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메모장에 글을 쓰는 편인데 (예전엔 워드패드에 썼는데 요샌 워드패드마저 너무 세련되어져서 부담이 T_T) 요즘은 한글 2010과 친합니다… 너란 워드프로세서 부담스러워. 제본 때까지만 만나 우리. 정초의 헛소리였습니다.
너무 오래 글을 안 올린 것 같아서, 무언가 올려드리고 싶은데 완성한게 하나도 없고 T▽T 덧글로 간혹 궁금해하셨던 메모에 있으나 사라진 에피소드들을 가지고 와보았습니다. 쓰기 시작했을 때와 달리 점점 안드로메다로 가서 결국 조각 수준에서 멈추어야 했던 으하하. 결국 은소령의 동창이라든가 공주님의 새 비서는 다른 형태로 들어가게 되었었네요.
마무리를 못 지을 것 같았는데 지금 다시 읽어보니 일부는 끝을 내어 제본에 넣는 것도 괜찮단 생각도 듭니다 :)
"A팀은 들어가서 보안조사 먼저 하고 B팀은 나와 함께 공주님 모시고 들어간다. 사람들 너무 가까이 오지 못하게 하고, 그렇다고 거칠게 하진 말고 카메라나 휴대폰까지 뺏진 마."
재신을 태운 차가 공연장에 가까워져오자 시경이 무전기를 통해 다시 한 번 경호계획을 전달한다. 재신이 약혼식 후 처음으로 대중들 앞에 모습을 드러내는 공식행사라 시경은 바짝 긴장한 상태였다. 약혼식 후 재신은 열흘 남짓 공식행사 없이 궁에 머물렀다. 종친회에 인사도 올리고 결혼까지 준비해야할 일들의 일정도 정리할 겸 재신이 외부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동안 약혼식 영상은 온 인터넷을 돌아다니며 가뜩이나 아이돌같은 공주의 인기를 하늘로 더 치솟게 했다. 때문에 시경은 가뜩이나 사람이 많은 밴드 서바이벌 오디션 프로그램의 특별심사위원을 맡은 재신이 여간 걱정이 아니었다.
"꺅! 공주님!!!"
"공주님!! 여기 좀 봐주세요!!!!!"
"어? 부마님이다! 같이 왔나봐!"
"완전 멋있어!!"
"소령님!! 공주님이랑 같이 왔어요??"
"대박! 공주님이랑 소령님이랑 같이 왔어!"
단지 문제는 시경이 자신의 인기도 같이 수직상승했다는걸 전혀 자각 못하고 있었다는 점이었다. 물론 약혼 이전에도 재신과 같이 나오면 종종 시경도 사진을 찍히거나 했지만 지금 이정도는 아니었다. 차에서 내리자마자 자신을 향하는 시민들과 기자들의 수많은 카메라를 보고 굳은 시경의 옆에서 재신이 쿡쿡 웃었다.
"와, 은시경씨 인기 많네. 나보다 은시경씨를 더 찍고 있어."
"…들어가시죠."
"왜, 있어봐요. 사람들 아직 사진 찍잖아. 시간 아직 여유 있지 않아요? 손도 흔들어주고 그러는거야."
저는 됐습니다. 사람들을 향해 방긋방긋 웃으며 손을 흔들어주는 재신을 보는 시경의 얼굴이 복잡했다. 재신이나 재하가 사람들을 향해 환하게 웃으며 손을 흔드는 장면은 봐도봐도 신기했다. 어떻게 저런게 가능한건지. 그보다 더 신기한건 마치 언제 군인이었냐는 듯 금방 적응한 항아였다. 아마 자신은 결혼해도 영원히 그런건 불가능할 것만 같았다. 지금 이대로가 편한데 결혼 해서도 그냥 근위대로 있으면 안되는걸까, 부질없는 고민을 하며 시경은 근위대원들이 사람들을 통제하는 동안 재신을 건물 안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대기실 방문 먼저 하고 그 다음에 녹화죠?"
