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근위대원의 날들 - 25
미루어두었던 짧은 에피소드 하나.
61.
"국군의 날 관련행사에 왜 내가 나가?"
"야, 너 요새 군인들에게 인기 절정인거 모르냐. 군인의 로망. 군인의 천사."
"내가 왜?"
"왜는 왜야."
재하가 재신의 등 뒤에 서 있는 시경을 턱으로 가리켰다. 니 약혼자 때문이지. 넌 군인과 결혼할 공주고. 재신은 커다란 눈만 깜박이고 있고 시경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어 있다. 그런 불순한 의도로 공주님을 대하는 군인들을 공주님과 만나게 할 순 없습니다.
"야, 야. 이게 다 왕실 이미지 때문 아니야. 그리고 이런 일은 대체로 왕실에서 여자가 해왔는데, 그럼 어떻게 해. 항아가 가리? 인민군 교관 출신 왕비가 남한 국군 위문을? 육군병원 위문 매년 있는 중요한 일정이야. 근데 언제까지 엄마가 가실 수도 없으니까, 올해부턴 재신이가 해."
항아는 웬만하면 대비가 하던 일들을 다 물려받으려 했고 평소 성격대로 의욕적으로 왕비로서의 일에 임했지만 이 건만은 예외였다. 아무리 남북관계가 예전보다 좋아졌다 해도 한반도는 여전히 휴전상태였고 북한에서 온 왕비의 전직이 인민군 특수부대 교관이었다는 사실은 변할 수 없었다. 어쩔 수 없는 상황에 시무룩해하던 항아의 얼굴을 떠올린 재하가 인상을 찡그리자 재신이 재하와 시경의 사이에서 두 사람을 말린다. 알았어, 내가 가면 되잖아. 뭐가 문제야? 아픈 사람들 문병 가는건데. 허리에 야무지게 손을 얹은 채 두 남자의 눈싸움을 말리고는 재신이 일정 확정되면 얘기해, 하고는 재하의 집무실을 나섰다.
대한민국 최고의 군인을 약혼자로 둔 공주만큼 군인에게 위안이 되는 존재도 없다는 것을 시경도 재신도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시경이 무엇을 못마땅해 하는지 재신도 어렴풋이는 느낄 수 있었다. 걱정 마요, 은시경씨. 난 육군 병원 위문만 가니까. 부대엔 안가요. 거긴 오빠가 갈거야. 팔짱을 껴오며 웃는 재신에 겨우 시경의 굳은 얼굴도 풀린다.
재신의 위문 스케줄에는 시경도 전담 호위들과 함께 동행했고 취재를 위해 몇 개의 언론과 방송사도 함께 했다. 이렇게 명수 많은건 간만에 보네. 단정한 정장 차림으로 취재원들을 한 번 죽 훑어본 재신이 의전차량에 올랐다. 공주가 차에 탄 것을 확인하고 조수석에 오르는 예비부마를 향해 벌써부터 카메라 셔터음이 요란하게 울렸다.
병원 안에는 군에서 벌어진 각종 사건, 사고로 인해 입원한 환자들이 가득했다. 훈련 중 부상을 입거나 병치레가 깊어진 사병들도 있었고 부사관들이나 장교들도 가끔씩 눈에 띄었다. 바쁘게 움직이는 군의관들 사이로 재신은 병실마다 발걸음을 했고 환자들의 상태를 묻고 손을 잡아주었다. 그 중에서는 보기 흉한 상처를 가졌거나 머리 쪽을 다쳐 제대로 말을 하지 못하는 환자들도 있었지만 재신은 전혀 개의치 않았다. 시경은 한 발 떨어진 곳에서 재신이 깁스한 다리를 천장에 고정시킨 앳된 얼굴의 사병과 대화하는 장면을 지켜보았다. 군에 있었던 시간이 까마득한 예전처럼 느껴졌다. 군대에서의 생활은 끊임없는 외로움, 그리고 두려움과의 싸움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장교보다 부사관, 사병들이 더 심할 것이란 것도 시경은 알고 있었다. 재신이 웃는 얼굴로 악수를 청하자 사병이 두 손으로 재신의 손을 감싸쥐고 얼굴을 붉혔다. 시경은 말없이 재신을 에스코트했다. 말이 없는 시경에 복도를 걷던 재신이 살며시 고개를 돌려 시경을 바라보았다.
