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어서.
70.
머리를 짓누르는 듯한 고통에 시경은 천천히 눈을 떴다. 흐릿한 시야 사이로 낯선 공간이 보이고 안개가 낀 듯한 머릿속은 좀처럼 맑아지지 않는다. 뻐근한 어깨를 움직이려 무심결에 팔을 든 시경의 손목에 철컹, 차가운 금속이 느껴지자 그제야 시경의 눈도 제대로 뜨였다. 시경은 고개를 돌려 방 안을 둘러보았다. 낡은 시멘트 바닥과 검은 벽, 코 끝으로 스며드는 먼지 냄새. 눈을 꽉 감았다 뜨며 시경은 정신을 집중하려 애썼다.
일정은 이틀가량 지나 있었다. 아무 문제도 없었고 양국 정상간의 분위기도 화기애애했다. 저녁 만찬을 마치고 호텔로 들어와 시경은 불침번을 확인하고 무슨 일이 생기면 당장 보고하라 단단히 이른 후 자신의 방문을 열었다. 시경의 방은 재하, 항아의 방과 바로 근접한 호수였다. 문을 열고, 불을 켰을 때 접촉 불량이었는지 갑자기 방 불이 꺼졌고 시경이 스위치를 다시 누르려는 순간.
그 이후로 아무 기억도 나지 않았다.
…전하. 시경은 급하게 주위를 둘러보았다. 모든 것을 집어삼킬 듯 새카만 방 안에는 오로지 시경 뿐이었다. 시경은 천천히 두 팔을 움직여보았다. 양쪽 팔이 다 고정되어 있었지만 묘하게 느슨했다. 잘하면 뺄 수도 있을 것 같았다. 팔부터 무릎, 발목, 다리를 천천히 움직이며 시경은 몸 상태를 확인했다. 어딘가 부러지거나 부상을 입은 곳은 없었다. 바닥에서 올라오는 냉기가 뼈를 타고 전신으로 퍼져나갔다. 누가, 어떻게, 왜. 무엇 하나 대답이 나오는 문제가 없었다. 심지어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조차 가늠할 수도 없었다.
시경은 조심스럽게 왼손을 움직여 빼내려 시도했다. 단단한 쇠사슬이 시경이 팔을 움직일 때마다 을씨년스럽게 철컹거리는 소리를 냈다. 손목뼈에 통증이 오고 모서리에 쓸린 살갗이 벗겨져 피를 내고 나서야 시경은 왼손을 빼낼 수 있었다. 한 손이 자유로워지니 다른 손은 쉬웠다. 자유로운 몸이 되자마자 시경은 허리춤을 더듬었지만 역시 총은 없었다. 발목에 걸어둔 것도 마찬가지로 사라졌다. …무장은 해제시켰다 이건가. 당연하겠지. 뻐근한 손목을 매만지며 시경은 굳게 닫혀 있는 문을 향해 조용히 발걸음을 옮겼다.
전하와 왕비님의 안위. 납치범의 목적. 오싹하리만치 깔끔했던 납치에 비해 지나칠 정도로 허술한 수갑. 문고리에 손을 대는 시경의 눈이 깊게 검은 빛을 내었다.
71.
"…납치, 라고요."
규태가 건넨 물잔을 드는 재신의 손이 바들바들 떨렸다. 무너지는 순간 급하게 달려와 어깨를 쥔 규태의 손에 재신은 겨우 정신을 차렸다. 공주님! 아플 정도로 공주의 어깨를 그러쥔 늙은 비서실장은 필사적이었다. 규태의 부축을 받아 국왕 집무실로 들어간 재신이 납치, 라는 말에 결국 두 손에 얼굴을 묻었다. 왜, 왜 또 이런 일이.
"일정을 마치시고 방에 들어가신 순간 호텔 전체에 정전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불이 들어온 뒤, 전하, 왕비님, 시경이만 사라졌다고…"
"누가, 왜요."
