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서 중사는 오랜만에 예전의 꿈을 꾸었다. 그가 처음 근위대에 배속받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의 일이었다.
야간당직이었던 서 중사는 손전등을 들고 궁 안을 순찰하고 있었다. 실내 순찰을 끝내고 마지막으로 신궁 주차장을 돌 무렵 시간은 이미 자정에 가까워져 있었다. 드문드문 몇 대만 남아 있는 차들 사이사이를 손전등으로 비추던 서 중사의 시선에 움직이는 검은 그림자가 포착되었다. 누구야! 서 중사는 재빨리 손전등으로 그림자를 비추며 소릴 질렀다.
"…공주님?"
눈부셔요, 가냘픈 손으로 빛을 가리며 이 쪽을 쳐다보는 사람은 다름 아닌 공주님이었다. 서 중사는 황급히 공주의 얼굴을 정면으로 비추던 손전등을 끄고 공주를 향해 빠른 걸음으로 걸어갔다.
"죄송합니다, 공주님. 무단침입자인줄 알고."
"아니에요. 할 일 한건데요, 뭐."
재신이 웃어보였다. 허리를 꾸벅 숙이던 서 중사는 문득 지금 재신이 여기 있는 것이 이상하단 것을 깨달았다. 그런데 공주님, 여긴 왜… 말 끝을 흐리는 서 중사를 보며 재신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답답해서 그래요, 잠깐 산책이나 하려고… 궁에서 산책을 하기에 재신의 차림은 너무나 밖으로 나가는 차림이었다. 운동화, 가벼운 치마에 레깅스, 재킷까지. 어딜 봐도 궁 밖으로 나가려 하는 모습이기에 서 중사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재신의 앞에 서 있었다.
"이 시간에 나가시면 안되십니다, 공주님."
"알아요. 잠깐이니까, 그냥 못 본척 해주면 안되요?"
눈썹을 축 늘어뜨리며 부탁하는 공주를 외면하지 못하며 서 중사는 안절부절했다. 갓 들어온 근위대원은 공주를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아직 전혀 익숙해지지 않은 상태였다. 보내드려도 되는건지, 막아야 하는건지. 한참 서 중사의 눈을 쳐다보던 재신이 알았다는 듯 미소를 지어보였다.
"알겠어요. 그럼, 서 중사가 따라와요."
"…네?"
"야간순찰, 여기가 마지막이죠? 오래 안걸릴테니까 서 중사가 호위로 따라와요. 그럼 나가도 안 위험할거 아니에요. 먼 데 가는거 아니에요."
소매를 잡아끄는 손길에 서 중사는 얼떨결에 공주를 따라 나섰다. 가도 되는건지, 중대장님에게 보고해야 하는건지, 혼나지나 않을는지 머릿속이 엉망진창이었지만 바로 눈 앞에서 따라 오라고 하는 공주의 명을 차마 거역할 수가 없었다.
자정이 넘은 시간이라 거리엔 사람이 거의 없었다. 서 중사는 재신의 한 발 뒤에서 잔뜩 긴장한 채 뒤를 따랐다. 재신은 나풀나풀 걸어갔다. 하반신 마비였던 사람의 걸음걸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았다. 서 중사가 근위대에 들어왔을 무렵 이미 재신은 수술 후 재활까지 다 마친 상태였다. 경이로울 정도의 정신력이었다. 저렇게 잘 걷는다 해도 오래 걸으면 재신은 금방 피곤해 했다. 애시당초 공주가 오래 걸을 일이 없단 것이 천만다행이었다.
재신은 비탈길을 천천히 올랐다. 서 중사는 슬슬 공주의 다리가 걱정이 되었지만 감히 공주에게 말을 걸지 못하고 뒤를 지킬 뿐이었다. 재신은 조금씩 지쳐 보였지만 다리를 멈추진 않았다. 천천히, 아주 천천히 성곽에 도착할 때까지 계속 걸었다. 입고 온 자켓을 벗어 성벽에 깐 공주는 몇 번 낑낑거리며 발을 올리다 겨우 성벽에 걸터 앉았다.
"거기 잠깐만 서 있어 줄래요?"
"네."
"미안해요, 앉지도 못하게 하고."
나부낀 밤바람에 흩어진 옆머리를 귀 뒤로 넘긴 재신이 서 중사를 향해 미안한 얼굴을 했다. 아닙니다. 군기가 바짝 들어간 서 중사는 재신의 두 발 정도 아래에 정자세로 서 있었다. 편하게 서 있어요. 괜찮아요, 어차피 아무도 없으니까. 공주의 다정한 말에 서 중사는 약간 긴장을 풀고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촘촘하게 빛나는 불빛들이 아름답게 서울의 밤을 수놓고 있었다.