"왜 아무 말도 없어요?"
"예?"
"그냥, 아까부터 계속 아무 말도 없길래."
"옛날 생각을 좀 하고 있었습니다."
"군에 있었을 때?"
"네."
"은시경씨도 다친 적 있었어요?"
"아니요. 없습니다만 다쳐볼걸 그랬나, 하는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아니 왜?"
"공주님이 와주시지 않았을까 해서요."
얼굴색 하나 안 변하고 진지한 얼굴로 말도 안되는 농담을 하는 시경에 재신이 커다란 눈을 뜨고 황당하다는 듯 시경을 보다 결국 웃음을 터뜨렸다. 그 때 난 영국에 있었는데? 정말 심각한 문제인 듯 시경의 얼굴이 낭패를 띠자 재신의 맑은 웃음소리가 다시 복도에 울려퍼졌다.
약한 다리도 개의치 않은 채 한 층 한 층, 한 병실도 빼놓지 않고 방문하는 재신에 오히려 언론사들에서 먼저 나가 떨어졌다. 사진 분량을 채운 신문사 사진 기자들이 먼저 빠지고 방송국 카메라도 줄어들기 시작해 마지막 층에서는 겨우 한 팀만이 재신과 근위대원들을 따르고 있었다. 조용한 복도에 들어서며 재신이 작게 숨을 들이쉬었다.
"여기가 마지막 복도인가요?"
"네, 공주님."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되었네. 병원이 크긴 큰가봐요."
"이렇게 다 도실 필요는 없으신데, 공주님…"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누군 만나고 누군 안 만나고 그러는게 어딨어요. 엄마도 안 그러셨고 큰언니도 안 그랬어요."
안내를 맡은 군의관에게 단호한 얼굴로 말을 끝낸 재신이 조도가 한 단계 낮아진 복도를 천천히 걸었다. 여기가 마지막입니다. 엘리베이터 쪽으로 몸을 돌리는 군의관을 따르던 재신이 문이 약간 열린, 들어가지 않았던 방 앞에서 발을 멈추었다. 두 뼘정도 열린 방 안에는 호흡기를 단 채 누워 있는 환자 한 명과 그 머리맡에 처연한 얼굴로 앉아 있는 젊은 여성이 있었다. 가만히 방 안을 보던 재신이 손을 들어 수행원들을 들어오지 못하게 하고, 조심스럽게 병실 안으로 들어섰다. 미동도 없이 환자만을 바라보고 있던 아가씨가 갑작스레 등장한 공주에 깜짝 놀라 자리에서 일어섰다.
"고… 공주님?"
"안녕하세요. 갑자기 들어와서 미안해요."
오늘 위문일정 왔는데, 열려 있길래. 고개를 살짝 숙여 인사한 재신의 시선이 환자를 향했다. 환자는 공주가 방문한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숨소리 하나 변하지 않은 채 죽은듯이 잠들어 있었다. 재신의 커다란 눈동자가 환자의 몸에 연결된 여러 기계에 멈추었다. 공주의 시선을 따라갔던 아가씨가 이내 울먹이는 얼굴로 고개를 푹 숙였다. 제 남자친구에요. 의식이… 없어요.
"일년이 다 되어가요, 이제…"
"힘들었겠네요."
"직업군인이에요. 해외 파병 나갔었는데 분쟁에 휩쓸리는 바람에 현지 군인의 총에 맞아서…"
긴 생머리를 곱게 하나로 묶은 아가씨는 재신과 비슷한 또래로 보였다. 재신이 살며시 그녀의 손을 쥐었다. 손톱 자국이 날 정도로 꽉 주먹을 쥐었던 손은 피가 안 통해 차갑기 그지 없었다. 붙잡아 둘 수 없는 그녀의 시간과 멈춰 있는 그의 시간 사이에서 속절없이 깨어 있는 이만 고통스러워 하는 것이 보였다. 환자의 곁에 재신과 나란히 선 그녀가 손을 뻗어 까슬하게 마른 환자의 입술을 매만졌다. 알려나 모르겠네요. 공주님 오신거. 인증샷이라도 남겨 놓아야 할까봐요. 뺨을 타고 흐른 눈물이 입술 사이로 사라졌다. 눈물조차 메마른 얼굴이었다. …낮엔 못 와서 밤에만 와요. 밤에 와야 이 사람 부모님이 안 계시거든요.