"아직 납치범의 정체나 목적이 전혀 파악이 안된다고 합니다."
"그 쪽… 그 쪽 정부에서는 뭐라고…"
"본인들은 전혀 모르는 일이라고, 오히려 불편한 기색입니다. 여러모로 상황이 좋지 않습니다, 공주님."
물, 물 한잔만 더 주세요. 규태의 옆에서 안절부절하던 박 비서가 건넨 차가운 물을 연달아 들이킨 재신은 두 손을 들어 자신의 뺨을 몇 번 쳤다. 안돼, 정신을 놓으면 안돼. 처음 겪는 일이 아니었다. 재신은 항아와 영선이 사라졌던 때를 떠올렸다. 여긴 나밖에 없어. 내가 무너지면 안돼. 파르르 떨리는 몸을 애써 추스리며 재신은 이를 악물었다. 왕실 비상상황에 대한 매뉴얼, 아실겁니다. 공주님. 규태를 보며 재신은 고개를 끄덕였다.
"국왕에게 비상상황시 왕위계승서열에 따라 국왕의 모든 권한을 가지고 비상상황에 임한다. …나밖에 없네요, 지금. 아직 돌도 안 지나 정식책봉도 안된 세자에게 맡길 수도 없으니."
"우선 말이 새어나가지 않도록 급하게 다 막아놓았습니다."
"언론에 나가는건 절대 안돼요. 원래 귀국일이 언제였죠?"
"4일 뒤 저녁 일곱시에 현지에서 전용기가 출발하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4일…"
재신이 입술을 깨물었다. 그 안에 이 상황을 해결하지 못하면, 공식 일정이 끝나고도 귀국하지 않는 국왕에 대해 언론이 의문을 제기할 것이다. 최소한 변명거리라도 마련해야 한다. 내가… 잘 할 수 있을까? 불안에 흔들리는 재신의 눈빛을 본 규태가 공주님, 하고 재신을 재촉해왔다.
"…누가 납치했든, 일국의 중요인물을 셋이나 데려갔어요. 그것도 둘이 군인이고 군인출신이에요. 어지간한 상대가 아닐거에요. 하지만 왕족을 쉽게 어쩌진 못할거에요. 뭔가 목적이 있겠죠, 그 쪽도. 우선 상대부터 파악해주세요. 절대 궁 밖으로 새어나가지 않게 최소인원만 이용해주시고, 이유불문하고 궁인들과 직원들 휴대폰 다 압수하고 인터넷도 끊어주시고요. 대사관 연결해서 저한테 바로 보고 주세요. 아, 그리고 현지에 있는 우리쪽 근위대와 수행원들 안전도 확보해주세요."
"알겠습니다."
규태가 목례 후 급하게 집무실을 나섰다. 재신은 의자에 앉은 채 규태와 박 비서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납치. 호텔에서, 그렇게 신속하게… 납치. 재신의 입술이 굳게 다물렸다. 떠오르지 않아도 될 기억이 떠올랐다. 어떻게 알았을까, 기밀에 부쳐지는 왕실이 묵는 곳을. 집무실 문이 천천히 닫히며 그 틈으로 박 비서의 등이 보였다. 문이 완전히 닫히자 재신은 수화기를 집어 들었다.
"내 전담 경호원들, 지금 당장 집무실로 불러주세요."
갑작스러운 호출에 바로 노크 소리가 들리고 동하와 김 소위, 서 중사가 들어왔다. 책상 앞에 앉은 채 재신은 세 사람을 차례로 쳐다보았다. 문 잠가요. 오전, 신혼집을 둘러보던 때와는 다른 사람인 것처럼 낯선 공주의 목소리에 서 중사가 급히 집무실 문을 잠갔다.
"총이랑 신분증 꺼내서 책상 위에 올려놔요."
"…예?"