"네. 녹화까지 한시간 남았고 출연 밴드들은 모두 대형 대기실에서 대기하고 있습니다."
"응, 그럼 메이크업 정리 끝나는대로 바로 가요."
간단한 메이크업 수정을 마친 재신이 대기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삼삼오오 모여 대화를 나누거나 연습을 하고 있던 밴드들이 우워어어! 하고 괴성을 지른다. 오늘 특별 심사위원이 온다는 것은 알려져 있지만 오디션 프로 특성상 그것이 공주라는 것은 출연자들에게 비밀에 부쳐져 있었다. 와, 안녕하세요. 환하게 웃으며 재신이 한 팀 한 팀 인사를 나눈다. 여름에 나온 싱글 완전 좋았어요. 어, 나 사인 받아도 되나? 어? 지난달에 심야 음악방송 나왔었죠? 나 그거 봤는데. 라디오 왜 그만뒀어요? 에이, 공주가 라디오를 왜 안들어요! 공주도 귀 있는데! 하나하나 성심성의껏 준비해와 대화를 나누는 재신을 보며 시경은 다시 한 번 그녀에게 감탄했다. 문가에 서서 재신을 지켜보고 있던 시경의 시선에 익숙한 사람들이 눈에 띄었다. 어? 자신도 모르게 튀어나온 목소리에 그 쪽도 시경을 돌아본다.
"어? 시경이 아냐?"
"어? 야, 은시경! 오랜만이다!"
시경과 비슷한 또래로 보이는 밴드가 자리에서 일어나 시경에게 걸어간다. 와, 정말 오랜만이다. 은시경 완전 유명인사 됐어. 투박하게 안아오는 손길들에 시경도 모처럼 얼굴이 환하다. 아직도 밴드 하는거야? 야, 우리 요새 직장인 밴드 중에선 유명해. 서로 아는 사이인 듯한 모습에 다른 밴드와 인사를 마친 재신이 종종 걸어와 호기심 어린 얼굴을 한다.
"은시경씨랑 아는 사이에요?"
"아, 고등학교 친구들입니다."
"우와, 진짜?"
"이야, 시경이가 이렇게 유명해질줄이야."
"나라 구한 영웅 아냐 영웅."
"구국의 영웅, 공주의 기사, 뭐 요새 완전."
"그만 해, 그만."
어깨를 툭툭 두드리며 한마디씩 하는 옛 친구들에 시경이 귀를 붉힌다. 시경의 주변인이라고 해봐야 근위대원들밖에 본 적 없는 재신은 낯선 사람들과 어울려 있는 시경의 모습이 신선해 오랜만에 만나 회포를 푸는 옛 친구들의 모습에서 눈을 떼질 못했다. 곧 본방입니다! 대기실 문을 열고 들어온 조연출의 공지에 재신의 수행원들이 재신을 모시러 들어오고 시경도 친구들을 뒤로 하고 재신을 따랐다. 잘해라, 화이팅. 시경이 씩 웃으며 기타를 챙기는 친구의 팔을 툭 치자 친구들이 엄지 손가락을 번쩍 들어보인다.
"은시경씨한테 저런 친구들이 다 있었어요?"
"저도 고등학교 때는 기타 배운다고 돌아다니고 했으니까요."
"우와, 반항기?"
"굳이 따지자면요. 소심한 반항기였지만."
"난 고등학교 때부터 월담해서 홍대에 공연 갔는데."
"압니다. 당시 대대장님이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셨다고."
"지금 나 욕한거죠."
"제가 왜 공주님을 욕해요."
이상한데, 요새 은시경씨 꼬박꼬박 나한테 은근히. …뭐, 따지고 보면 처음 만났을 때부터 한마디도 안 지긴 했지. 영 미심쩍다는 얼굴로 고개를 갸웃거리던 재신이 스튜디오로 들어섰다. 방청객의 뜨거운 환영을 받으며 심사위원석에 앉은 재신은 녹화 내내 무대마다 같이 웃고 즐기고 예리한 심사를 했다. 시경의 친구들은 우승은 아니었지만 무난히 다음 회에 진출했다. 녹화가 끝나고 스튜디오에서 나오는 재신에게 시경의 친구들이 다가와 인사를 한다.
