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근위대원의 날들 - 30
쓰다가 내가 토할거 같았다…
스압을 조심하세요 :D;;;;;;
78.
"내 전담경호 세 사람은 무조건 나와 같이 행동합니다. 다른 근위대원들은 현지에서 대기하고 있는 인원들과 합류해 국왕 전하 소재를 찾습니다. 그들도 인원을 분산시켜놓을 순 없었을테니 그 건물 안에 있을거에요. 눈에 띄지 않게 들어가는건 박 비서의 도움을 받도록 하세요. 나는 군인들의 일에 대해서는 잘 모르니, 중대장에게 위임할게요."
일의 심각성을 깨달아서일까, 공주의 위협이 먹힌 것일까. 박 비서 혹은 박 기자는 모든 정보루트를 통해 클럽M이 최근에 익명으로 사들여 개조한 오래된 건물을 찾아냈다. 세 사람이 사라진 곳에서 차로 두시간정도 떨어진 곳에 있던, 폐쇄된 연구소 건물이었다. 보안이 필요한 연구를 했던 탓에 연구소 안에는 여러 보안장치가 설치되어 있었고 구조도 복잡했다. 재신은 바로 떠날 채비를 했다. 최소한의 인원을 모아 비행기에 오르기 앞서 휠체어에 앉은채 재신은 자신과 함께 갈 근위대원들을 바라보았다.
"근위대가 원래 이렇게 위험한 곳이 아닐텐데, 자꾸 위험한 일에 동원해서 진심으로 미안해요. 이번 일, 모두가 무사히 돌아온다면 좋겠지만 솔직히 장담할 수는 없어요. 딱 한가지 모두가 명심했으면 하는 것이 있어요. 지금 비행기에 오르는 순간부터 돌아오는 그 순간까지 각자에게 가장 중요한건 각자의 목숨과, …국왕 전하의 안위에요. 무슨 일이 있어도, 전하를 우선시하세요."
재신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 무거운 침묵이 그들 위로 내려앉았다. 잊지 마세요. 누가 이 나라의 국왕인지. 단호한 얼굴을 한 재신이 눈짓을 하자 궁인들이 다가와 재신의 다리에 워킹수트를 착용하는 것을 도왔다. 종아리에 와닿는 차가운 금속의 느낌에 재신은 얼굴을 살풋 찡그렸다. 다리가 무너지지 않게 고정시키고 긴 치마로 워킹수트가 보이지 않게 덮은 재신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언론에게 들키지 않도록 왕실 문양조차 찍히지 않은 비행기가 조용히 활주로 끝에서 이륙했다. 재신은 창 밖으로 멀어져가는 지상을 내려다보았다. 그 곳에, 작은 오빠가 있다. 새언니가 있다. 그리고… 은시경이 있다. 애써 지우려했던 화면 속 시경의 모습이 다시 재신의 머릿속을 채웠다. 그를 잃었던 고통스러운 시간이 되살아나기 전 재신은 서둘러 고개를 저으며 출발하기 전 규태가 건넨 자료로 눈을 돌렸다. 재신의 손에 시경의 군번줄이 꼭 쥐어져 있었다.
79.
"내가 이럴 줄 알았지. 또 너네들이냐. 왜, 아주 그냥 서울을 불바다로 만들지?"
문을 열고 들어선 남자에 재하가 질렸단 얼굴로 빈정거렸다. 남자는 비틀린 미소를 띤 얼굴로 재하와 항아를 쳐다보았다. 항아의 날카로운 눈이 상대를 살폈다. 왕비마마, 소용 없습니다. 여기서 도망치는건 불가능해. 남자의 뒤로 어둠 속에서 잘 훈련받은 것이 분명한 다른 남자들이 더 나타나자 틈을 노리던 항아가 결국 한 발 뒤로 물러선다.
"존 마이어는 왕이 되길 원했던가? 그런데 난 아냐."
소름이 돋을 정도로 차가운 얼굴이었다. 공주님이 여기로 오는 모양이더군. 남자의 입에서 나온 공주, 라는 단어에 재하의 눈썹이 치켜올라갔다. 남자가 손을 들어 방 한구석에 있는 모니터를 가리켰다. 봐, 오빠를 구하겠다고 동생이 어디로 들어오고 있는지. 남자의 손가락 끝이 가리킨 모니터가 켜지며 건물 앞에 서 있는 재신의 모습이 보였다. 한눈에도 한계에 도달한 것이 보이는 동생의 모습에 일순간 재하의 표정이 무너졌다.
"국왕전하, 잘 생각해봐. 동생 죽이고 살아서 나갈지, 목숨 바쳐서 불쌍한 동생 구할지."