"못 들었어요? 총이랑 신분증 꺼내서, 책상 위에 올려놓으라고요."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공주를 보던 세 사람이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곧장 총과 신분증을 꺼내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재신은 팔짱을 낀 채 책상 위에 올려진 세 개의 권총과 신분증을 보다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그대로 세 사람 앞으로 걸어와 손을 뻗었다. 고, 공주님. 재신이 동하의 자켓을 쥐자 바싹 굳은 동하가 재신을 불렀지만 재신은 대답조차 하지 않고 동하의 몸을 직접 수색하기 시작했다. 포켓 안부터 허리, 발목까지 직접 다 확인을 마친 재신이 이미 알 수 없는 긴장감에 입도 열지 못하는 김 소위와 서 중사 앞에도 차례로 섰다. 아무것도 없는 것을 확인한 재신이 한 걸음 물러나 세 사람을 보자 동하의 얼굴이 심각한 빛을 띠었다.
"무슨 일… 있는겁니까, 공주님?"
"염동하 대위."
"예."
"은시경씨랑… 같이 근위대에 들어왔죠. 벌써 시간이 많이 지났네요."
"예, 그렇습니다. 공주님."
"근위대가 이럴거라고 생각 안했을텐데 와서 참 별 일이 다 있었죠? 왕비가 납치되고, 상관은 죽을뻔하고, 전쟁 직전까지 가고."
"아닙니다. 제 일입니다."
"김형석 소위."
"예, 공주님!"
"김 소위도 그 무렵에 들어왔으니 고생 많았겠어요."
"아, 아닙니다!"
재신이 꺼낸 말에 동하와 김 소위의 얼굴이 천천히 일그러졌다. 재강의 죽음과 재하의 즉위 후, 대한민국 역사상 가장 지독한 시기를 왕실 근위대에서 버텨낸 두 사람은 지금 눈 앞의 공주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본능적으로 눈치챘다. 두 사람을 보던 재신의 시선이 서 중사를 향했다.
"서은규 중사."
"예, 공주님!"
"…몇살이었죠?"
"스물 여섯입니다!"
서 중사를 보던 재신이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 한숨 속에 담겨 있는 의미를 아는 것이 두려워져 서 중사는 주먹을 꽉 쥐었다.
"세 사람은 계속 내 전담호위였죠. 꽤 오래 나랑 같이 다녔네요. 아마 오빠보다 날 호위했던 때가 더 많았을거에요. 그래서, 나는 세 사람을 참 아껴요. …믿고."
차갑고 냉정했던 재신의 눈이 한순간 슬픈 빛을 띠었다 다시 가라앉았다. 지금부터 나는 세 사람에게 아주 크고 무거운 짐을 안기려고 해요. 군인으로서의 삶과 목숨을 걸어야 할 수도 있어요. 지금 거절해도 괜찮아요. 명령 불복종도 아니고 비겁한 것도 아니에요. 하지만 지금이 아니면 돌이킬 수 없어요. 위험할거고, 두려울거에요. 재신은 세 사람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무거운 침묵이 그 안을 감돌았다. 서 중사는 재신이 말하는 것이 무엇인지 상상조차 가지 않았다. 살짝 고개를 돌려서 본 동하와 김 소위의 눈은 자신과 달랐다. 그들이 겪었던 그 무언가는 서 중사가 막연히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큰 일이었을 것이다. 다시 고개를 돌린 순간 서 중사의 눈이 재신의 눈과 마주쳤다. 공주의 커다란 눈동자를 보는 순간 서 중사는 마음 속에서 무언가가 끓어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저 여린 공주님조차 저렇게 강한 눈을 하고 있는데.
"셋을 셀거에요. 그 전에 나가지 않으면 돌이킬 수 없어요. 하나, 둘… 셋."
미동도 않는 세 사람을 보고 재신이 슬픔인지 안도인지 알 수 없는 얼굴로 눈가를 쓸어내렸다. 흔들리는 다리로 다시 의자에 앉은 재신이 세 사람을 올려다보았다.
"오빠가 납치됐어요."
"…예?"