"처음에는 다들 깨어날거라고 했으면서, 그랬으면서… 제가 지금 스물아홉이거든요. 이젠 남자친구 부모님조차 그만 오라고…"
나이 찼으니 다른 남자 찾아 결혼하라고, 못 깨어날거같이 그렇게 말해요. 왜 다들 포기하는걸까요. 나한텐 이 사람, 아직 내 눈 앞에 있는데. 무서워요, 공주님. 재신에게 말하는 것인지 혼잣말인지 알 수 없이 그녀가 말을 이었다. 재신은 말없이 꼭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알아요. 공주의 그 한마디가 끝내 그녀를 울렸다. 아마도 공주는 이 공간에 들어온 사람 중 유일하게 진심으로 그녀를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일 것이었다. 혼자만 흘러가는 시간에 대한 두려움, 과거는 과거로 돌려야 한다는 주변의 말들, 이해하지만 받아들일 수 없는 이야기들. 재신은 죽은 이를 기다렸다. 그녀는 살았지만 돌아오지 않는 이를 기다린다. 누구의 기다림이 더 고통스러울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오래 누워 있어 군인답지 않게 바싹 마른 팔목을 들어 양 손으로 애써 체온을 나누며 그녀가 울음을 삼켰다.
"이 사람, 안 깨어나면 어떡하죠? 가야할 사람을 제가 억지로 붙들고 있는거면… 이 사람 나 때문에 힘든거면… 그런거면 어떡해요, 공주님…"
"그건 아닐겁니다."
낮고 단호한 목소리가 등 뒤에서 들려왔다. 공주와 그녀가 동시에 뒤돌자 어느새 들어온 것인지 병실 안으로 발을 들인 시경이 서 있었다. 빈틈없이 경호수트를 차려 입은 시경이 군인답게 단정한 걸음걸이로 한 발 더, 환자가 누워 있는 침대 쪽으로 가까이 왔다. 시경의 검은 눈동자가 환자의 이름표를 훑었다. …이 중사가 죽지 않은건 아가씨 때문일겁니다. 시경의 입에서 나온 의외의 말에 그녀의 눈이 동그래졌다. 네?
"사람이 죽기 직전 살아온 삶이 파노라마처럼 흘러가는걸 플래시백이라고 한다 합니다. 저도 보았습니다. 총에 맞았던 그 순간, 눈 앞에 일생이 스쳐지나가더군요. 사관학교 시절부터 전진부대에서, WOC 준비했을 때, 전하를 뵙고 근위대에 돌아온 후… 장면장면이 스쳐지나가는 것을 보면서 제가 죽는다고 생각했습니다. 아마 실제로 죽을 운명이었을겁니다."
시경의 입술을 통해 나오는 죽음의 순간에 대한 말에 재신의 어깨가 움찔, 떨렸다. 시경이 한 번도 한 적 없는 이야기였다. 시경의 표정은 평소와 다름 없이 덤덤했다. 스스로에게 일어난 일을 회상한다기보다는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하는 것 같이 보일 정도였다. 환자를 내려다보는 시경의 입가가 희미하게 호를 그렸다.
"그 끝에… 공주님이 보였습니다. 공주님의 얼굴을 본 순간, 죽을 수 없단 생각이 들었습니다. 여기서 죽을 수는 없다고."
이 중사도 보았을겁니다. 저와 같은 것을. 그래서 죽지 않은겁니다. 죽을 수 없다고 생각했기에 죽지 않은 걸겁니다. 시경의 얼굴은 더없이 진지했다. 이런 식으로 총 맞고 즉사하지 않는건 생각보다 어렵습니다. 살아 돌아온건, 우연이라 할 수는 없습니다. 시경의 곧은 눈이 여전히 놀란 표정으로 서 있는 그녀를 향했다. 그거 아십니까. 아득한 목소리가 메마른 병실에 낮은 울림을 냈다.
"이렇게 눈을 감고 귀를 닫고 있는 것처럼 보여도, 들립니다. 생과 사의 갈림길에 홀로 서 있으면 목소리가 들립니다. 그럼 그 목소리를 따라 걷습니다. 걷고, 또 걷다 보면 언젠가 어디엔가 도착하겠지, 그런 마음으로."
