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근위대원의 날들 - 우산
비오는 날.
"어… 비다."
소파에 앉아있던 재신이 창 밖을 보고 작은 탄성을 질렀다. 소리없이 촉촉해지던 하늘의 빗방울이 조금씩 커다란 유리창에 흔적을 남기고 어느새 나뭇잎이 바람에 흔들리며 비에 젖는 소리까지 사박사박 들려왔다. 부엌에서 자신과 재신의 몫의 커피잔을 양 손에 들고 거실로 나오던 시경도 시선을 돌려 커튼 틈으로 보이는 밖의 풍경을 바라보았다. 일찍 해가 져 이미 어둑한 창 밖 희미한 가로등 불빛에 빗줄기가 가늘게 비쳤다.
"내일은 더 추워지겠네요."
"그러게요. 이미 추운데."
"공주님 내일 의상은 따뜻한걸로 준비해달라고 이야기해야겠습니다."
"자꾸 그렇게 비서실에서 의상팀에 압박주는거 별로 보기 안 좋아요. 내가 알아서 잘 입을게요."
"공주님이 자꾸 얇은 옷을 입으시니까 그렇죠."
"그치만 두꺼운 옷 입으면 핏이 안 산단 말이야. 기사사진이 얼마나 무자비하게 나는데요. 그럼 또 거기에다가 사람들이 이재신 살쪘다고 악플 달고…"
공주님 살 안 찌셨습니다. 지금보다 더 찌셔야 합니다. 과장되게 입술을 삐죽이는 재신에게 잔을 건네주고 옆에 앉으며 시경이 진지하게 대답한다. 어우, 안돼요 안돼. 결혼하고 더 철저하게 관리해야지. 재신이 양 손으로 잔을 감싸고 커피를 한모금 들이켰다. 이정도는 선물하게 해달라며 재신의 밴드 멤버들이 안겨주고 간 캡슐커피머신이 제법 성능이 좋아 입맛이 까다로운 재신도 그다지 커피를 즐기지 않는 시경도 자주 사용하는 중이었다.
조금 굵어지는가 싶더니 늦가을의 비가 다시 가늘게 유리창 위로 음악을 연주한다. 창문 위로 새겨지는 비의 흔적들을 눈으로 좇던 재신이 마시던 커피잔을 테이블에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우리 밖에 나가요."
"네?"
"밖에 나가서 산책해요."
"비가 이렇게 오는데요, 공주님."
"그러니까 나가자는거죠. 응? 우산 들고 나가요."
"해도 지고 위험한데…"
걱정스러운 눈으로 창 밖을 살피면서도 공주의 고집을 꺾을 수 없는 것을 아는 시경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행여 물이 튈까 모직 스커트에 스타킹 차림인 재신에게 시경이 꼭꼭 가디건과 코트를 챙겨 입히고 머플러도 둘러주었다. 시경이 코트를 걸치고 현관의 신발장에서 장우산을 꺼내들자 재신이 시경의 옷깃을 잡아당겨 마주 서서 시경의 코트 단추를 세심하게 잠갔다. 재신의 발에 무릎 바로 아래까지 오는 레인부츠가 신겨지고 손을 꼭 맞잡은 두 사람이 현관을 나섰다.
시경이 우산을 펴자 두 사람의 머리 위로 커다란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재신은 우산을 든 시경의 팔짱을 꼭 끼고 틈없이 시경의 옆에 몸을 붙였다. 두 사람분의 비를 가려주고도 남는 커다란 우산 아래로 시경과 재신이 온전히 들어서 걷자 고요한 거리에 빗소리와 두 사람의 발소리만이 울려퍼졌다.
"오랜만이다, 비 오는데 나오는거."
"근위대에서 비 오는 날에는 외출을 삼가달라는 요청을 올리니까요."
"응. 알아요. 꼭 필요한 공식행사 말고는 어둡거나 비 오면 나가지 말라는 말 어릴 때부터 들었으니까."
아, 시원하다. 재신이 우산 밖으로 손을 뻗자 재신의 손바닥 위로 빗방울이 떨어져 손가락을 타고 흘러내렸다. 비 맞으십니다. 까르르 웃는 재신의 소맷자락이 젖어들무렵 시경이 재신의 손을 거두어 다시 우산 안에 두었다. 찰박, 찰박. 재신이 어린아이처럼 물웅덩이를 차자 고여있던 물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꺅, 자신이 찬 물이 튀어 치마 끝자락을 적시는 바람에 재신이 화들짝 놀라자 결국 시경이 고개를 돌리고 작게 웃었다.