문이 닫히고 재하는 주먹을 꽉 쥐었다. 전하, 애타게 재하를 부르는 항아의 손을 꼭 쥐며 재하는 억지로 숨을 들이켰다.
"저 자식, 우리 중 아무도 살려 보낼 생각 없어. 재신이가 왔으면 근위대도 왔을거야. 이제 슬슬 나갈 방법을 생각해보자."
"전하…"
"왜 자꾸 불러."
"공주님… 정말로 기케,"
대답을 재촉하는 항아에게 재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80.
"산을 타고 넘어가면 뒤쪽으로 통로를 찾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알겠어요. 그럼 부탁할게요. 상대도 대비를 안 해놨을리 없으니 충돌은 피할 수 없을거에요. 내가 최대한 시간을 끌테니, 무조건 찾아요. 그리고 찾으면 곧장 안전한 곳으로 대피하도록 해요. 나는 따로 움직입니다."
"하지만 공주님…!"
"어차피 그리로 들어간 이상 내 목숨은 내놓은거나 다름 없어요. 양쪽 다 신경 쓰는게 더 위험해요."
안절부절하는 1중대장에게 재신이 웃어보였다. 걱정하지 말아요. 나한테는 염동하 대위도 있고, …은시경씨도 있으니까. 알잖아요. 내 목숨 그렇게 가볍지 않은거. 비행기에서 갈아탄 헬기에서 내린 재신이 단호한 걸음으로 건물 정문을 향했다. 동하와 김 소위, 서 중사가 재신을 따랐다. 보초를 서고 있는 남자 둘이 이미 말을 들었다는 듯 재신을 보고 안내를 위해 비켜섰다. 노을이 지고 있는 초 저녁의 하늘을 뒤로 하고 거대한 입을 벌린 회색의 건물을 한 번 올려다 본 재신은, 손에 쥐고 있던 군번줄을 목에 걸었다. 똑바로 정면을 보며 어두운 복도로 들어서자 탁한 공기가 재신의 전신을 휘감았다.
이 안 어딘가에 재하와 항아가 있고, 시경이 있다. 그리고… 클럽M도 있다. 워킹수트에 의지해 억지로 한발씩 옮기는 다리는 이미 감각 없는 비명을 내지르고 있었다. 재신은 손톱이 살에 파고들 정도로 주먹을 꽉 쥐었다. 절대 약한 모습, 떠는 모습 따위 그들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다. 무너지는 모습은 한번이면 족해. 복도 깊은 안쪽의 문이 열리고 남자들이 그 앞에 멈춰섰다. 재신이 안으로 발을 들이고 동하가 들어서려는 순간 남자들이 막자, 순식간에 서로간에 대치 상태가 벌어졌다.
"비켜."
"못 들어간다."
"쏘기 전에 비켜. 공주님 혼자는 들여보낼 순 없어."
"같이 들어오시라고 해, 뭐가 달라지겠어."
안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경호원들이 노려보다 비켜서고 세 사람이 재신의 뒤에 섰다. 재신은 의자에 앉으며 남자와 지영학을 차례로 쳐다보았다. 그는 재신을 기억하고 있었고, 재신 역시 그를 기억하고 있었다. 재신이 기억하는 그는 단정하고 성실한 비서였고 그가 기억하는 공주는 단발머리를 나풀거리며 환하게 웃던 여고생이었다. 그러나 지금 이 자리에 있는 것은 홀로 고통과 두려움을 버티고 있는 여왕과 어둠보다 더 짙은 그림자에 먹혀버린 늙은 배신자 뿐이었다. 남자가 재신의 앞에 놓인 찻잔에 차를 따랐다. 독같은 건 없어. 남자의 말을 비웃듯 재신은 거침없이 찻잔을 들어 차를 마셨다.
"이런걸로 죽일거라고 생각하지도 않아. 본론부터 말해."
"생각은 해봤나? 누굴 살릴지."
"한 명만 살려준단건 어떻게 보장해? 네 말을 내가 믿어야 한다는 법이라도 있어?"
"게임에 응하면 한 명은 살겠지만 아니면 다 죽을텐데, 공주님께서 겁이 없으시네."
재신은 남자를 잘 알고 있었다. 그에게는 아무것도 없었다. 가족, 친구, 연인, 재산, 그 무엇도. 그는 하고싶은대로 행동할 것이었다. 재신의 말과 상관없이 내키는대로 행동할게 뻔했다. 재신의 목적은 그와 협상하는 것이 아니었다. 재신은 근위대가 재하와 항아를 찾을 때까지 버틸 생각이었다. 동하는 남자와 남자의 경호원들을 견제하며 공주의 반듯한 뒷모습을 살폈다. 입 밖으로 직접 낸 것은 아니지만 동하는 어렴풋이 재신의 생각을 알 수 있었다.
