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근위대원의 날들 - 10 (외전)
외전: 염동하 대위를 둘러싼 로맨틱 코미디
22.
서 중사는 오도독 오도독 간식거리를 씹으며 서류를 보고 있는 염 대위를 슬쩍 쳐다보았다. 왕실근위대 제 2 중대장 염동하 대위. 중위 시절 은시경 소령(당시 대위)과 함께 WOC를 계기로 근위대에 들어온 엘리트 장교라고. WOC 지원 당시만 해도 다분히 개인적인 욕심이 있었다고 하던데 우여곡절을 겪은 지금은 어쨌거나 든든한 군인이다. 소문에는 존 마이어 체포 작전 때도 함께 했고 국왕 전하 비밀회담 따라가 왕비님에게 총까지 겨누어야 했다는데 살면서 그런 일 겪는 군인이 몇이나 되나 싶고. 군인 성격이야 그렇다지만 염동하 대위가 근위대에 들어오기 전이나 후나 못 버리는 버릇이 있다면 여자 관련이었다. 별명이 자칭 타칭 강남날라리라더니, 비번 때면 늘 클럽에서 살고 한달이 멀다 하고 여자친구가 바뀌었다. 어이구, 저거 언제 철들라나. 한심하단 눈으로 염 대위를 보던 전하의 조인트를 왕비님께서 까버리신 적도 있었다. 기거이 전하가 하실 말씀입네까? 나 아니었으면 전하도 지금쯤 개철처리마냥 저러고 살았을겁네다. 누가 군관 출신 아니랄까봐 걷어차시는 솜씨도 남다르시다.
아무튼, 이렇게 모두가 몰래몰래 염 대위를 염탐하는 것은 염 대위만 모르는 이유가 있었다. 최근 궁에 새 얼굴이 많아졌다. 궁인들은 직급과 연차에 따라 준공무원 대우를 받는데 이직률이 낮아 필요할 때만 인원을 충원했다. 그런데 최근 세자가 태어나 노련한 궁인들이 세자의 육아를 위해 왕비궁으로 옮겨가고 그간 결혼 등의 이유로 한둘씩 줄었던 궁인 자리를 한번에 신입으로 채운 것이다. 특히 신입궁원이 많아진 곳이 바로 공주궁이었다. 아무래도 나이가 있는 대비나 갓 태어난 아이도 있는 왕비보다는 젊고 미혼인 공주 쪽이 궁에 처음 들어온 이들이 적응하기도 쉽고 궁의 일을 배우기도 쉬웠기 때문이었다. 재신의 일거수일투족에 함께 하는 전담궁인도 신입이 한 명 생겼다. 갓 대학을 졸업한 서윤희라는 스물다섯의 아가씨였다. 재신은 여동생이라도 생긴 것마냥 기뻐하며 신입을 맞아주었다.
「궁의 일이 복잡하고 까다로운게 많지만 금방 적응할거에요. 앞으로 잘 부탁해요.」
재신은 어린 새 궁인이 주눅들거나 소외감을 느끼지 않도록 특별히 신경을 썼다. 연차 높은 궁인들에게 말도 잘 해두고 쇼핑을 갈 때 윤희의 악세사리도 사주거나, 자신의 구두를 주기도 했다. 윤희는 몸둘바를 몰라하며 두 뺨을 붉히고 공주를 언니처럼 따랐다.
…그랬다. 이 궁인이 문제라면 문제였다.
원칙적으로 궁내연애는 금지되어 있었다. 모든 사내연애가 환영받지 못하는 것과 같은 이유에서였다. 하지만 젊은 남녀가 모여 있는 곳에선 언제나 정분이 나듯 근위대나 비서들과 궁인들의 연애사건은 드문 일이 아니었다. 결혼을 한 커플들도 개중 심심치 않게 있었다. 특히나 외모로 뽑는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반반한 장교며 부사관만 모아놓은 근위대와 궁인들 사이에서 사랑의 불꽃이 튀지 않을리 없었다. 예전에는 엄격히 금지되고 걸리면 간혹 근신명령까지 내려졌지만 지금은 그 근신명령을 내려야 할 근위대장이 공주와 목하 열애중이니 남을 뭐라할 처지가 아니었다.
새로 공주의 전담궁인이 되어 공주와 늘 동행하던 이 신입궁인이 그만, 중대장에게 첫눈에 반해버린 것이었다. 동하만 나타나면 얼굴을 붉히거나 공주가 공식일정을 진행하는 동안에도 흘끔흘끔 경호중인 동하의 옆모습을 보곤 하니 공주의 다른 전담궁인이나 전담호위들이 모를래야 모를수가 없었다. 공주님과 대대장님의 연애도 이제 제법 시간이 지나 구경거리로선 시들해졌겠다 새로운 가십거리의 출현에 모두들 아닌 척 귀를 쫑긋 눈을 반짝하며 윤희를 지켜보고 있었던 것이다.