"감사합니다, 공주님!"
"고맙긴요, 좋은 무대 봐서 내가 더 고맙죠. TV로 볼테니까 앞으로도 힘내주세요."
"공주님, 차량 준비되었습니다."
"어, 어. 좀 천천히 가요. 시경씨 친구들하고 오랜만인데 인사도 좀 하고 그러지."
"공주님 모셔다 드리고 전하 만찬장에 가봐야 합니다."
"응? 오빠 저녁 만찬은 1중대에서 경호한다고 들었는데?"
"아니요, 경호 때문에 가는게 아니라…"
…아. 재신이 고개를 끄덕였다. 항아도 약혼 후부터 국왕의 파트너로서 대우를 받고 공식 석상에 나서기 시작했다. 시경도 재하가 예비 부마로서 얼굴을 비추게 하기 시작한 것이다. 뭐야, 그런거면 나한테 먼저 말을 해야지. 내 남편감을 자기 맘대로. 입술을 비죽이던 재신이 이내 웃으며 발걸음을 옮겼다. 미안하다, 내가 바빠서 인사도 제대로 못하고. 야, 뭐. 그런거지. 수고해라. 다음에 술이나 거하게 사고. 농담 섞인 말에 시경도 웃으며 답을 하고는 재신의 뒤로 걸어갈 무렵 멤버 중 한 명이 뒤에서 시경에게 소리를 질렀다.
"야, 은시경! 너 소영이한테 연락 좀 해라! 걔가 너 죽었다고 했을 때 얼마나 운지 아냐?"
"야야, 그런 얘길 이제와서 장가가는 애한테 왜 해? 그것도 공주님이랑 결혼하는 애한테."
"아 뭐, 다 지난 얘긴데."
등 뒤에서 투닥거리는 소리에 재신의 귀가 쫑긋 선다. 재신의 온 신경이 뒤쪽으로 곤두선 것도 모르고 시경은 이어폰으로 바깥 상황을 보고 받는데 열중하고 있다. 시경의 주변에서 처음 듣는 여자의 이름이다.
"어, 왔어?"
시경을 필두로 한 공주의 전담호위들이 재하의 집무실로 들어서자 한 남자와 서 있던 재하가 손을 들어 인사를 했다. 절도 있게 경례를 붙인 근위대는 문가에 서 있고 시경만이 재하에게 가까이 갔다.
"부르셨습니까?"
"어, 불렀어. 내가 전에 재신이한테 수행비서 한 명 붙여야겠다고 했잖아, 재신이 요즘 너무 바빠져서. 그래서 한 명 뽑았는데 오늘부터 출근이야. 수행비서면 재신이랑 계속 같이 다녀야 하니까 먼저 인사 좀 시키고 재신이한테 데려다주라고."
"알겠습니다."
공식 일정이 부쩍 많아지고 벌여놓은 사업도 커지고 있는 재신은 줄곧 그때그때 도움을 받아가며 일을 하고 있었지만 그것도 한계에 다다른 참이었다. 재신이한테 비서 좀 붙여야겠어, 재신이 너무 바빠. 재하에게 이미 지나가듯 말을 들은 적이 있는 시경은 동요 없이 남자 쪽으로 돌아섰다.
"근위대 대대장 은시경입니다. …아."
"조민규입니다. 이거, 이런데서 만날 줄은."
"뭐야, 둘이 아는 사이야?"