"셋 중 하나를 고르라고 하니 어렵나? 그럼 질문을 바꿔볼까, 공주님? 공주님이 여기서 살아 나가면 은시경은 죽는다. 공주님이 여기서 죽으면, 은시경은 살아 나간다. 이건 어때?"
남자는 즐거워보였다. 마치 손가락으로 개미를 눌러 죽이기 전 이리저리 도망치는 개미의 앞길을 막듯 재신을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톡톡 건드리고 있었다. …그 화면, 봤지? 지금쯤 은시경이 어떨지 모르겠군. 남자의 입에서 나온 시경의 이름에 재신의 어깨가 움찔, 떨렸다. 푹 숙여졌던 고개, 시경의 이마에서 바닥으로 떨어지던 붉은 핏방울들. 똑, 똑, 천장에서 물방울 떨어지는 소리가 재신의 귓속으로 파고들었다. 재신의 눈동자가 흔들리는 것을 남자가 몸을 뒤로 젖히며 지켜보았다. 파르르 떨리던 눈가가 꽉 감기고 재신은 남자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죽여."
"뭐?"
"죽이라고, 은시경."
방 안에 서늘한 공기가 가라앉았다. 동하와 김 소위, 서 중사는 말을 잇지 못하고 재신을 바라보았다. 입을 다문 재신의 옆모습은 흔들림이 없었다. 흥미롭다는 듯 공주를 보던 남자가 큰소리로 웃음을 터뜨렸다.
"그렇게 좋아 죽던 기사님도 자기 목숨 앞에선 결국 별거 아닌가보군. 하긴, 넌 자기 혼자 살겠다고 큰오빠도 죽였는데 두 번은 못하겠어?"
"마음대로 떠들어. 넌 절대 모를테니까."
"살아남고 싶어하는 인간의 본능은 잘 알지. 특히, 너같이 약한 인간은."
"넌 어차피 누구도 살려 내보낼 생각이 없잖아? 고통과 함께 싹 다 죽이고 싶어서 나까지 부른거 아니었어? 처음부터 넌 나와 게임같은거 할 생각따윈 없었어. 나도 너와 협상같은거 하려고 온 것도 아니고."
오빠가 살아서 나갈 수 있다는 확신을 얻기 전까지, 난 절대 죽을 수 없어. 이를 악물고 재신이 도전적인 눈으로 남자를 쳐다보았다. 근위대가 아직 재하를 찾지 못했다. 재신은 여기서 모두가 살아 나갈 수 없을 수도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재하가 죽는다면 자신은 반드시 살아야 했다. 아직 돌도 안 지난 세자를 보호하고 왕실을 지켜야만 했다. 남자가 기대었던 몸을 앞으로 숙여 재신을 쳐다보았다. 뱀의 눈처럼 차가운 그 시선에 재신은 소름이 돋았다. 안면도, 자신의 머리에 겨누어졌던 총구, 등 뒤의 절벽. 마음 속 깊이 묻었던 악몽이 하나하나 다시 떠올랐다. 두렵지 않다면 거짓말이었다. 지금 당장이라도 뛰쳐나가고 싶을 정도로 강한 압박감이 재신을 짓눌렀다. 재신의 몸이 파르르 떨리자 목에 걸려 있던 시경의 군번줄이 흔들려 맨살에 차가운 금속이 닿았다. 순간, 떨림을 주체하지 못하던 재신의 몸이 거짓말처럼 멈추었다.
"내가, 다 지고 갈거야."
큰오빠 죽이고 이제는 약혼자까지 죽였단 소리 들어도, 그 사람 나 때문에 죽었다는 그 죄책감과 사람들의 비난과 그 사람이 또다시 내 곁에 없다는 상실감도 다! 다 내가 지고 갈거야. 왜냐고? 내가 공주니까. 국왕인 우리 오빠 살았는지 죽었는지도 모르는 지금 내가 계승서열 1위니까. 돌도 안지난 내 조카가 측근들, 종친회, 수상, 내각들… 쥐락펴락 안 당하고 국왕노릇 하려면 이십년은 족히 있어야 하니까. 그 때까지 난 죽으면 안돼. 살아야 돼. …넌 절대 모를거야.
"그 사람, 은시경. 나 원망 안해. 설령 내가 정말 나 살겠다고 그 사람 죽이려고 해도… 그 사람 나 원망 안해. 니가 뭘 알겠어. 그 사람, 나 혼자 살아 나 혼자 고통받을거 걱정해서 눈 못감을 사람이야."