자신이 새로운 소문의 중심이 된걸 아는지 모르는지 그렇게 눈치 빠르고 여자 잘 안다고 자부하던 중대장께서는 태풍의 눈처럼 홀로 유유자적 즐겁게 시경에게 딴죽을 걸다가 한 대 맞고 공주님에게 농담을 하는 평범한 날들을 보내고 있었다. 서 중사는 눈을 가늘게 뜨고 동하를 쳐다보았다. 모르는척 하는건가, 모르는건가. 강남 날라리라더니 순 허당 아냐 이거.
"뭘 그렇게 보냐? 할 말 있어?"
"아닙니다!"
"몇시야?"
"두시 반입니다!"
"벌써 그렇게 됐어? 슬슬 나가야 할텐데 대대장님 왜 안오시… 아, 역시 양반은 못되신다니까."
오후엔 재신의 인터뷰 스케줄이 있었다. 경호 준비를 위해 일어서려는 차 시경이 근위대 휴게실로 들어왔다. 준비해, 가자. 시경의 등장에 담당 근위대원들이 다 자리에서 일어선다. 신문사 인터뷰고 비공개니까 최소인원으로 간다. 계획서 다 읽었지? 여부가 있겠습니까. 언제 저희가 경호 구멍내는거 보셨어요. 장난스레 경례를 붙이는 동하를 시경이 미묘한 표정으로 쳐다보았다.
"왜그러십니까?"
"…아니야. 가자."
약간 묘한 얼굴로 동하를 보던 시경이 이내 발걸음을 공주궁 내실 쪽으로 옮겼다. 준비를 끝낸 재신은 소파에 앉아 근위대를 기다리고 있었다.
"출발합니다, 공주님."
"응, 오늘도 잘 부탁해요."
깔끔하게 올려 보석이 풍성하게 박힌 핀을 꽂고 슬림한 스커트와 새하얀 블라우스를 입은 재신이 환하게 웃으며 시경의 에스코트에 응했다.
인터뷰는 신문사 사옥 안에서 비공개로 진행되었다. 테이블을 마주두고 앉은 재신과 기자가 인터뷰를 하고 있었고 사진기자 한 명이 연신 재신의 사진을 찍느라 바빴다. 근위대원들과 궁인들은 문가에 서서 재신의 인터뷰가 끝나길 기다리고 있었다. 어깨 아래로 조금 내려오는 머리카락을 깔끔하게 뒤로 묶은 윤희는 한창 음악 이야기에 열중하고 있는 공주님을 보다가 살그머니 시선을 돌렸다. 미동도 없이 서있는 동하의 옆모습이 보였다. 윤희의 뺨이 또 붉어졌다. 흘끔흘끔 시선을 돌리던 윤희가 순간 흠칫, 몸이 굳었다. 시선을 느꼈는지 동하의 옆에 서 있던 시경이 휙 윤희 쪽을 돌아보았기 때문이다. 깜짝 놀란 윤희의 시선과 시경의 눈이 공중에서 부딪혔다. 무표정한 얼굴로 윤희를 잠시 보던 시경은 다시 고개를 돌려 재신을 바라보았다. 어, 어쩌지. 윤희의 얼굴이 난처한 빛을 띠었다.
"잠시 쉬었다 마저 진행하죠."
"네, 고생하셨습니다 공주님."
"아니에요. 기자님이 수고가 많으시죠. 윤희씨, 나 눈 밑에 번진거 같아요. 미안한데 좀 고쳐줄 수 있어요?"
"네, 공주님."
물을 마시며 재신이 윤희를 부르자 윤희가 재빨리 메이크업 도구들을 챙겨서 재신에게 다가갔다. 윤희가 정성스럽게 재신의 눈 밑에 떨어진 마스카라 가루며 번진 아이라인을 고치고 물을 마시느라 지워진 입술에 다시 립스틱을 발라주는 너머로 재신의 반짝이는 눈이 죽 대기중인 근위대를 훑었다. 시경과 마주친 눈이 살포시 반달을 그리며 웃고, 근위대원들에게 일일이 눈인사를 한 재신의 눈이 딱, 동하에게 고정되었다. 흐음. 동하가 모르게 가늘게 떴던 눈을 다시 깜빡이며 재신이 마무리를 지은 윤희에게 고맙다고 인사를 해보였다.
"맞다, 시경씨. 나 내일은 일정 없죠?"
"네. 내일은 공식 일정은 없으십니다."
"그럼… 내일 수영장 가면 안되요? 덥잖아요."
"수영장…입니까?"
"응!"