구면인 듯한 모습에 재하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둘을 쳐다보았다. 제가 처음엔 육사에 들어갔었거든요. 적성에 안맞아서 자퇴하고 다른 대학 들어갔습니다. 육사 나와 그대로 군인이 되었으면 은시경 소령과 동기입니다. 민규의 설명에 동의하는 듯 시경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궁의 일은 처음이라 긴장했는데 아는 얼굴이 있으니 반갑네요. 하하, 존댓말도 어색하고. 아무튼 앞으로 자주 볼텐데, 잘 부탁합니다. 민규의 손을 물끄러미 보던 시경은 군더더기 없는 동작으로 그 손을 마주잡아 악수를 했다. 시경의 검은 눈동자는 생각을 읽을 수 없는 묘한 빛을 띠고 있었다.
"앞으로 자주 볼텐데 아는 사이라니 잘됐네. 은시경 니가 재신이한테 좀 데려다 줘. 재신이 내실에 있어. 내가 전화 넣어 놓을테니까."
"알겠습니다."
재하에게 경례를 붙인 시경이 집무실을 빠져나왔다. 공주궁을 향하는 복도를 시경과 민규가 나란히 걷고, 그 뒤를 근위대원들이 따르고 있었다. 서 중사는 한 발 앞에서 걷고 있는 두 남자 사이의 묘한 긴장감에 슬며시 눈치를 보았다. 그것은 서 중사만이 느끼는 것이 아닌듯 같이 걷고 있는 근위대원들 모두 공기가 술렁이고 있었다.
"십년은 족히 못본거 같습니다. 궁에 들어오면 볼거라고 생각은 했지만 이렇게 첫날부터 마주칠줄이야."
살갑게 말을 거는 민규에게 눈길도 주지 않은 채 시경은 앞만 보고 걸었다. 그런 시경을 흘끔 쳐다본 민규의 눈썹이 슬그머니 올라갔다 내려왔다. 긴 복도를 지나 공주궁에 접어들자 공주궁의 궁인들이 시경과 근위대를 보고 익숙하게 인사를 했다. 문이 닫힌 내실 앞에 도착한 시경이 발을 멈추자 모두가 따라서 발을 멈추었다.
"이쪽이 공주님 계신 내실입니다. 공주님께서 궁에 계실 땐 특별한 일이 없는 한 내실에 계십니다."
"아, 그렇군요."
"내실은 공주님 허락 없이는 출입이 금지되어 있습니다. 또한 공주궁은 기본적으로 용무나 허락 없이는 남자들은 출입하지 않도록 되어 있으니 주의해주시죠."
딱딱한 목소리로 용건을 말하는 시경에게서 눈을 돌린 민규가 주변을 둘러보았다. 고풍스러운 복도와 우아한 인테리어, 그와 안어울리는 듯 하면서도 묘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벽에 걸린 현대미술 작품들이며 꽃병에 가득 꽂힌 작약과 장미는 다 재신의 취향이었다. 휘유. 인테리어 죽이네요. 역시 공주궁인가. 민규가 다소 경박해보이는 감상을 말했다.
홍대를 누비고 하드한 록을 부르는 재신이었지만 공주는 그와 동시에 사람들이 공주에게 바라는 클래식한 취향도 전부 갖추고 있었다. 벽에 걸린 작품들은 재신이 직접 고른 것들로 실력은 출중하지만 아직 알려지지 않은 작가들의 것이 많았다. 그 중 더러는 공주의 선택을 받았다는 것이 알려지면서 후에 유명세를 타기도 했다. 드레스를 입으면 더없이 고전적인 미를 발산하고 펑키한 미니스커트를 입으면 여자 연예인보다 더 섹시한 재신 그 자신만큼이나 재신의 취향 역시 자유롭고 폭이 넓었다. 어떤 편견에도 얽매이지 않고 그 자체만을 보는 재신의 안목이야말로 재신을 진정한 왕족으로 보이게 한다는 것을 이제는 모두가 잘 알고 있었다.
그런 민규를 탐탁지 않은 눈으로 보던 시경이 문을 가볍게 노크하자 안에서 들어와요, 하고 재신의 낭랑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문을 열자 소파에 기대어 앉아 책을 읽고 있던 재신이 시경을 보고 반갑게 일어섰다.