"오빠뿐만이 아니에요. 항아언니랑, 은시경씨까지… 다 사라졌어요."
"왕비님과 대대장님도 말입니까?"
"이게 무슨 뜻인줄 알죠?"
북한 특수부대 교관 출신의 왕비와 산전수전 다 겪은 남한 근위대 대대장이다. 손등을 타고 올라오는 한기에 서 중사는 등에서 식은땀이 흐르는 것이 느껴졌다. 지금 궁에서 알고 있는 사람은 소수에요. 많이 알아서 좋을게 없다는건 잘 알고 있을거에요. 사태파악은 실장님 중심으로 돌아갈거고, 세 사람은 내 전담호위니 계속 나와 함께 해야 해요. …위험할거고, 누군가가 다칠 수도 있어요. 간단히 설명을 마친 재신이 짧게 숨을 멈추었다가 내쉬었다. 순간의 긴장감이 집무실 안을 가득 메웠다.
"그리고, 그것 말고도… 세 사람이 해줘야 하는 일이 있어요."
"무엇… 입니까?"
"분명히, 있을거에요. 내부의 동조자가."
김 소위가 침을 삼키는 소리가 유독 크게 들렸다. 동하가 참았던 한숨을 토해냈다. 공주가 맡길 일이 명백해졌다. 무거운 짐이라는 의미도.
"모든 사람을 의심하고, 모든 사람에 대해 알아보세요. 누군가 꼬리가 긴 사람이 있을거고, 거기서부터 문제를 풀어나갈 수도 있을거에요. 그리고 그 보고는… 무조건 나한테만 하세요. 다른 누구도 말고, 나한테 직접."
"실장님께도, 하지 않습니까?"
"하지 말아요. 그리고, 분명히 말했어요. 모든 사람을 의심하라고. 잘 생각하세요. 모든 사람이라는 의미를."
"저희는… 믿으시는겁니까?"
서 중사의 질문에 재신이 씁쓸하게 웃었다. 내 믿음이 잘못되었다면, 그르친 판단의 댓가를 혹독하게 치르겠죠. 소지품 챙겨서 나가봐도 좋아요. 공주를 향해 선 세 사람이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정확히 각잡힌 태도로 경례를 붙였다. 곧은 눈을 마주한 재신이 보일 듯 말 듯 아주 희미하게 웃었다. 집무실을 나서는 세 사람의 발걸음이 무거웠지만 단호했다. 그들의 등 뒤에 있는 공주는 그들보다 훨씬 더 크고 무거운 짐을 홀로 지고 있을 것이기에.
다시 혼자가 된 집무실 안에서 재신은 의자를 돌려 재하의 책상 위에 놓인 액자를 집어들었다. 세 장의 사진을 꽂을 수 있는 액자에는 선왕, 영선, 재강, 재하, 그리고 어린 재신이 함께 찍은 오래된 가족사진과 세자를 안고 있는 재하와 항아의 사진, 그리고 재신의 약혼식 때 찍은 사진이 차례로 담겨져 있었다. 재신은 손가락을 들어 사진을 더듬었다. 어린 재신. 초등학생이었던 재하와, 고등학생인 세자 재강.
「재신이는 크면 여왕님이 될거야!」
「야, 형이 왕이 될건데 니가 어떻게 여왕이 되냐?」
「왜! 할거야! 재신이 여왕님 할거야! 이렇게 왕관도 쓰고 할거란 말이야! 큰오빠, 작은오빠가 재신이는 여왕님 못한대. 이재하 나빠!」
어린 자신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던 재강의 눈빛이 떠올랐다. 재신이가 여왕님이 되면, 큰오빠는 아주 슬플거야. …큰오빠가 슬퍼? 큰오빠가 슬프면 안할래. 재신이 여왕님 안해. 다섯살, 어린 공주가 알 리 없었다. 셋째인 자신이 여왕이 된다는건, 재강도 재하도 없다는 뜻이란 것을.