신궁과 공주부부의 사가는 그다지 멀리 떨어져 있지 않았다. 사가에서 나와 조금만 걸어도 신궁 북문으로 연결되는 가로수길이 이어졌다. 낙엽이 반쯤 진 플라타너스 나무 아래를 천천히 걷던 재신이 아득하게 신궁과 바깥을 갈라놓는 돌담 위를 바라보았다.
"은시경씨."
"네."
"기억나요? 예전에… 비왔던 날. 나 사고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재신의 말에 시경은 가만히 재신의 시선을 따라갔다. 돌담 안은 신궁의 북측 정원으로 연결되어 있을 것이었다. 그제야 시경은 재신이 말하는 날을 떠올렸다. 재강과 재신에게 그 일이 있고 아직 시간이 많이 지나지 않았던 때였다. 봄이 지나가고 있는 것을 알리듯 봄비가 온 세상을 적셨던 날, 좀처럼 실내에서 한 발짝도 안 움직이려 했던 재신이 무슨 생각이었는지 감기에 걸린다는 궁인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정원으로 나가겠다고 해 시경이 함께 움직이고 있었다.
「다 젖잖아.」
「죄송합니다.」
「아직도 젖잖아! 안보여? 무릎이랑 다 젖는단 말이야! 잘 좀 씌워!」
시경은 재신의 한 발짝 뒤에서 우산을 씌워주고 있었다. 하지만 다른 사람보다 높이가 낮은 재신은 시경이 아무리 우산을 앞으로 씌워주어도 조금은 비를 맞을 수밖에 없었다. 날카롭게 짜증을 내는 재신에 시경은 우산을 완전히 앞으로 기울여 재신이 비를 맞지 않도록 해주었고 자신은 우산의 구석 한조각 얻지 못하고 제법 세차게 내리는 비를 전부 맞아야 했다. 결국 오후 내내 비를 맞은 탓에 시경은 답지 않게 감기에 걸렸었다. 다음날, 병원에 가기 위해 재신을 경호하려 대기하고 있다가 무심코 콜록, 기침을 하는 시경을 재신은 휠체어에 앉은채 쏘아보았다.
「뭐야? 너 지금 어제 비맞았다고 시위해?」
「아닙니다.」
「왜, 시위하는거 맞잖아. 성질 더러운 공주가 변덕 부려서 비 내리는데 밖에 나가는거 뒤치닥거리하다가 비 쫄딱 맞고 감기 걸렸다고 내 앞에서 티내는거 아냐!」
「그런거 아닙니다. 그렇게 보였다면 죄송합니다.」
못마땅한 얼굴로 시경을 올려다보던 재신은 이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입을 꼭 다문채 휠체어를 움직여 시경을 스쳐 지나갔다. 병원에 다녀오는 내내 재신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시경과 눈을 마주치려고도 하지 않았다. 조수석에 앉은 시경은 평소와 다름없는 얼굴로 정면을 보고 있었다. 차량 정면 유리에 희미하게 뒷좌석의 재신이 비쳤었던 것을 시경은 기억하고 있었다.
보이지 않지만 눈 감고도 그릴 수 있을 돌담 안쪽을 바라보던 재신이 고개를 돌려 시경을 쳐다보았다. 옆얼굴에 와닿는 재신의 시선에 시경이 재신을 마주보자 이내 재신이 다시 눈을 피해 앞을 바라보았다.
"나요, 이제와서 변명같은 얘긴데. 원래는 누가 뒤에서 우산 씌워주는거 싫어했어요. 궁인들이나 경호원들이 뒤에서 우산 씌워주면 그 사람들은 다 비맞고 젖잖아. 그래서 싫었어. 그래서 어릴 때도 내가 자라서 수행원들이랑 비슷한 키가 되면 꼭 옆에서 나란히 같이 우산을 써야지. 아니면 내 우산정도는 내가 직접 써야지. 그런 생각도 했어요."
"공주님다우세요."
"그런데… 그 날. 그 비왔던 날이요. 휠체어에 앉아 있으니까, 깨달아버렸었어요. 나는 나 혼자 우산으로 내 몸 하나 가릴 수 없다는거. 더이상 누구도 내 옆에서 나란히 우산을 쓸 수 없다는걸요."
"…공주님."