"여기 너무 예쁘죠?"
"네."
"앉으라고 하고 싶은데… 미안해요."
"아닙니다. 서 있는 것이 편합니다."
"나, 여기서 다른 사람하고 앉아 있으면 안될거 같아서."
"…네?"
아니에요, 못 들은걸로 해요. 재신의 시선이 서 중사에게서 비껴갔다. 오늘은 별이 안보이네요. 재신이 아득하게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아까까지만 해도 맑았던 하늘에 구름이 꼈는지 칠흑같이 어두운 밤하늘에는 별 하나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서 중사는 하늘을 보는 재신의 옆모습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반듯한 이마와 오똑한 코, 부드러워보이는 입술. 아름다운 공주님을 이렇게 가까이서 무방비하게 쳐다보는 것은 신입인 서 중사에게는 처음 있는 일이었다. 공주님은 정말 예뻤다. 사병 시절 위문공연을 왔던 소녀시대보다도, 휴가 나가 우연히 길에서 보았던 여자 탤런트보다도 더 예뻤다.
그런데 왜 공주님은, 저렇게 밤하늘처럼 끝이 없는 어둠을 눈동자 속에 품고 계시는걸까. 서 중사는 어쩐지 공주님의 옆모습이 슬펐다.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보는 것만으로 가슴 안 쪽이 저릿하게 아파왔다.
한참 아무 것도 없는 암흑을 응시하던 재신의 입술이 다시 열렸다.
"오늘, 별똥별이 떨어진다고 해서 보러 왔는데 아무래도 무리 같네요."
"날이 흐립니다. 별을 보시긴 힘들 것 같습니다, 공주님."
"그러게요. 아쉽네요. 서 중사는, 별똥별 떨어지면 무슨 소원 빌고 싶어요?"
"예?"
소원 빌잖아요, 별에. 재신이 장난스럽게 웃어보였다. 뭐, 여자친구 생겼으면 좋겠다? 그런거? 아님, 진급? 재신의 얼굴이 순간 진지해졌다. 아니면…
"국가 안보, 세계 평화. 뭐 그런거 빌어요?"
"…아무리 군인이라지만 그 정도는 아닙니다."
"난 군인은 다 그런줄 알았는데."
공주가 자신을 놀린다고 생각하고 고개를 든 서 중사의 얼굴이 굳었다. 재신은 전혀 자신을 놀리는 표정이 아니었다. 서 중사는 처음 보는 공주의 얼굴에 할 말을 잃었다. 금방이라도 바스라질 것 같이 위태롭고, 지금 당장 어디론가 사라진다 해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은 얼굴이었다. 바르르 떨리던 재신의 입술이 희미하게 호를 그렸다. 숨이 턱 막혀왔다. 구름 속에 감추어진 별조차 꿰뚫어 볼 것 같은 눈으로 재신은 다시 고개를 들었다.
"별, 안보이네요. 구름에 가리면 그만인가봐요. 아무리 빛나도 보이질 않으니."
이만 내려가요. 조심스럽게 재신이 성벽에서 내려오고 자켓을 챙겼다. 오늘 내가 여기 왔다고, 아무한테도 말하지 말아줘요. 오빠나 염 대위한테도. 나랑 나왔다고 말하는건 괜찮은데 여기 왔다는건 안되요. 아마 안 좋아할테니까. 공주의 말에 서 중사는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이상했다. 공주의 그 눈동자에 감각신경의 끝을 지그시 꾹, 눌리는 것처럼 희미한 아픔이 계속 느껴졌다. 왜 그런 얼굴을 하고 계신건지. 누가, 무엇이 공주님을 저렇게… 슬프게 만드는 것인지.
"이건, 아무한테도 말하지 말아요."
"네… 네?"
"대답해요. 명령이에요."
"네, 말하지 않겠습니다."
"나, 정말 많이 좋아했어요. …지금도 여전히, 좋아해요."
서 중사는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하고 눈만 깜빡거렸다.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서 중사의 얼굴을 한 번 본 재신이 미안하다는 듯 웃었다. 내가 별 말을 다 하네요. 신입한테. …별, 보이지 않네요. 그렇게나 반짝반짝했는데. 어딘가 자조적인 말투로 말을 이은 재신이 그 자리에 앉아 신발끈을 고쳐 묶기 시작했다. 끈을 매는데 집중하고 있는 공주의 앞에 서서 기다리던 서 중사의 눈에, 순간 구름과 구름 사이로 길게 꼬리를 그리며 떨어지는 빛이 보였다. …아. 서 중사의 입에서 짧은 탄성이 흘렀다.