남자를 노려보는 재신의 눈이 붉게 충혈되었다. 실핏줄이 터져 하얗고 깨끗하던 눈매가 붉게 번져가면서도 재신은 끝끝내 눈물 한방울 흘러내리지 않았다. 공주에게서 느껴지는 독기, 그리고 압박감에 마냥 여유롭던 남자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사는게 뭐 그리 대단해? 이미 죽으려고 절벽에서 한 번 뛰어내렸던 몸인데. 나도 차라리 죽는게 편해. 근데 나 죽고 아수라장 될 왕실 생각하면 죽지도 못해. 그리고, 내가 죽어서 은시경 살리는거? 넌 참 내가 대단한 고민할거라고 생각했을지 모르지만 그딴건 이런 상황 아니어도 고민도 아니야. 늘 사는게 죽는것보다 낫다고, 모두가 죽는걸 두려워한다고 생각하는걸 보니 너도 별거 아니네. 내가 죽고 은시경 혼자 살아남는거… 하, 웃기지마. 내가 은시경한테 그런 고통을 줄거 같아?"
살아남았다는 이유만으로 존재 자체가 괴로워지는 삶, 자신이 죽였다는 그 죄책감. 차라리 가슴을 쥐어뜯고 스스로를 상처내는게 마음이 편해지는 그 영원히 해방되지 않는 고통을 재신은 이미 재강을 잃으면서 경험했고, 시경이 없을 때 또 경험했다. 자신과 맞바꾼 목숨을 버리지도 못할 강직하고 선한 시경에게 재신은 조금도 그런 삶을 줄 생각이 없었다. 그가 없던 시간. 그가 내준 숙제를 하며 그가 사랑했던 공주의 모습으로 빛나려 하며 그렇게, 하루하루 버텨나갔던 날들. 수없이 빌고 또 빌었다. 그가 더이상 아프지 않길, 힘들지 않길. 그에게 더이상 어떤 고통도 없길. 공주라 죽을수도 없는 자신이 차마 그를 다시 만나게 해달라고 빌 수조차 없어 재신은 그렇게 빌었었다. 그런데 어떻게. 어떻게 시경에게. 시경을 죽이라 말하는 순간 칼로 심장을 베는 것 같은 쓰라림이 재신의 목을 조여왔지만 재신은 이를 악물고 참아냈다. 자신을 가지고 놀려 하는 남자에게 무너질 순 없었다. 남자를 마주하는 재신의 입꼬리가 가늘게 호를 그렸다. 차가운 눈동자가 남자를 비웃었다.
"생각하는게 어쩜 이렇게 단순하고 유치할까. 김봉구보단 좀 나으려나 싶었는데 하여간 끼리끼리 논다니까. 이래서 열폭하는 애들하고 놀면 안되는데."
남자의 턱이 부들부들 떨렸다. 안면도에서의 공주는 마지막에 스스로 절벽에서 뛰어내렸다. 마치 나비가 팔랑팔랑 날아가듯 가볍게 아무런 망설임조차 없이 스물여섯의 공주는 절벽 아래로 뛰어내렸다. 그리고 이재하는, 몇번이나 휘청이면서도 무너지지 않았다. 거침없이 김봉구를 비웃고 도발했다. 남자는 이 남매를 꺾어보고 싶었다. 핏줄 잘 타고난게 다인 그 잘난 왕족을 파멸시켜보고 싶었다. 하지만 홀로 남아 트라우마까지 있어 쉽게 무너질줄 알았던 공주는 오히려 자신의 밑바닥을 드러나게 했다. 지영학의 말이 맞았다. 만악의 근원은, 열등감이었다.
"그렇게 원한다면 은시경부터 죽여주지."
그 순간, 바깥에서 총소리가 났다. 모두의 시선이 문 밖으로 향하고 재빨리 서로를 향해 총이 겨누어졌다.
81.
문 밖에서 나는 요란한 소리에 재하와 항아가 재빨리 자리에서 일어났다. 뒤에 계시라요. 뭐? 말도 안되는 소리를… 뒤에 계시라요! 항아가 앙칼지게 재하를 뒤로 밀어내고 문을 노려보았다. 몇 발의 총성이 울리고 몸싸움이 벌어진 듯 쿵, 하고 누군가가 문에 부딪히는 소리가 난 뒤 거칠게 문이 열렸다. 항아가 재하를 팔로 막으며 방어태세를 취하는 순간, 두 사람의 앞에 시경이 모습을 드러냈다.
"은시경!"
"전하, 왕비님. 하아, 괜찮으십니까?"
