 뒤를 따랐다. 그들이 신궁 서측의 작은 홀에 다다렀을 때, 홀의 열린 문으로 피아노소리가 흘러나왔다. 응? 누가 음악을 틀어놨지? 재하가 발을 멈추자 모두의 발걸음이 같이 멈추었다.
연회장 안에서, 누군가가 혼자 피아노를 연주하고 있었다. 흰 건반 위를 부드럽게 오가는 손가락, 커다란 창으로 쏟아져들어오는 오후의 햇살에 반짝이는 붉은색 긴 머리카락과 흰 피부. 재신이었다. 그림같이 아름다운 광경에 뒤에 선 근위대들조차 넋을 놓고 재신의 모습을 쳐다보고 있었다. …라벨이군요. 노국왕이 흐뭇한 얼굴로 피아노를 연주하는 아가씨를 바라보았다. 그 때 인기척을 느꼈는지 피아노 위를 미끄러지던 재신의 손가락이 멈추고, 공주의 시선이 입구를 향했다.
"…어머."
"계속 해도 되는데."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오빠와 귀빈들에 재신이 재빨리 피아노 의자에서 내려와 홀을 가로질러왔다. 이재신 공주입니다. 제 여동생이죠. 이따 저녁 연회 때 소개시켜드리려 했는데 일찍 하게 되었네요. 재하가 공주의 소개를 하자 재신이 미소를 지으며 가볍게 고개를 숙여보였다. 이재신입니다. 만나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전하. 한국 공주님이 그렇게 미인이란 말은 익히 들었는데 실물을 뵈니 한국엔 모든 꽃과 별도 다 빛을 잃겠습니다그려. 허허. 나이든 국왕이 넉살좋게 웃었다. 재신의 시선이 국왕 옆에 서 있는 태국의 왕자를 향했다.
"인사드려야지, 공주님께. 제 아들입니다."
태국 왕자를 향해 재신이 환하게 웃자 왕자의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이따 연회 시간 알지? 시간 맞춰 내려와. 재하의 당부에 재신이 네,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이따 뵈어요. 살짝 고개를 숙여 인사한 재신이 방을 향하며 사람들 몰래 시경과 눈을 마주쳤다. 이따가 봐요. 입모양으로만 말하는 재신에게 시경이 고개를 끄덕여보였다. 재신이 사라진 방향을 흘끔흘끔 보며 술렁거리는 태국 근위대를 보며 서 중사는 괜히 자신이 뿌듯한 기분이 들었다. 봤냐, 미모충만. 급이 달라요 급이.
연회는 왕실의 자존심인만큼 화려하게 준비되었다. 한식과 양식이 연이어 나오고 양국의 왕실 사람들이며 동행한 내각 관료들까지 떠들썩했다. 디저트 테이블 옆에서 과일을 먹고 있는 재신에게 태국의 왕자가 다가왔다.
"안녕하세요, 공주님."
"안녕하세요. 다시 뵙네요."
"아까도 아름다우셨지만 지금은 정말 아름다우시네요. 하늘에서 선녀가 내려와도 공주님보다 아름답진 않을겁니다."
낯간지러울정도의 칭찬에 눈을 깜빡이던 재신이 사르르 웃었다. 부끄러워요, 그만하세요. 명백한 의도를 가진 왕자의 대화에 재신은 능숙하게 대처했다. 하지만 거리를 두려는 재신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왕자는 결국 그 질문을 꺼내고야 말았다.
"아직 미혼이시라고 들었는데."
"그렇긴 하죠. 아직은."
"아직은, 이란건 상대는 있으시다는…"
왕자의 물음에 재신은 굳이 대답하지 않았다. 국내에서야 재신과 시경의 사이가 이미 알려졌고 해외 토픽에도 몇 번 난 적 있지만 아직 공식 약혼 전이었다. 재신의 입에서 직접 결혼을 암시하는 단어를 타국의 왕족에게 말한다는 것은 부담이 있었다. 왕자의 시선이 슬쩍 입구를 경호중인 시경을 향했다. 시경을 한 번 쳐다본 왕자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그 옆모습을 바라보는 재신의 얼굴은 반대로 묘하게 굳었다.
"무슨 이야기들을 그렇게 재밌게 하고 있어?"
한 손에 와인잔을 든 재하가 다가왔다. 태국 국왕부부도 함께였다. 왕자님하고 인사 좀 했지, 뭐. 재하를 보며 재신이 웃어보였다. 제가 공주님께 관심이 많아서. 왕자가 의미심장하게 덧붙였다. 태국 국왕도 그런 태도가 싫지 않은지 허허허, 하고 웃을 뿐이었다.
"공주님이 워낙 아름다우셔서요. 결혼하실 분이라도 계신지 물어보던 중이었습니다."