"작은 오빠, 오빠도 여기 앉는게 이렇게 무서웠니?"
여기 너무 춥고 싫다. 그러니까 빨리 와서 이 자리 좀 다시 가져가. 눈물이 흐를 것 같아 재신은 눈을 꽉 감고 푹신한 의자에 몸을 파묻었다. 책상 위에 올려둔 재신의 휴대폰이 한 번 진동했다. 휴대폰을 집어 들어 메시지를 확인한 재신의 뺨에서 결국, 한줄기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공주님, 소령님과 녹음하신 곡 믹싱 다 마쳤습니다. 메일로 첨부해 드리니 들어보시고 마음에 안 드시는 부분 있으시면 다시 연락주세요! 두 분 목소리가 아주 좋습니다. 두 분 결혼도 멋진 새로운 시작이 될 것 같네요.」
시경씨.
내 기사님.
공주는 여기 혼자 있는데, 어디 있는거야.
72.
잠겨 있을거라 예상한 문은 생각보다 너무 쉽게 열렸고 복도에는 아무도 없었다. 이상하리만치 고요한 복도를 시경은 면밀히 살피며 걸었다. 코너를 돌고 계단을 내려와도 사람 한 명 볼 수 없자 시경은 다른 의미로 이질감을 느꼈다. 전신의 감각이 곤두서 예민해진 오감이 여태까지와는 다른 긴장감을 전한다. 시경은 완벽하게 혼자였다. 한 층을 내려온 시경의 눈에 복도 끝 문이 보인다. 방일지, 다른 곳으로 연결된 문일지 감이 잡히지 않는 상태에서 계단을 돌아 문 쪽을 향하던 시경의 뒷목에 서늘한 금속의 감촉이 느껴졌다.
"생각보다 빠르군. 두어시간은 더 걸릴 줄 알았는데."
등 뒤의 인물이 한 명이 아니고, 자신은 비무장상태라는 것을 깨달은 시경은 두 손을 들어보였다. 걸어. 총구가 다시 들이대지자 시경은 그대로 천천히 앞으로 걸었다. 두터운 철문이 열리고, 시경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어둡게 드리워졌던 그림자에 천천히 빛이 스며들며 안에 서 있는 남자의 얼굴이 드러났다.
"오랜만이군, 은시경 대위. 아니, 이제 소령인가?"
"왜… 당신이…"
남자를 마주한 시경의 눈이 커졌다. 그는 과거 규태와 함께 비서실에 있던 선왕의 비서 중 한 사람. 정확히는, 규태와 같이 궁에 들어온 사람이었다. 시경이 근위대에 들어오기 전 이미 비서직을 그만두어 궁에 들어온 후 직접적으로 마주친 적은 없었지만 규태를 통해 시경은 몇 번 그를 만난 적이 있었다. 족히 십년은 되었다, 그를 마지막으로 본지. 당황한 얼굴을 감추지 못하고 시경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자 시경의 등 뒤에 있던 남자들 중 한 명이 천천히 앞으로 나섰다.
"너도 참 명줄이 길군."
"…내가 들을 말은 아닌 것 같은데."
와해되서 흔적도 없이 사라진 줄 알았는데. 두 손을 든 채인 시경의 눈동자가 차갑게 가라앉았다. 지독한 악연이다. 시경은 눈 앞의 남자를 알고 있었다. 그는 클럽M이 자신을 고문할 때에도 있었고, 재하의 머리에 총을 겨누어야 했던 때에도 있었고, 재신이 떨리는 목소리로 증언하던 그 재판장에도 있었다. 그러나 시경은 그에 대해 아무것도 알 수 없었다. 그는 그림자였고, 어둠이었고, 존재하지 않는 남자였다. 존 마이어가 죽고 클럽M이 와해되면서 그 역시 마치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다는 듯 사라졌다. 클럽M의 해체 이후에도 한동안 그 뒤를 좇았던 시경과 재하도 더이상 그들이 대한민국 왕실에 위협적인 존재가 아니라 판단을 내렸었다. 남자가 팔을 뻗어 시경의 오른쪽 손목을 쥐었다.