"왔어요?"
재신은 어두운색의 긴 원피스 차림에 그와 어울리는 머리띠를 하고 있었다. 궁 안에 있을 때의 재신의 차림은 밖에 나갈 때보다 더 여성스럽고 부드러운 스타일들이 많아 서 중사는 가녀린 공주님의 청순미를 극대화한 실내복 차림을 볼 때면 괜히 더 가슴이 두근거리곤 했다. 희미한 미소를 띠고 재신에게 경례를 붙인 시경이 새로운 수행비서입니다. 전하께 연락 받으셨겠지만, 하고 운을 떼었다. 시경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성큼 민규가 재신의 앞으로 나섰다.
"조민규입니다. 부족하지만 앞으로 공주님의 비서를 맡게 되었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오빠에게 연락 받았어요. 이재신이에요. 아주 유능하고 똑똑하신 분이라고 들었는데 앞으로 많이 도와주세요."
재신이 민규에게 손을 내밀자 그 손을 잡은 민규가 그대로 허리를 숙여 재신의 손등에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시경의 어깨가 순간 움찔했다. 민규의 손에서 손을 빼낸 재신이 까르르 웃었다. 재밌는 사람이네. 밝게 웃는 재신의 눈꼬리가 살포시 접혔다. 오늘은 아무 일정 없으니 쉬셔도 좋아요. 궁 안 구경도 좀 하시구요. 미소띤 얼굴로 재신이 말을 잇자 민규, 근위대, 시경 모두 허리를 숙여 인사를 하고 나갈 채비를 했다. 아, 은시경씨. 돌아 나가려는 시경을 재신이 불렀다.
"은시경씨는 별 일 없으면 나랑 차나 한 잔 마셔요."
중국 대사에게 선물로 들어온 차가 있는데 향이 좋아요. 배시시 웃어보이는 재신을 보고 시경이 근위대원들에게 눈짓을 했다. 내실을 나서는 민규와 시경의 눈이 순간 마주쳤다. 민규의 입꼬리가 슬몃 올라감과 동시에 시경의 입술이 딱딱하게 다물렸다. 찰나가 지나가고 닫힌 문을 확인한 시경이 소파로 걸어오자 차를 두 잔 우려낸 재신이 시경의 옆에 바짝 붙어 앉았다. 폭 기대어오는 재신의 어깨를 시경이 조심스럽게 감쌌다.
"바쁜데 잡은거 아니에요?"
"괜찮습니다."
"너무 다들 보는 앞에서 잡았나?"
"어차피 다들 아는데요 뭐."
예쁘게 웃는 재신의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는 시경의 표정이 그다지 좋지 않은 것을 안 재신이 시경을 올려다보았다. 왜 그래요? …아닙니다. 즉각 반응할 타이밍을 놓친 시경의 짧은 침묵은 무언가가 있다는 것을 반증한 것이나 다름이 없어졌다. 자세를 고쳐 앉은 재신이 시경의 두 뺨에 손을 얹어 자신을 똑바로 보게 했다.
"왜 그래요, 뭐 숨기는 거 있어요?"
"아닙니다."
"나 은시경씨가 거짓말하는거 제일 싫어하는거 알죠? 나중에 화나게 만들지 말고 지금 말해요. …조 비서님 때문에 그래요?"
혹시나 해서 붙여본 말에 시경이 움찔하자 눈을 깜빡이던 재신이 포르르 한숨을 쉬었다. 아, 이 남자 정말 귀여워서 어쩌지. 몸을 일으켜 앉은 재신이 여전히 미묘하게 굳은 얼굴을 하고 있는 시경의 뺨에 촉, 입을 맞추었다.
"조 비서님 별로에요? 아님 남자라 그래요?"
"…딱히 그런건 아닙니다."
"근데 우리 대대장님 뭐가 마음에 안드셔서 그래요. 아까 내 손등에 뽀뽀해서 그래요?"