"아, 그러십니까? 제 입으로 말하기 좀 그렇긴 합니다만 제 동생이 한 미모 합니다. 태어났을 때부터 떠들썩했죠. 저희 왕실이 좀. 아, 물론 미모라면 왕비도 지진 않습니다. 저기 보이시죠? 한떨기 목련꽃같죠, 그렇지 않습니까? 목련꽃 아십니까?"
재하가 재빠르게 실없는 왕인척 화제를 돌렸다. 정식으로 이야기가 들어오면 상당히 골치아프기 때문에 알아서 물러나라고 압박하는 것이었다. 그런 뉘앙스를 아는지 모르는지 혹은 알면서도 모르는 척 하는건지 왕자는 집요하게 화제를 재신으로 돌렸다. 옆에 서 있는 재신은 이미 자리가 가시방석이었다. 작게 고개를 저은 재신이 눈꼬리가 축 쳐진 불쌍한 얼굴을 하고는 살짝 재하의 팔을 잡았다.
"오빠, 나 다리가…"
"뭐, 다리가 아파? 그럼 안되지. 들어가, 들어가. …아, 이거 죄송하게 되었습니다. 아시겠지만 동생이 다리가 좀 안 좋아서요. 오래 서있거나 그러질 못합니다. 같이 이야기도 더 나누게 하고 그러고 싶은데 아쉽네요. 어서 들어가 쉬어, 재신아. 은 소령, 이재신 공주 내실로 모셔."
남매의 연기가 아카데미 주연감이다. 다리가 아프다는 말을 채 끝마치기도 전에 재하는 호들갑을 떨며 동생을 걱정하는 오빠를 연기한다. 이쯤해서 재신이 모습을 감추는게 아마 최선일 것이다. 그리고 절대 출국하는 날까지 마주치지 못하게 해야지. 재하가 재빨리 아까부터 멀찍한 곳에서 이쪽을 주시하고 있는 시경을 부른다. 시경이 빠른 걸음으로 가까이 오자 재신이 여전히 가련하고 병약한 공주의 얼굴을 한채 귀찮게 해서 미안해요, 소령님. 하고 시경의 얼굴을 본다.
"죄송해요, 자리도 못 지키고 너무 폐를 끼치네요. 제가 아직 다리가 회복이 덜 되어서… 정말 죄송합니다. 즐거운 시간 보내세요."
미안해서 어쩔줄 모르겠단 얼굴로 재신이 태국 국왕 부부에게 인사를 올린다. 대한민국 공주의 다리가 좋지 않은건 이미 세계가 다 아는 사실이지만 굳이 이렇게 어필을 하는 이유를 몇십년간 왕좌에 있었던 노왕은 모르지 않을 것이었다. 피차 웃으며 그냥 마무리 하자는 의미를 알아들은 것인지 노왕은 그저 허허 웃으며 들어가 쉬시라 대답할 뿐이었다. 왕자의 앞에 선 재신이 손을 내밀었다. 오늘 만나뵈어 즐거웠어요. 편한 시간 보내다 가셔요. 갈 때까지 안 만나겠다는 확고한 의지를 담은 인사에 왕자가 씩 웃으며 손을 맞잡았다. 왕자가 지나치게 힘주어 맞잡은 손을 놓아주지 않아 재신이 조심스럽게 손을 빼려던 때, 왕자가 재신의 오른손 약지에 끼워져 있는 반지를 휙 빼내었다.
"이런 싸구려 낡은 반지는 공주님께 어울리지 않습니다. 제가 훨씬 좋은 것으로 사드리죠."
"돌려주세요."
"얼마든지 더 귀하고 비싼 좋은 것으로 사드릴 수 있습니다. 공주님께 어울리는. 이런걸 하고 계시면 공주님과 왕실 급이 떨어지지 않겠습니까?"
왕자의 시선이 흘끔 시경을 향했다. 시경은 왕자를 쳐다보고 있지 않았지만 명백하게 굳은 입매를 하고 있었다. 왕자의 입가에 비웃음에 가까운 승리의 미소가 흘렀다. 하지만 작은 승리에 도취된 나머지 왕자는 보지 못했다. 눈 앞에 서 있는 남매의 싸늘하게 굳은 얼굴을.
"돌려달라고 말씀드렸을텐데요."
"물론 돌려드릴겁니다, 공주님에게 걸맞는 훨씬 더 크고 아름다운 반지로."
"왕자님께선 왕자님의 급과 품위를 표현하시는 방법이 돈과 고가의 물건 이외엔 없으신가보군요."
"…네?"
재신의 차갑게 가라앉은 목소리에 비로소 왕자가 약간 당황한 낯빛으로 재신을 살폈다. 방금 전까지의 청순하고 가련한 공주는 온데간데 없고 눈 앞의 공주는 범접할 수 없는 분위기를 내뿜고 있었다.