그 순간 서 중사는 자신도 모르게 눈을 감고 소원을 빌었다.
공주님이 가진 어둠이 무엇이든, 다시 빛나게 되길.
공주님의 별이 다시 빛나게 되길.
궁으로 돌아온 서 중사는 바로 중대장 염동하 대위에게 불려갔다. 너 순찰 돌다 말고 어딜 싸돌아다녀? 확 그냥, 신입이 빠져가지고! 크게 화를 내는 염 대위에게 서 중사는 그게, 공주님께서 나가신다고 해서… 말을 제대로 잇지 못하고 얼버무렸다. 공주님, 이라는 말에 꾸중을 멈춘 염 대위가 못마땅한 얼굴로 서 중사를 보다 탁 터뜨리듯 한숨을 뱉었다. 들어가봐. 네? 들어가보라고. 알았으니까. 뒤돌아 들어가는 중대장님의 어깨가 어쩐지 좀 쳐진 것 같았다. 이상한 밤이었다.
벌써 꽤나 전의 일이 꿈에 나오자 서 중사는 새벽에 잠을 설쳤다. 잠에서 덜 깬 얼굴로 방에서 나온 서 중사는 씻지도 않고 컴퓨터 앞에 몰려 있는 근위대원들을 발견하고 그 쪽으로 발을 질질 끌며 옮겼다.
"왜 이리 아침부터 여기 붙어 계십니까들?"
"이거 봐, 대박."
"이럴줄 알았어."
"그러게 조심 좀 하시지."
근위대원들이 잔뜩 모여 보고 있는 것은 인터넷 기사의 사진이었다. 노이즈가 잔뜩 낀 사진에 그들의 공주님과 대대장이 찍혀 있었다. 「이재신 공주-은시경 소령, 열애 발각」「구국의 영웅, 공주와 맺어지다」「'잠기지 않는 마음의 문이 있다'던 공주가 기다린 남자는, 은시경 소령?」 각종 자극적인 타이틀 사이에서 서 중사의 시선은 사진에 고정되었다. 어두운 밤, 성곽에 나란히 앉아 있는 연인의 뒷모습. 누가 봐도 한 사람은 공주님이고 다른 한 사람은 은시경 소령이다. 공주님의 가냘픈 목이 살며시 은시경 소령의 반듯한 어깨에 기대어져 있다. 닿을 듯 말 듯, 두 사람의 손가락이 겹쳐져 있다. 마음이 간질간질해져온다. 서 중사는 그제야 어젯밤의 꿈을 다시 떠올렸다.
「나, 여기서 다른 사람하고 앉아 있으면 안될거 같아서.」
「난 군인은 다 그런줄 알았는데.」
「나, 정말 많이 좋아했어요. …지금도 여전히, 좋아해요.」
소령님이었구나.
눈부신 공주님의 별이 빛날 수 있도록 감싸안아주었던 그 밤하늘이.
어젯밤은 티 없이 맑았다. 궁에서도 무수히 많은 별을 볼 수 있을 정도였으니. 틀림없이 성곽에서는 더 잘 보였을 것이다. 어쩌면 또다른 소원을 담을 별똥별이 떨어졌을지도 모르겠다. 서 중사는 괜히 눈가가 시큰거리는 것 같아 김 소위의 어깨에 걸쳐진 수건을 집어들며 욕실을 향했다.
아무래도 오늘은 대대장님께 커피라도 한 잔 얻어마셔야겠다.
자신이 별에 소원을 빈 덕분에, 그 소원이 이루어졌으니.
17.
"은시경씨, 은시경씨!"
"네, 공주님. 뛰지 마세요. 다치십니다."
치맛자락을 팔랑이며 뛰어오는 재신을 시경이 부드럽게 감싸 붙든다. 재신의 미소가 햇살을 받아 환하게 피어난다. 그 미소를 바라보는 시경의 눈가도 다정하게 물들었다. 지금 출발해요? 네, 지금 출발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재신을 에스코트 해 차에 태운 시경이 서 중사에게 눈짓을 한다. 가자, 네. 대대장님.
서 중사는 그가 지켜야 할 공주님과 모셔야 할 상관을 보며 새삼 깨닫는다.
칠흙같이 어두운 밤하늘일수록 그 별이 더 빛나는 것을.
밤하늘이 없으면 별도 빛나지 않는다는 것을.
그렇게 함께 있을 때, 가장 아름답다는 것을.
공주와 기사는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오래도록, 영원히.
또 만나요.
감사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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