"일 없습네다. …꼴이 그게 뭡네까?"
"트러블이, 좀. 어서 밖으로."
반쯤 문을 등지고 밖을 살피는 시경이 길게 말할 시간이 없다는 듯 급하게 항아와 재하를 방 밖으로 이끌었다. 조심스럽게 건물 안을 살피던 시경의 눈에 경호원들이 몇명이나 엄중히 서 있는 문이 들어온 순간, 시경은 그 곳에 재하와 항아가 있을 것임을 직감했다. 무기도 없고 몸도 성치 않다. 복도의 불을 꺼 순간적으로 주의를 돌린 시경이 그대로 그 중 한명에게 달려들었고 재빨리 남자의 목을 꺾었다. 갑작스러운 침입자에 놀란 경호원들이 시경에게 총을 겨누는 순간 시경도 남자에게서 빼앗은 총을 겨누었다. 타이밍을 놓치면 어차피 죽는다. 왼손에 총을 쥔 시경이 그대로 방아쇠를 당기자 익숙하지 않은 팔이 반동으로 크게 흔들렸다. 시경의 판단은 틀리지 않았다. 방 밖으로 나오자마자 항아가 쓰러져 있는 경호원들의 맥을 짚어본 후 무기를 챙겼다.
"아직 숨이 붙어 있디요. 빨리 움직여야 합네다."
"출구를 찾을 수가 없습니다. 이 건물, 구조가 너무 복잡합니다."
"재신이가 왔어."
"…공주님, 이요?"
시경의 발걸음이 우뚝 멈추었다. 뭐해, 빨리 움직여! 창백하게 질린 시경을 다시 재촉하며 재하가 말을 이었다. 그 자식, 완전 미친놈이야. 하긴 클럽M놈들 치고 정신 제대로 박힌 놈이 없긴 하지. 화면으로 재신이 온거 보여줬어. 여기 어디 재신이 있을거야. 그리고 재신이가 데리고 온 근위대도 있겠지. 순간 뒤에서 쫓아온 경호원들을 향해 항아의 총구가 불을 뿜었다. 빗나간 한발로 화가 난 남자가 항아에게 달려들자 시경이 재빨리 두 사람의 사이에서 자신보다 머리 한 개는 큰 남자를 엎어쳤다. 하아, 항아가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애 낳고 궁에만 있었더니 몸이 예전같지 않습네다."
"왕비님 예비역이십니다. 현역같지 않으실겁니다."
"지금 놀리는거디요? 내래 아직도 쌩쌩한데 돌아가면 은시경 동지와 대련부터 해야겠슴미다."
"대련이고 뭐고 하려면 일단 나가야 하니 나갈 방향부터 찾자고."
다시 움직이는 세 사람의 귀에 여러명의 발소리가 들렸다. 본능적으로 재하와 항아가 서로를 감싸려 하고 시경이 두 사람을 엄호했다. 시경의 날카로운 눈이 소리를 좇았다. 세 사람의 앞에 나타난 것은, 1중대장을 위시한 근위대원들과 박비서였다. …전하! 1중대장이 재빨리 세 사람에게 달려왔다.
"출구를 확보해두었습니다. 어서."
"…재신이는."
"공주님께서, 전하를 찾으면 바로 안전한 곳으로 이동하라고 하셨습니다. 염 대위 이하 전담호위들이 공주님을 따라갔습니다."
재하의 눈이 시경을 한 번, 중대장을 한 번 보았다. …제길. 주어진 상황에 재하가 어금니를 꽉 물었다. 앞장서. 살아남는게 왕으로서 최선이다. 그것이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재하와 재신은 근본적으로 닮은 부분이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재하는 재신의 생각을 바로 알 수 있었다. 재신이 지금 어떤 마음으로 그 곳에 있는지. 전하, 항아가 재하의 팔을 잡았지만 재하는 그대로 그 손을 잡아채 꽉 쥐었다. 가자. 재하와 항아의 뒤에서 시경이 멈춰섰다.
"전 공주님께 가겠습니다."
"은시경."
"1중대장이 전하를 모실겁니다. 전… 공주님께 가야 합니다."
재하가 시경을 마주보았다. 재하의 눈이 시경의 찢어진 이마와 터진 입가, 그리고 왼손에 쥐어진 총과 바르르 떨리는 오른손을 차례로 훑었다. 너, 괜찮겠어? 시경이 손등으로 입가를 훔치며 웃어보였다. 괜찮습니다. 하아, 시경을 보던 재하가 한숨을 푹 내쉬고 다시 돌아섰다. 마음대로 해. 시경은 근위대의 엄호 하에 다시 움직이는 재하와 항아의 뒷모습을 쳐다보다가 재신이 있을 쪽으로 몸을 틀었다.