"나란 존재는 이제, 이런 작은 일조차 누구에게 폐를 끼치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는 인간이구나. 그런 생각이 드니까… 너무 비참했어."
그래서 애꿎은 은시경씨한테 짜증냈던거에요. 화풀이. 못됐죠, 나. 재신의 긴 속눈썹이 깜빡였다. 시경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은채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아까보다 거세진 빗방울이 이젠 제법 아픈 소리를 내며 우산에 부딪혔다. …저도 고백할게 있습니다. 시경의 나직한 목소리에 이번에는 발을 맞추어 걷던 재신이 시경의 옆모습을 바라보았다.
"그 다음날, 저한테 그러셨었죠. 비 맞았다고 시위하는거냐고."
"…응."
"그 땐 아니라고 했지만… 사실, 맞았습니다. 시위하는거."
전 공주님이 생각하시는 것만큼 그렇게 착한 놈이 아닙니다. 시경의 입에서 나온 의외의 말에 재신의 눈이 동그랗게 뜨였다. 눈을 돌려 재신의 표정을 본 시경의 입가에 살짝, 미소가 걸렸다.
"변한 공주님이 화가 났습니다. 내가 알던 공주님은 이런 분이 아닌데. 이렇게… 망가지실 분이 아닌데. 저 혼자 초조했습니다. 공주님에게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을 그때는 몰랐습니다. 그 때의 저는 앞만 바라보고 달렸으니까요. 제가 처리하고 해결해야할 일들에 너무 쫓기고 집중하느라 옆을, 공주님의 주변을 보아야 한다는걸 몰랐어요. 고의적으로 기침을 했던건 아니었지만 마음 속에는 분명히 있었습니다. 왜 모르시냐고. 공주님이 주변을 상처내고 있는걸 왜 모르시냐고."
"은시경씨…"
"그로 인해 가장 상처받는건 공주님이라는걸, 그 때의 저는 잘 몰랐던 것 같습니다."
"아니야. 내가 상처받았다고 해서, 내가 아프다고 해서, 그래서는 안됐던거였어요. 그렇게 내 멋대로 굴어선 안됐어. 은시경씨가 날 끄집어내주지 않았다면 아마 난 제자리로 돌아오는데 훨씬 더 오래 걸렸을거야. 아마… 못 돌아왔을 수도 있고."
"공주님."
"응?"
"그 때도 반짝반짝 빛나셨습니다, 공주님은."
"거짓말. 그게 빛나는거야?"
말도 안된다는 듯 재신이 웃었다. 시경은 입술을 몇 번 달싹이다가 이내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그 날, 병원 스케줄을 마치고 돌아온 시경이 집무실에서 일지를 작성하고 있을 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문을 열자, 휠체어에 앉은 재신이 시경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재신의 무릎 위에는 김이 모락모락 나는 잔이 놓인 쟁반이 있었다.
「무슨 일 있으십니까, 공주님?」
심각한 얼굴로 묻는 시경의 눈 앞에 불쑥 잔이 들이밀어졌다. 뭐해? 나 팔아파. 여전히 날선 목소리에 시경이 얼떨결에 잔을 받아들자 큰 눈을 깜빡이며 시경을 노려보던 재신이 작게 입술을 비죽였다. 장애인 공주 뒤치닥거리하다가 감기 걸리셨다며. …아닙니다, 그건. 시경이 채 변명을 마치기도 전 재신의 휠체어가 휙 돌아섰다. 내일은 나 내실에서 한 발짝도 안 움직일거고, 오빠한테도 부르지 말라고 해놨으니까 쉬어요. 괜히 그러고 나갔다가 경호에 구멍내지 말고. 잦아드는 공주의 목소리가 무슨 뜻을 담고 있는지 시경이 깨달았을 무렵 이미 공주의 뒷모습은 복도 끝으로 작게 사라지고 있었다. 재신의 모습이 복도 저편으로 완전히 보이지 않게 될 때까지 시경은 재신을 지켜보았다. 더이상 재신의 향기조차 찾을 수 없게 되고 나서야 시경은 들고 있던 잔을 조심스레 한모금 들이켰다. 씁쓸한 쌍화탕이 목을 타고 넘어갔다. 약재가 많이 들어갔는지 짙은 한약 냄새를 풍기는 쌍화탕은 시경이 먹어보았던 어떤 한약보다도 썼다. 정말로 썼다. 그렇지만, 따뜻했다. 상처입은 작은 새같던 그의 공주처럼.