이렇게 곁에서 간절히 부르는 사람이 있으니… 이 중사도 그 목소리를 따라 걸어오고 있을겁니다. 아직 눈을 못 뜨는건, 오는 길이 조금 멀어서. 그래서일겁니다. 그녀의 입술에서 차마 담지 못한 울음소리가 새어나왔다. 투명한 눈물이 방울방울 떨어져 병실 바닥을 적셨다. 안아주는 것은 재신의 몫이었다.
62.
재신은 한 발 앞에서 걸어가는 시경의 등을 물끄러미 보며 발걸음을 옮겼다. 딱 떨어지는 각이 진 어깨와 그 아래의 반듯한 등이 흔들림없이 재신의 앞을 지키고 있었다. 소령님이 과묵하신 줄 알았더니 그런 위로하는 법도 아시네요. 유일하게 남아 있던 취재원이 소근소근 재신에게 말을 걸었다. 그리 위로하려 꺼낸 말은 아닐거에요. 재신이 잔잔히 대답했다.
"저 사람, 진실된 말밖에 할 줄 모르거든요. 온전히 진심이었을거에요. 전하고 싶어서, 마음 속에 있는 말을 전하고 싶어서, 속에 있는 말을 그대로 다 꺼내보인 것이었을거에요. "
정말 그렇게 생각했고, 그럴거라 믿어 그렇게 전한걸거에요. 시경의 등을 바라보는 재신의 눈이 따스했다. 그런 면에 좋아하게 된 것일수도 있고. 재신의 뒷말은 고운 입술 안으로 삼켜졌다. …공주님? 시경이 뒤를 돌아보자 재신이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웃었다. 빨리 가요.
63.
"정말 내가 보였어요?"
"네."
"한번도… 그런 말 한 적 없었잖아."
"그 때 얘기를 하면, 공주님이 슬퍼하시니까요."
"정말로, 나 때문에 살았어요?"
"공주님이 보이는 순간 생각했습니다. 나는 죽어선 안된다. 공주님을 또 울릴 순 없다. 군인으로서 목숨을 버리는걸 아깝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었는데 그 순간 너무나 죽고 싶지 않아졌습니다."
시경의 손가락이 재신의 머리카락을 쓸어내렸다. 다정한 손길에서 느껴지는 따뜻한 체온에 재신은 그대로 전신을 시경에게 맡기듯 몸을 기대었다. 시경의 품에 기대어 안긴채 재신이 시경의 손바닥에 뺨을 대었다. 시경의 나머지 한 팔이 재신의 몸을 감아 안았다.
"내 목소리가 닿은걸거에요. 그 때 난 은시경씨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아무것도 몰랐지만… 숙제 열심히 하고 있으니 어서 돌아오라고 매일 말했어요. 은시경씨한테. 내 목소리가, 은시경씨한테 닿았나봐."
다행입니다.
응, 참 다행이야. 다행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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꽤 이전에 생각했던 에피소드. 자선음반과 묶으려고 했는데 도무지 묶을 분위기가 아니라 짧지만.
생각한 것처럼 잘 풀리지 않아 아쉬운데 어쩐지 기분이 도무지 내일로 미루면 안될거 같은 뭔가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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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가장 좋아하는 은시경의 부분은, 올곧고 그 진심을 그대로 전해오는 점. 어떠한 꾸밈도 없이 가장 진실되게. 그것이 공주님에게든 전하에게든 원작 은시경의 그 진실된 면모가 너무나 좋았다.
_
플래시백은 과학적으로 설명되는 현상은 아닌데, 가설 중 이런 것이 있다. 인간의 뇌는 낯선 일을 인지하면 기억하고 있는 내에서 비슷한 경험을 찾으려 한다고 한다. 하지만 인간에게 '죽음'이란 단 한번밖에 찾아오지 않기에 결국 기억 전체를 훑어도 비슷한 경험은 좀체 나오지 않는다. 그 기억 전체를 훑는 것이 플래시백이 아닌가, 그런 가설. 아무런 과학적 근거는 없지만 그 이야기를 들었을 때 어쩐지 아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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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행이죠, 참.
_
늦었네요. 끝마쳐야겠단 생각에 너무 늦게까지 깨어 있었으니 저도 자야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