순간 시경의 눈썹이 확 치켜올라갔다. 재신의 오른손을 깍지껴 쥔 시경이 엄지손가락으로 민규의 입술이 닿았던 부분을 지우듯 쓸었다. 그리고는 그대로 그 위에 입술을 대었다. 살갗에 닿아오는 시경의 입술이 뜨거워 움찔 어깨를 움츠리면서도 재신은 시경을 막지 않았다. …그 사람은 재밌으세요? 손등에 입술을 댄 채로 말하는 시경의 목소리가 피부를 타고 울렸다.
"재미?"
"재밌는 사람이네. 그러셨잖아요."
"재밌잖아요. 요새 세상에 공주한테 그렇게 인사하는 사람이 어딨어요, 중세시대도 아니고."
"저한텐 재미 없다고 하셨잖아요."
"응?"
"저한텐, 처음 만났을 때 재미 없다고."
입술만 달싹이던 재신이 결국 웃음을 터뜨린다. 유리구슬이 굴러가는 것 같은 목소리로 웃는 재신을 약간 귀 끝이 붉어진 채 보던 시경이 재신이 못보도록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은시경씨. 시경의 목에 팔을 쭉 감은 재신이 시경의 귓가에 입술을 바짝 대고 속삭였다. 훅 끼쳐오는 재신의 향기에 시경의 눈가가 어질했다.
"그 사람 재밌긴 했는데, 은시경씨 모르는구나? 난 재미없는 남자가 이상형이라서."
조 비서님 유능한 사람이래요. 나 비서 필요하니까, 신경쓰이게 안할게요. 미안해요. 응? 애교스럽게 눈을 깜빡이는 재신의 허리를 시경이 끌어안았다. 목덜미에 입술을 묻고 흠뻑 숨을 들이키자 재신의 달콤한 향기가 폐부를 가득 채웠다. 세상에 이렇게 사랑스러운 여자가 또 있을까. 재신은 누구에게도 아쉬운 소리를 할 필요가 없는 사람이었다. 재신은 공주였다. 그 태생만으로도 고귀한 공주. 물론 재신은 절대 사람들에게 막 대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 존재만으로 특별한 아름다운 공주가 자신의 앞에선 여자가 되어 자신의 기분을 살피고 눈치를 보고 애교를 부리는 것은 시경에게 묘한 짜릿함을 안겨주었다. 쾌감이기도 했고, 소유욕이기도 했고, 지배욕이기도 했다. 사랑하고 존경하는 공주에게 이런 감정을 가지면 안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시경의 내면에서 컨트롤할 수 없는 욕망이 불쑥불쑥 올라오곤 했다.
"너무 가까이 하지 마세요."
"걱정 말라니까요."
재신의 눈을 물끄러미 보던 시경은 그대로 다시 재신을 품에 안았다. 재신이 보지 못하도록 얼굴을 돌린 채 눈을 감은 시경의 표정이 복잡했다. 재신의 손등에 닿던 비서의 입술. 그리고. 시경은 어금니를 꽉 물었다. 그냥 기우였으면. 차라리 그냥 자신의 못난 질투심 정도로 넘어갈 수 있는 것이었으면.
「은시경씨!!! 은시경씨!!!」
탕, 하는 총성과 함께 재신의 눈 앞에서 시경의 몸이 무너졌다. 근위대의 발소리와 재하의 고함이 재신의 귓가를 어지럽힌다. 재신은 새파랗게 질린 채 공중으로 솟구쳐 붉은 꽃처럼 흩어지는 시경의 피를 바라보았다. 손을 뻗어 시경에게 다가가려 했지만 재신은 한 발짝도 움직일 수 없었다. 재신은 허리 아래로 아무런 감각이 없음을 깨달았다. 재신의 입술이 바들바들 떨려왔다. 재신은 천천히 고개를 숙여 자신의 다리를 바라보았다. 무력하게 휠체어 위에 얹어져, 발목이 꺾여 있는 자신의 다리를.