"빛나지 않으셨던 적, 한 번도 없었습니다."
"그래요. 난 반짝반짝 빛나는 이재신 공주니까."
늘 듣는 이야기라는 듯 농담처럼 받아넘기면서도 늘 듣는 그 말이 싫지 않은지 재신이 곱게 웃었다. …고마워요. 나 무너지지 않게 잡아줘서. 감사합니다. 제가 도망치지 않도록 잡아주셔서. 재신의 머리가 살며시 시경의 어깨에 기대어진다.
가로수길의 모퉁이를 돌자 신궁 북문이 보였다. 순간 찰칵, 셔터음이 나며 플래시가 터졌다. …아, 파파라치. 플래시가 터진 쪽을 재신이 슬쩍 보자 시경이 몸을 움직여 재신을 가렸다. 궁 앞에 상주하는 파파라치인가보네요. 대수롭지 않게 재신이 발을 움직였다. 한 명이 아니었는지 갑작스레 나타난 비오는 날 산책하는 공주부부를 담으려는 플래시가 연달아 몇 번 더 빛을 냈다.
"아직 많이 불편하죠, 저런거."
"공주님이나 전하만큼 익숙하진 않습니다. 그래도 처음보다는 많이 낫습니다."
와, 그래도 은시경씨 평생 정색할 줄 알았는데 조금은 발전이 있네? 시경의 뺨을 콕 찌르며 재신이 장난스레 웃었다. 저도 발전합니다. 못마땅한 듯 시경의 입가가 씰룩이자 이내 재신의 웃음이 다시 터진다. 정말? 난 모르겠는데? 시경을 놀리는데 재미가 들린듯 일부러 고개를 갸웃거리며 웃는 재신을 시경이 우산을 들지 않은 팔을 뻗어 휙 당겨 마주 세웠다. 놀라 눈이 동그래진 재신을 보며 시경이 살며시 미소짓자 이내 시경이 무엇을 하려는지 깨달은 재신의 입가에도 꽃처럼 미소가 피어난다. 까치발을 들려는 재신의 어깨를 잡아 살짝 누르며 시경이 나직하게 속삭였다. 안됩니다, 공주님. 내가 먼저 할거에요.
두 사람의 머리 위 큰 우산이 살짝 기울여지며 파파라치들의 시선을 가렸다. 기울어진만큼 두 사람의 머리와 어깨를 비가 적시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내, 한껏 기울어져 있던 우산이 시경의 손에서 바닥으로 떨어져내리고 시경의 남은 팔이 재신의 허리를 끌어당겼다. 서로의 몸이 틈없이 맞닿고, 살며시 마주대었던 입술이 어느새 깊이 맞물렸다. 두 사람의 머리 위로 가을밤의 비가 끝없이 쏟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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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또 실시간 검색어 등장…은 요즘 너무 자주 등장하시는 국민신혼부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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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게 썼다 지웠다. 사고 후의 두 사람에 대해서는 인터뷰라는 단편과 그 글에 덧붙여진 뒷이야기에서 이야기한 적이 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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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두 사람은 서로를 의지하며 해냈다. 일어섰고, 똑바로 마주보았다. 사랑이란 한 편으로는 그런 것이 아닐까. 불완전한 두 사람이 서로를 의지해 걷다가, 어느새 스스로의 힘으로 걷게 되고, 굳게 손을 잡은 채 인생이란 길을 함께 걸어가는.
그리고 이제는 그 모든 것도 추억의 한 토막이 되어. 두 사람이 왜 그 때 그럴수밖에 없었는지도 이젠 말하지 않아도 서로 이해할 수 있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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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잇 둘이 비맞고 나란히 감기나 걸려라 ㅡㅡ 파파라치컷 보고 감기걸린 둘 보고 재하전하가 또 입재하 강림하시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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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에서 생략된 두 사람이 애절해지기까지의 썸타는+밀당 부분을 보고 싶다 적어주신 분이 계셨었어요. 그 덧글을 보고 추운 가을밤에 앉아 있자니 문득 생각나서 써보았습니다. 이거슨전혀썸도아니고밀당도아니지만으아아아… T▽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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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정말 많이 춥네요. 주말은 더 춥다는데 따뜻한 커피나 코코아와 함께 따스한 주말 보내시길 바랍니다 :) 공주님과 부마님은 꼭 붙어서 따뜻할테니까요 으하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