"근위대라도 더 같이 보내야 하는거 아닙네까?"
"건물에서 나가면 바로 그 쪽으로 지원 보낼거야."
"공주님이랑 은시경 동지… 괜찮겠디요?"
"…괜찮을거야."
복잡한 복도를 꺾어 계단을 내려가며 재하가 스스로에게 말하듯 괜찮을거야, 라고 반복했다. 시경의 그 미소. 언더커버를 떠났던 때와 같은 그 미소를 보는 순간 재하는 시경의 상태가 좋지 않다는 것을 알면서도 차마 시경을 데리고 가는 것을 고집할 수 없었다. 제발. 출구 쪽으로 달리며 재하는 입 속으로 빌고 또 빌었다. 부디, 두 사람 다 무사히 만나서 살아나오길.
82.
"이재하와 김항아가 탈출했습니다! 밖에서 근위대가 들어온 것 같습니다!"
급하게 들어오는 보고에 재신의 입가에 승리의 미소가 번진다. 내가 이긴거 같네. 부들부들 떨며 재신을 보던 남자의 얼굴이 기괴하게 일그러졌다. 드륵, 남자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의자다리가 끌렸다.
"건물 폭파시켜."
"예?"
"못 들었어? 폭파시키라고. 아니, 내가 직접 하지."
남자가 말릴틈도 없이 관제 기계가 있는 쪽으로 걸어가 버튼을 전부 누르자 쾅, 하는 폭발음이 들리며 방 안이 크게 흔들렸다. 천장에 금이가고 시멘트 가루가 떨어지는 순간 또 한번 크게 폭발음이 나고 한쪽 벽이 무너졌다. 미쳤어… 경악으로 떠는 재신을 보며 남자가 웃었다.
"말하지 않았나? 내가 원하는건, 절대적인 파멸이야."
그 순간 동하가 방아쇠를 당겼고 남자가 그 자리에서 쓰러졌다. 나가셔야 합니다, 공주님! 건물이 무너지고 수장이 사라진 나머지는 각자의 생명을 보전하기 위해 정신이 없었다. 재신의 몸이 바르르 떨렸다. 아, 안돼. 시경씨 찾아야해. 몸을 일으키려던 재신이 멈칫했다. 다리가 움직이질 않았다. 한계를 넘어선건 진작에 알고 있었다. 재신의 목소리에 끝내 울음이 섞여 나왔다.
"은시경씨… 찾아야 해요."
"저희가 찾겠습니다. 우선 나가셔야 합니다!"
"안돼… 오빠랑 언니는 무사하다잖아. 그럼 은시경씨 여기 어디 있을거야. 나 은시경씨 찾기 전엔 못 나가요. 은시경씨가 나 찾고 있을거야."
국왕과 왕비가 목숨을 건졌다. 이제 재신에게 남은건 시경 뿐이었다. 몸도 성하지 않을 시경을 여기에 두고 혼자 나갈 순 없었다. 재하를 살렸다는 안도가 오는 순간 시경을 또다시 잃을수도 있다는 극도의 공포가 재신을 지배했다. 한계까지 스스로를 몰아세웠던 긴장이 풀린 공주의 몸은 이내 폭풍우처럼 몰아치는 극단적인 감정에 순식간에 휩쓸려버렸다. 아, 안돼. 시경씨가 나 찾을거야. 시경씨가 나 찾고 있을거야. 스스로를 컨트롤할 힘을 잃은 재신의 눈에서 눈물이 방울방울 떨어졌다. 고집을 부리는 공주를 보는 세 사람의 머릿속에 동시에 시경의 명령이 떠올랐다.
「잊지 마. 무슨 일이 있어도 공주님 안전이 최우선이다.」
동하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대로 서 중사가 재신을 들어올려 들쳐메었다. 죄송합니다, 공주님. 나중에 징계 받겠습니다! 이게 무슨 짓이에요! 이거 놔요! 이거 놔! 재신이 소리를 지르며 서 중사의 등을 주먹으로 때렸지만 서 중사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순간 다른쪽 천장이 무너지며 커다란 시멘트 조각이 떨어졌다. 위험해! 김 소위가 재신의 머리쪽을 가리며 그대로 서 중사를 앞으로 밀었다. 빨리 움직여! 동하가 총으로 문 손잡이를 쏴서 문을 열었다. 공주님을 모시고 나가야 한다. 공주님을 안전하게 모시고 나가야만 한다. 세 사람의 머릿속에 한가지 생각밖에 없었다.