"그건…"
"또, 안됩니다. 사람 많으신 곳은 위험합니다. 이러려고 그러죠? 누가 사람 많은 수영장 간대요? W호텔에 연락해서 VIP전용 풀장 잡아달라고 하면 되잖아요. 그 쪽은 왕실이랑 연계되어 있어서 왕실에서 쓰겠다고 하면 우선적으로 해주니까. 응? 갈래요. 덥단 말이야."
"…호텔에 우선 연락해보겠습니다."
결국 또 공주님에게 이기지 못한 시경이 긍정에 가까운 대답을 하자 재신이 환하게 웃었다. 윤희씨, 윤희씨랑 서영씨도 같이 가자. 나만 혼자 가면 재미 없잖아. 오전에 출발해서 수영복도 사구, 같이 놀아요. 응? 생각만 해도 신난다는 듯 또래의 궁인들을 조르는 재신의 모습에 윤희가 어쩔줄 몰라한다. 그러면서도 공주의 권유에 설레는 것은 사실이다.
갑작스레 생긴 비공식 일정에 시경은 늘 그렇듯 동하와 서 중사, 김 소위만을 소집했다. 만만한게 저라고 투덜대면서도 서 중사는 공주님을 경호하러 가는 것이 싫지 않았다. 그만큼 공주님이 자신을 편하게 생각하신다는 뜻이기도 했고 시경이 자신을 신뢰한다는 뜻이기도 했으니.
재신은 공주궁 궁인들을 다 데리고 가고 싶어했지만 재신보다 나이가 많은 궁인들은 되었다며 손사래를 쳐 결국 재신보다 나이가 어린 막내궁인인 윤희와 서영만을 데리고 출발했다. 수영복을 사겠다며 호텔 1층의 수영복 매장부터 들어간 재신과 궁인들이 꺅꺅거리며 수영복을 고르는 것을 멀리서 지켜보고 있는 시경의 미간에 가늘게 주름이 잡혔다. 공주님, 까만색은 어떠세요? 공주님은 몸매가 좋으셔서 이런 디자인도 잘 어울리실거 같아요! 파란색은 어떠세요? 시원해보이는데. 궁인들이 골라오는 디자인이며 재신이 손에 들어보는 수영복들 모두 과감하게 파인 비키니들이었다. 가슴이 깊게 파인 홀터넥이라든가 가느다란 어깨끈에 의지하는 디자인들은 보기만 해도 아슬아슬했다. 저런 디자인의 수영복을 입으신 공주님을 근위대원들이 볼 생각을 하니 속에서 치밀어오르는 느낌에 시경은 불편한 기색을 감추지 않았다. 음, 이 검은색이랑 빨간색 중에 고를래. 양 손에 검은색과 빨간색 수영복을 들고 진지한 표정으로 고르고 있는 재신을 보며 시경은 입속으로 빨간색, 빨간색. 하고 중얼거렸다. 검은색보단 그래도 빨간색이 나았다. 한참을 고민하던 재신이 빨간색! 하고 외치자 시경의 꽉 쥔 주먹에 순간 힘이 들어갔다.
"다 골랐어요? 서영씨는? 와! 이거 예쁘다! 응? 윤희씨 아직 못골랐어?"
"공주님 저는 이거…"
"음, 안돼 이건. 너무 나이들어보여! 나이도 파릇파릇하면서 뭐 이렇게 얌전한걸 골랐어요? 한살이라도 젊을 때 팍팍 과감한걸 입어줘야지. 난 스물 다섯땐 무릎 위 한 뼘 아래로 내려오는건 옷 취급도 안했어. 이거 어때?"
"공주님 이건 너무 야한데…"
"뭐가 야해, 이 정도는 입어줘야지. 자, 윤희씨거는 이걸로 결정! 오늘은 내가 사줄게!"
궁인들의 수영복까지 싹 다 손에 든 재신이 계산대 위에 수영복들을 올려놓고 카드를 꺼냈다. 쇼핑백을 하나씩 사이좋게 나눠든 재신이 영 안좋은 표정을 하고 있는 시경을 보며 키득키득 웃었다.
"왜 얼굴이 그래요, 은시경씨?"
"공주님 그 수영복은,"
"너무 품위 없어?"
"그…"
"야해서? 수영복인데 뭘."
"싫습니다. 근위대원들 다 있는데 공주님 그런 차림."
눈을 깜빡깜빡하며 시경을 올려다보던 재신이 까르르 웃었다. 은시경씨 앞에서는 되고? 그 말에 화르륵 시경의 얼굴이 붉어진다. 걱정마요. 은시경씨가 걱정하는 공주의 품위 안해칠테니까. 까치발을 들어 시경의 귓가에 입술을 가져다댄 재신이 조그맣게 속삭였다. 야한 옷은 시경씨 앞에서만 입을게. 새 속옷 샀는데 언제 패션쇼 해줄까요? 고, 공주님. 누가 들을까 무서워 귀까지 빨개진 시경이 귀여워 재신은 또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빙그르르 돌아 엘리베이터를 향했다.