"하아… 하아…"
눈을 번쩍 뜬 재신은 급하게 숨을 몰아쉬었다. 바로 전까지 눈 앞에 보였던 광경이 끔찍한 악몽임을 깨닫자 비로소 재신은 가슴을 쓸어내렸다. 꿈이었구나. 봉구의 손에 들려 있던 총, 시경의 가슴을 관통하던 총알, 꿈 속의 일이 현실인듯 생생했다. 재신은 여전히 세게 뛰고 있는 심장을 꾹, 눌렀다. 이런 악몽을 꾸는 것은 오랜만이었다. 사고가 나고 불안정했던 때나 기억을 되찾고 시경을 잃은 후 한동안은 하루가 멀다 하고 악몽을 꾸었지만 시경이 돌아온 후로는 완전한 안정을 되찾았던, 아니 되찾았다고 생각했던 재신이었다. 재신은 온 몸을 덮쳐오는 오한에 몸을 바르르 떨었다. 왜 이러지, 나.
"아침 먹으러 가야 하는데… 늦겠다."
협탁 위의 시계를 보고 급하게 자리에서 일어나려던 재신의 몸이 딱딱하게 굳었다. …어? 재신의 눈동자가 순간 탁해졌다.
"재신이 얘는 왜 이렇게 늦어? 은시경, 얘 일어났어?"
"일어나셨다는 기별은 아직 받지 못했습니다."
"냅둬, 피곤한가보다. 어제 행사에서 늦게 왔잖아."
"아니 뭐 난 안 피곤해?"
"제가 모시러 가보겠습니다."
"괜찮아요, 은시경씨. 재신이 피곤한가봐. 자게 둬요."
식탁에 마주 앉은 영선과 재하, 항아, 그리고 시경이 먼저 먹자는 영선의 말에 숟가락을 들었다. 은시경씨도 이리 앉아요. 아침 안 먹었죠? 재하의 수행을 위해 아침 일찍 온 시경에게 자리를 권하는 대비의 권유를 극구 사양하던 시경이었지만 결국 자리에 앉은 참이었다. 평소 늦잠을 자는 일이 거의 없는 재신이었기에 시경은 온 신경이 휴대폰에 쏠려 있었다. 어디 아프신가. 밥이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도 모르게 밥알을 씹고 있을 무렵 항아의 휴대폰이 울렸다. …응? 아가씨디요. 액정을 보며 고개를 갸웃하던 항아가 전화를 받았다.
"왜 안내려 오고 있디요? 어데 안 좋슴미까?"
-언니…
수화기 너머 재신의 목소리가 덜덜 떨려온다. 울음기 가득한 목소리에 단박에 항아의 눈이 커진다. 왜 그럽네까, 무슨 일 있디? 내래 지금 가겠습네다. 숟가락을 내려 놓고 바로 자리에서 일어나는 항아를 재하와 영선이 놀라 올려다본다. 왜 그래, 재신이 무슨 일 있어? 재하의 물음에 항아가 급하게 말을 이었다. 말씀을 안합네다. 목소리가 혼이 빠져서래… 가봐야겠슴미다. 항아보다 더 새파랗게 질린 시경이 급하게 따라 일어선다.
"저도."
"여기 있으시라요. 아가씨가 은시경동지 절대 데리고 오지 말라 했슴미다."
"어떻게 그런,"
"일없습네다. 내래 다녀오갔시요."
시경을 뒤로 하고 항아는 재빠른 걸음으로 공주궁을 향했다. 재신의 침실이 있는 내실 가까이 가자 닫힌 문 앞에서 전담궁인들이 안절부절 못하고 있었다. 공주님이 절대 들어오지 말라셔서. 거의 울 것 같은 표정들의 궁인들을 보고 항아가 숨을 한 번 크게 들이켰다. 닫힌 문 너머로 이상하리만치 강한 긴장감이 항아의 전신을 감쌌다. 항아는 노크를 두 번 하고 재빨리 문을 열었다. 몸을 들이자마자 다시 문을 닫고, 재신을 본 항아의 눈이 커졌다.