끊임없이 등 뒤로 건물이 무너지고 발걸음이 점점 빨라졌다. 이거 놔, 이거 놓으라고!! 악에 받힌 재신의 핏빛 목소리가 수라장이 된 건물 내의 소음에 묻혔고 이내 힘이 빠진 재신은 정신을 잃은 듯 축 늘어졌다. 세 사람이 재신과 함께 건물을 빠져나오자마자 마지막 큰 폭발음과 함께 건물이 폭발했다. 근위대와 함께 역시나 방금 건물을 빠져나온 재하와 항아가 네 사람을 향해 급하게 달려왔다.
"공주님!!"
"재신아!!"
다리에 힘이 풀린 서 중사가 재신을 내려놓자마자 쓰러지듯 주저앉고, 염 대위와 김 소위도 긴장이 풀려 비틀거렸다. 재신아! 바닥에 주저앉은 재신에게 달려간 재하가 재신의 어깨를 쥐어 끌어안자 고개를 떨구고 있던 재신이 겨우 머리를 들어 재하를 쳐다보았다.
"오빠… 괜찮아…?"
"그래, 나 괜찮아. 재신아. 재신아."
"오빠, 은시경씨는…? 여기 있지? 오빠랑 같이… 나온거지?"
재신의 눈이 재하를 향했지만 순간 재하는 재신의 눈을 피했다. 못 만났구나. 재신과 시경이 못 만났다는건 은시경은… 재하의 표정을 본 재신의 몸이 다시 떨려오기 시작했다. 여기… 없어? 은시경씨 여기 없는거야? 재신이 재하를 확 밀어냈다. 몸을 돌린 재신이 움직이지 않는 다리를 끌며 거의 기다시피 불길이 치솟아 타오르고 있는 건물 쪽을 향했다. 재신아, 안돼! 재신아! 뒤에서 재하가 재신을 붙들었지만 재신은 어디서 나온 힘인지 재하를 떨쳐내고 팔로 겨우 몸을 지탱하며 건물 쪽으로 기어갔다. 재신의 손톱 끝이 흙을 파다 부러지고 살점이 찢어져 피가 났지만 재신은 움직이지 않는 다리를 끌어당기며 몸부림을 쳤다. 안돼, 안돼! 재신의 눈 앞에서 커다란 불꽃이 모든 것을 집어삼키고 있었다. 그 날, 그 꿈 속에서처럼.
"안돼… 시경씨, 시경씨 아직 저 안에 있어. 시경씨! 시경씨!"
재신의 눈에서 눈물이 끊임없이 떨어졌다. 금방이라도 화염 속으로 들어갈 듯 불길을 향해 이를 악물고 팔을 짚어 움직이는 재신의 눈에 불 속에서 걸어나오는 그림자가 보였다. 아… 눈물과 재로 범벅이 된 재신의 얼굴이 순간 밝아졌다. 시경씨! 재신이 애타게 그림자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러나, 그런 재신에게 다가온 것은 시경이 아니었다. 재신에게 총을 겨눈 지영학이었다.
"움직이지 마. 움직이면 공주는 죽는다."
순식간에 근위대가 영학을 둘러쌌지만 늙은 비서는 태연하게 재신의 이마에 총을 겨누었다. 바닥에 주저앉은 채 영학을 올려다보는 재신의 눈이 믿을 수 없다는 듯 크게 뜨였다. 영학은 다리도 쓰지 못하는 공주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그의 기억 속 마지막 재신의 모습은 교복을 입은채 환궁해 재강에게 쪼르르 달려가 친구들과 영화를 보고 싶으니 용돈을 달라며 조르는 철부지 아가씨였다. 그냥 그렇게 마냥 예쁜 것만 아는 동화속 공주처럼 자랄 줄 알았던 왕실의 막내 공주는 여왕이 되어 자신의 눈 앞에 다시 나타났다. 재신의 눈동자가 꿰뚫어보듯 자신을 보는 순간, 영학은 모든 것이 엉망이 되어가는 것을 느꼈다. 은규태에 대한 지독한 열등감과, 그 열등감만큼이나 존경의 대상이었던 그가 왕실을 배신했다는 것을 안 순간의 분노. 자신이 모든 것을 무너뜨려버린 은규태는 정작 왕과 공주의 용서를 받고 여전히 비서실장으로 일할 뿐만 아니라 그의 아들이 공주와 결혼까지 하게 되는 것을 보았을 때 다시 느낀 근원을 알 수 없는 마음의 구멍까지.