"왕실은 국민에게 빚진 존재죠. 신궁 담장 안에서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지금같이 평등해야할 시대에 누리고만 살아가니까요. 그런 왕실의 사람들이 존재가치와 품위를 보이는 방법은 호화로운 모습을 과시하며 군림하는 것보다 다른 쪽에 있다고 생각합니다만."
"저, 그…"
"저에게 어울리는 물건이 뭐라고 생각하셨는진 모르겠지만, 저는 왕자님처럼 가격과 호화로움만으로 지닌 물건에 가치를 부여하지 않아서."
왕자를 올려다보던 재신이 도도한 손길로 왕자의 손에 들린 반지를 잡아채어 우아하게 다시 손가락에 끼웠다. 예상치 못한 공주의 반응에 왕자는 진심으로 당황해 있었다. 손가락에 끼워진 반지를 한번 쓸어내린 재신이 돌아서며 시경의 팔을 살짝 잡았다. 좀 도와주겠어요? 나, 몸이 별로 좋지 않아서. 시경의 팔짱을 끼며 재신이 고개를 돌려 가볍게 인사했다. 입구 쪽으로 사라진 재신의 뒷모습을 황망하게 쳐다보는 왕자에게 재하가 와인잔을 건넸다.
"피아노 잘치고 병약하다고 꼭 청순가련하게 왕자님 앞에서 손모으고 기다려야 할 이유는 없죠. 요즘 세상에 그런 공주가 어딨습니까. 그리고, 재신이한테 어울릴만한 반지로 돌려주시겠다 하셨는데,"
대한민국 왕실의 유일한 공주, 얼마에 가격 매기실겁니까? 빈 와인잔을 채워주며 재하가 가까이에서 씨익 웃었다. 지켜볼겁니다. 여유롭게 웃는 국왕 앞에서 아직 경험이 미진한 왕자는 안절부절하는 얼굴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30.
"아, 진짜 피곤해서 살 수가 없네."
시경을 비롯해 전담호위들과 함께 공주궁 복도에 들어서자마자 유주얼 서스펙트 뺨치는 얼굴로 재신이 기지개를 쭉 켜며 짜증을 냈다. 아니 왜 멋대로 남의 손을 주무르질 않나 미친거 아냐 진짜 왜저래, 완전 짜증이야. 어디서 돈자랑을. 또각또각 구두 소리를 내며 걷던 재신이 이내 고개를 돌려 근위대원들을 쳐다보았다.
"오늘 고생 많았어요, 오빠 모시느라."
"아닙니다, 공주님!"
"내가 진짜 국빈 앞에서 안 그러려고 했는데, 왜 사람 성질을 건드려, 건드리길."
"공주님 멋있으셨습니다!"
"맞습니다, 그런 돈자랑하는 왕족들은 콱 그냥 콧대를,"
"야, 야."
"죄송합니다!"
서 중사며 동하가 떠들썩하게 재신을 떠받들자 재신이 까르르 소리내어 웃었다. 어휴, 우리 작은 오빠가 잘 수습 해주겠죠 뭐. 오빠나 나나 성격이 똑같아서. 고생 많았고, 연회장으로 일단 돌아가봐요. 아마 다 끝났겠지만. 네, 충성! 경례를 붙이고 돌아가려는 근위대원들 끝의 시경을 재신이 살짝 잡았다. 은시경씨는 잠깐만. 먼저 가라는 손짓을 해보이는 대대장을 뒤에 두고 근위대원들이 다시 연회장을 향했다.
"공주님 쩔어."
"역시 공주님."
"아 진짜 그 왕자 느끼하게 생겨가지고 영 아니지 말입니다."
"빨리 가버렸으면 좋겠다. 태국 근위대놈들도 같이."
31. 서 중사는 모르는 이야기 8
"짜증나아, 왜 남의 걸 막 멋대로."
시경의 무릎 위에 앉은 재신이 이리저리 반지낀 손을 비춰보며 투정을 부렸다. 재신이 떨어지지 않도록 허리를 꼭 잡은 시경은 여느 때와 다름 없는 얼굴로 재신을 보고 있을 뿐이었다. 진짜 발이라도 확 밟아줄걸. 입술을 비죽거리며 말하던 재신이 가까이에서 시경에게 휙 얼굴을 돌렸다.
"기분 나빴죠, 미안해요. 왕족들이 좀 저런 사람들이 있어요."
"아닙니다."
"아닌 얼굴이 아닌데? 여기가 딱 굳어서는."