"이기 무슨 일입네까?"
"어, 언니…"
눈물범벅이 된 얼굴로 재신이 망연자실하게 일어난 모습 그대로 침대에 앉아 있었다. 두 뺨과 턱까지 눈물로 가득 젖어 있고 전신은 바들바들 떨리고 있었다. 항아는 재빨리 달려가 재신의 어깨를 붙들었다.
"언니… 다리가… 다리가…"
다리가 안 움직여요, 언니. 말을 겨우 이은 재신의 동공이 풀릴 듯 했다. 재신은 거의 이성을 잃은 듯 보였다. 어, 어떡해요. 나. 다리가… 다리가… 쓰러질 듯한 재신의 몸을 항아가 붙들었다. 이거이 무슨 일이래. 재신의 폭탄같은 말에 항아도 머릿속이 새하얗게 비워졌다.
"외상 후 스트레스 증후군입니다. 쉽게 말하면 트라우마입니다. 전쟁 겪은 군인들이 전쟁이 끝난 한참 후에도 폭격 소리 같은 환청을 듣거나, 부상당했던 부위가 계속 아프다고 느끼는 것과 비슷한 겁니다. 공주님의 다리는 의학적으로는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단지 공주님의 트라우마가 다리가 움직이지 않는다고 느끼게 하는겁니다."
급히 입궁한 왕실주치의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큰 사고를 겪은 사람에게는 흔히 나타나는 증상입니다. 공주님이 문제가 있으신건 아닙니다. 좀 쉬시고 안정을 되찾으시면 다리는 금방 다시 움직이실 수 있으실겁니다. 안정제와 수면제를 좀 처방해드릴테니 휴식을 충분히 취하십시오. 의사의 설명에 항아는 안도를 느꼈다. 항아도 군관 시절 비슷한 증상을 겪는 군인들을 여럿 보았다. 확실히 드문 증상은 아니고, 오히려 훈련받은 군인도 아닌 평범한 젊은 여자로서 지금까지 잘 버텨온 재신이 대단할 정도였다. 정말 다리에 문제가 있는 것이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아니라니 그것만으로도 한시름을 놓을 수 있었다.
주치의가 나가자마자 재하와 영선, 그리고 시경이 방으로 들어왔다. 재신아, 재신을 부르던 재하의 목소리가 손등에 링겔 바늘을 꽂은채 잠들어 있는 재신을 보자 사그라들었다. 그 사이 얼마나 놀라고 울었는지 재신의 눈가는 실핏줄이 터져 있었고 눈물이 말라붙은 두 뺨은 까슬했다. 시경의 떨리는 손 끝이 재신의 뺨에 닿았다 떨어졌다. 총에 맞았던 자리가 욱씬, 아파오는 듯 했다.
은소령의 고등학교 동창 이야기는 너무 여러방향으로 생각하다 갈피를 못 잡았었다. 혼자만 썸탄다고 착각했던 (시경은 아무 생각 없음) 여동창의 이야기라든가, 기타 메고 소심한 반항 했던 고등학생 시경이라든가.
비서 이야기의 경우 클리셰를 잔뜩 넣어 저 비서가 처음부터 노리고 들어와 자신의 출세를 위해 이렇게저렇게 공주님을 이용하려 공주님에게 이렇게저렇게 하려는데 육사 시절부터 그의 그런 성격을 알아서 경계하고 있던 은소령이 공주님을 구해준다는 그런 이야기를 하려 했었던.
본편에서도 몇 번 스쳐 쓰기만 한 '컨디션이 안좋으면 다리가 잘 안 움직이는' 공주님에 대해 쓰려고 했었다. 다리가 좀 저리거나 잘 안 움직이는 정도는 있었어도 아예 그 때처럼 감각이 없어진건 수술 이후 처음이라 패닉에 빠진 공주님.
지금 다시 보니 이 중 일부는 다듬고 끝을 맺어서 제본에 넣을 수도 있겠단 생각도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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