그는 스스로가 악마와 손을 잡았다는 것을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악마에게 잡아먹힌다 해도 모든 것을 파괴해버리고 싶었다. 그러나 정작 공주가 눈 앞에 나타난 순간, 그는 결국 자신 역시 왕실의 사람이었음을 다시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그도 재강을 존경했고, 왕제시절 재하의 날라리짓에 골머리를 썩었고, 사랑스러운 막내공주를 귀여워했고 용돈도 주었던 시절이 있었다. 그 시절 또한 그의 삶이었다. 이제는 절대로 되찾을 수 없는 빛나던 삶의 한 토막. 그는 모든걸 끝내고 싶었다. 자신을 보는 공주의 눈에서 도망치고 싶었다. 끼릭, 하는 소리와 함께 그가 권총의 안전장치를 푸는 순간, 탕, 탕! 두 발의 총성이 울리며 영학이 천천히 앞으로 쓰러졌다. 영학의 심장과 입에서 뿜어져나오는 피가 분수처럼 재신의 머리 위로 쏟아져 재신의 눈 앞이 온통 핏빛으로 변했다.
그리고, 그 붉은색 시야 안에 정확히 영학을 향해 총을 겨눈 시경이 보였다.
"은… 시경…"
"공주님…!"
쿨럭, 마른 기침을 뱉어낸 시경이 총을 내던지고 비틀거리며 재신을 향해 걸어왔다. 재신은 멍하니 주저앉은 채 시경이 다가오는 것을 바라보았다. 찢어진 셔츠와 여기저기의 상처, 시경의 모습도 엉망진창이었다. 재신의 바로 앞까지 걸어온 시경이 쓰러지듯 재신의 앞에 앉았다.
"은시경… 은시경…!"
재신의 뺨으로 눈물이 넘쳐 흘렀다. 무사한 공주의 얼굴을 보자 시경의 눈동자도 무너지듯 일렁였다. 공주님 얼굴에 피가… 온 몸과 얼굴에 피를 뒤집어쓴 재신을 보며 시경이 손을 들어 재신의 얼굴을 닦았지만 시경의 손마저 지저분해 재신의 얼굴에서 피가 닦이긴 커녕 재와 함께 엉겨붙어 더 더러워지기만 했다. 서로를 끌어안을 생각조차 못한 채 두 사람은 마주 보고만 있었다. 재신은 은시경, 은시경, 마치 시경이 재신에게 선물했던 앵무새마냥 시경의 이름만을 반복해서 불렀고 시경은 재신에게 남은 피와 상처, 고통마저 다 닦아내려는 듯 닦아도 닦아도 깨끗해지지 않는 재신의 얼굴을 계속해서 손으로 닦아냈다. 두 사람의 뒤로 불길이 높게 치솟으며 푸르스름한 새벽의 하늘을 붉게 물들였다.
지독하게 긴 밤이었다.
_
블로그에 처음 이 에피 쓰고 싶단 말을 한게 아마 7월이었는데 설마 진짜 이렇게 거의 끝까지 오게 될 줄은 몰랐다. 이건 정말 읽어주시는 분들 덕분이라고밖에 말할 수가 없다. 내용에 대해 쓸 말이 많아서 길게 썼다가 지웠다. 그냥, 뭔가. 음. 허술하기 짝이 없는 부분들이 많지만 그래도 여기까지 왔다. 다행이다.
_
쓸 때는 보통 이입하지 않으려고 한다. 하지만 이번에는 쓰는 나도 어쩐지 힘들고 지쳐서 가능한 빨리 내용을 진행하고 싶었다. 나야말로 지독하게 긴 에피소드다. 아직 다음편이 있지만 어쨌든 둘이 무사히 만났으니 됐어… 이번편에 다 끝내려고 했더니 도저히 너무 길어서.
다음편은 안심하고(?) 보셔도 됩니다 으하하
_
아, 그리고 지난화에 찾으시는 분이 계셔서 급하게 추가합니다.
제가 갤에 올렸던 글을 찾으시는 분이 계신데, 제가 쓴 모든 글은 이 블로그에 있는게 전부입니다 :D
_
지난 화에 안보이시는 분들이 걱정된다고 썼더닠ㅋㅋㅋㅋ 덧글롴ㅋㅋㅋㅋㅋ 다 나타나셔섴ㅋㅋㅋㅋㅋㅋ 깜짝 놀랐어욬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다 맞습니다 제가 찾던 분들이 다 본인들 맞으시고요, 정말로. 전에도 말씀드렸지만 저 계속 덧글 달아주시는 분들은 거의 다 기억하고 덧글 내용도 기억하거든요. 헤헤.
_
그럼, 주말까지 남은 3일도 힘내세요. 화이팅!
특히 시험기간이신 대학생분들과, 수능이 얼마 안 남으신 고3분들은 더더욱 화이팅입니다 *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