"이 손은 이제, 잘 움직이나?"
움켜쥔 손이 소름끼칠정도로 차가워 시경은 이를 악물었다. 손목을 타고 냉기가 흘러들어오는 것 같은 착각에 시경은 손이 굳는 것을 느꼈다. 시경의 표정을 유심히 관찰하던 남자의 입가에 비릿한 미소가 떠올랐다.
"궁금하지? 너만 여기 있는지, 이재하도 여기 있는지, 왕이 살았는지, 죽었는지. 지금 여기서 뭘 하고 있는지."
"너…!"
"참 안타까운 일이야, 은시경 소령. 구국의 영웅이라…"
남자가 시경의 셔츠 포켓에 꽂힌 신분증을 꺼내 뒷면을 보았다. 왕실 근위대 대대장임을 증명하는 신분증 뒤에는, 재신이 환하게 웃고 있는 사진이 꽂혀 있었다. 지킬 것이 많으면, 약해지는 법이지. 남자의 목소리가 날카롭게 시경의 귓속을 파고 들었다. 남자의 손가락이 사진 속 재신의 얼굴을 더듬자 시경의 어금니가 맞물려 짓이겨지는 소리가 났다.
"손대지마."
"넌 참 지킬게 많겠군. 나라도 지켜야 하고, 어딨을지도 모르는 왕과 왕비도 지켜야 하고, 고국에서 홀로 울고 있을 공주도 지켜야 할테니."
전혀 다른 온도를 품고 있는 남자와 시경의 눈이 다시 마주쳤다. 순간 등 뒤의 남자가 시경의 무릎 뒤를 발로 차 시경을 무릎 꿇렸다. 윽, 무릎뼈가 단단한 바닥에 부딪히며 시경이 낮게 신음을 흘렸다. 시경의 앞에 서서 허리를 숙인 남자가 시경의 귓가에 속삭였다.
"하나 알려주지. 내 목적이 뭔지. 파멸이야. 절대적인 파멸."
고개를 들어 남자를 보는 시경의 척추를 타고 오싹한 한기가 흘렀다.
_
홍작을 욕할게 아니었습니다 엔딩이 밀린다는게 무엇인지 스토리가 산으로 간다는게 무엇인지 체험하고 있습니다… 전개가 좀 느린 느낌인데, 다음편에는 진도를 팍팍 나가도록 노력하겠습니다.
_
이 에피소드를 쓰고 싶었던 최초의 계기가 되었던 장면이 이번 편에 있다. 재하의 집무실, 홀로 지독히 외로운 공주님.
_
28편에 이르러 드디어 김 소위와 서 중사의 풀네임이…! T▽T
여러번 말씀드렸지만 저는 이름짓기와 제목짓기가 제일 어렵습니다.
_
제본북에 대한 이정도로 많은 호응이 있을거라 전혀 예상하지 못해서 고민하고 있습니다.
조금만 더 생각하고 최종적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리고 어느새 15만힛! 도 감사드립니다♥_♥
_
GMF에 가시냐고 물어보신 분이 계셨죠. 제가 휴일이 없어서 T_T 어디선가 스쳤을 수도 있었을텐데 말이에요.
_
즐거운 주말 보내시고, 시험인 분들은 시험 화이팅! (비록 글 분위기는 이렇더라도 ㅇ<-<)
'Fic > 어느 근위대원의 날들' 카테고리의 다른 글
어느 근위대원의 날들 - 30 (78) | 2012.10.24 |
---|---|
어느 근위대원의 날들 - 29 (60) | 2012.10.22 |
어느 근위대원의 날들 - 27 (63) | 2012.10.17 |
어느 근위대원의 날들 - 26 (36) | 2012.10.12 |
어느 근위대원의 날들 - 25 (39) | 2012.10.0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