시경의 주름잡힌 미간을 재신이 손가락으로 톡 건드렸다. 재신의 허리를 감싼 시경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그리고 다른 한 손으로 재신의 오른손을 쥐어, 그대로 손가락 끝에 입을 맞추었다. 손가락 끝에 닿은 입술이 섬세하게 마디마디에 닿고, 반지 위에 닿고, 손등에 닿았다. 마지막으로 손바닥에 입을 맞춘 시경이 입술을 묻은채 그대로 눈을 들어 재신을 보았다.
"참는건 익숙합니다만."
"뭐래, 누가 참으래? 앞에서 딴 남자가 자기 여자 손을 주무르는데."
"안 참으면 해외토픽감 됩니다. 근위대장이 국빈에게 폭력 행사, 뭐 이런걸로."
자못 심각하게 대답하는 시경을 보며 재신의 큰 눈이 초승달 모양으로 휘었다. 누가 보면 내가 막 부추기는줄 알겠어. 시경의 목에 팔을 감고 재신이 그대로 몸을 시경에게 기대었다. 작고 부드러운 몸이 꼭 맞춘 듯 시경의 품에 들어갔다. 공주님. 온 몸으로 재신을 품에 안은 시경이 재신의 어깨에 턱을 걸쳤다.
"전하께 말씀드려야겠습니다."
"뭘요?"
"약혼… 빨리 해야겠다고."
"왜, 겁나요? 자꾸 태국 왕자같은 사람 나타날까봐?"
"겁은 안납니다."
"그럼?"
장난스러운 얼굴을 한 재신의 귓가에 시경이 작은 목소리로 몇 마디를 속삭였다. 그 말을 들은 재신이 순간 얼굴이 잔뜩 붉어진다. 그런 재신을 보는 시경의 얼굴도 덩달아 붉게 달아올라 시경은 재빨리 재신을 침대에 내려놓고 치맛자락을 정리해주었다. 시중 들 궁인들을 부르겠습니다. 전 전하께 다시 가봐야 해서 이만. 이따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 쉬세요. 꾸벅 인사를 하고 재빨리 돌아나가는 시경의 뒷모습을 아쉬운 듯 쳐다보던 재신이 시경이 사라지자 시트를 끌어당겨 얼굴을 반쯤 가렸다. 미쳐, 내가. 저 돌직구. 돌려 말할줄도 모르고.
「자꾸 내 여자한테 집적거리는 놈들 보는게 짜증납니다. 도장 찍어야겠습니다.」
…좋아 죽겠어, 진짜.
32.
태국 왕실 전용기의 문이 열리고 근위대가 양쪽으로 절도 있게 정렬해 있다. 그럼, 서로 많이 방문하는 해가 되길 바라겠습니다. 관광객들도요. 태국 국왕과 재하가 웃으며 손을 맞잡았다. 두 국왕 다 연회에서 있었던 일은 일절 입에 올리지 않았다. 양쪽 다 별로 언급해 좋을 일이 아니니 잘 묻자는 두 국왕 사이의 묵언의 합의였다. 태국 국왕이 수상이며 관료들에게 차례로 악수를 청했고 그 뒤를 왕자가 그대로 따랐다. 근위대를 대표해 앞으로 나와 있던 시경과 국왕이 악수를 하자, 그 뒤로 왕자와 시경이 서로 마주했다. 왕자가 재신에게 망신을 당한 사건은 알음알음 이미 궁에 다 퍼져 있었기에, 왕자와 시경을 지켜보는 주변에도 묘한 긴장감이 돌았다.
"수고하셨습니다."
"한국에서 좋은 시간 보내셨길 바랍니다."
누가 봐도 왕자의 손아귀에 지나치게 힘이 들어가 있었다. 시경은 딱딱한 얼굴 그대로였다. 눈썹 하나 움직이지 않는 시경의 얼굴을 보던 왕자가 툭, 내뱉었다.
"다음번에 만날 땐 내 위치가 지금같진 않을겁니다."
"지위가 변해있는 사람이 왕자님만은 아닐겁니다."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받아치는 시경에 왕자의 눈썹이 일그러졌다. 욱하셨네, 욱하셨어. 서 중사의 옆에서 동하가 작게 입속으로 중얼거렸다. 시경과 일상을 같이 하는 근위대원들만 미묘하게 느낄 수 있을 정도로 달라진 시경의 톤에 서 중사도 동하에게 동의를 표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욱하셨네, 욱하셨어. 서 중사는 잔뜩 어그러진 얼굴로 비행기에 오르는 왕자와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는 시경을 번갈아가며 쳐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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괜히 써보고 싶었던 이웃나라 왕자 얘기.
근방의 왕국이라고는 태국밖에 떠오르는데가 없어서.
내 사람 건드리는건 절대 못참는 왕족 남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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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상하고 우아한게 전부가 아닌 대한민국 공주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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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이 그나마 좀 시원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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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재신이 피아노로 치던 곡은 라벨의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 피아노 편곡 버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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