"은시경씨."
"네?"
"수영 잘해요?"
"군인은 기본적으로 배웁니다."
"난 수영 잘하는데."
"…네?"
"나 수영, 무지 잘해요. 어릴 때 배웠는데 선생님이 소질 있다고 막 그랬어."
"그러십니까."
"그러니까, 오늘 빠지면 안 구해줘도 되요."
"그럴순 없습니다."
"오늘은 안 구해줘도 돼."
입술을 슬쩍 당겨 웃은 재신이 눈짓으로 동하를 가리켰다. 재신의 눈동자가 장난스럽게 반짝였다. 알아들은건지 못알아들은건지 모호한 표정의 시경을 보던 재신이 알았죠? 나 수영 잘해. 다시 한 번 다짐을 받듯 말하고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근위대원들이 수영장 안전을 먼저 체크하는 동안 옷을 갈아입은 재신과 궁인들이 풀장에 모습을 드러냈다. 아무리 아무도 없다 해도 젊은 남자들인 근위대원들 앞에서 몸매를 드러내는 것이 부끄러운 듯 약간 수줍은 얼굴들의 궁인들 앞에서 걸어들어오는 재신은 수영복 위로 시스루 스타일의 흰 셔츠를 걸치고 있었다. 잔뜩 긴장해 미간을 찡그린 표정이었던 시경의 얼굴이 아주 약간 풀어졌다. …안에 다 비치는데. 그래도 공주님 나름의 타협점이었을걸 생각하니 좋게 생각하고 싶지만 상체는 그렇다 쳐도 저 늘씬하게 뻗은 맨다리는 어쩌실 셈이지. 시경은 괜히 근위대원들을 한번 째려보았다.
서 중사는 멀리서 걸어오는 공주님을 넋을 잃고 쳐다보았다. 반쯤 비치는 셔츠 안으로 살짝살짝 보일 듯 말 듯한 가슴라인과 잘록한 허리, 그리고 수영복 아래로 쭉 뻗은 긴 다리. 시경이 노려보지 않았으면 침이라도 흘릴 기세였다. 왕실은 근위대도 궁인도 얼굴을 보고 뽑는지 궁인들도 다들 날씬한 몸매를 자랑했다. 긁적이며 시선을 거두던 서 중사의 눈에 동하가 들어왔다. …어라? 동하의 시선이 향한 곳을 죽 따라갔던 서 중사가 다시 휙, 동하를 쳐다보았다. 흐음.
발 끝부터 살짝 물에 담가보던 재신이 이내 풀장 안으로 들어갔다. 아, 시원하다! 팔을 걸친채로 근위대원들을 올려다보며 재신이 아쉽다는 듯 말했다. 같이 놀면 좋은데. 정말 안되요? 안됩니다.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단호하게 거절하는 시경에 재신이 아랫입술을 쑥 내밀었다. 답답이. 답답하셔도 어쩔 수 없습니다. 시경의 고집을 꺾을 수 없음을 아는 재신이 이내 가볍게 몸을 움직여 얕은 곳에서 궁인들과 놀기 시작했다.
한참 비치볼을 가지고 놀던 재신이 김 소위가 가져온 음료수를 마시며 귀에 들어간 물을 빼내었다. 맨얼굴에 가깝게 옅은 화장만 한 재신이 유독 청순해보였다. 찰칵, 휴대폰 카메라 소리가 들렸다. 또. 또 대대장님. 서 중사가 휙, 시경을 쳐다보았다. 응? 시경의 손에는 아무 것도 들려있지 않았다. 이상하다. 주변을 둘러본 서 중사가 고개를 갸웃했다. 그럼 누가 찍은거지.
반쯤 마신 음료수를 쟁반에 내려놓은 재신이 풀장 바로 옆에 서 있는 윤희 쪽으로 다가갔다. 재신의 시선이 흘끔, 풀장 가까이 서 있는 시경과 동하를 향했다.
"윤희씨 수영 잘해요? 난 엄청 잘하는데."
"아, 전 배워본 적이 없어서요. 못해요, 공주님."
"그래요? 물에는 떠요? 물이 무섭거나 한건 아니구?"
"아니요, 아마 못 뜰거에요. 물이 무섭진 않은데…"
흐음, 그렇구나. 다정한 얼굴로 윤희를 보던 재신이 순간 짖궂은 미소를 띠었다. 그리고 비틀거리는 척 그대로 윤희의 몸과 함께 풍덩, 풀장으로 빠졌다. 공주님! 시경의 눈이 커졌다. 서 중사와 김 소위, 다른 궁인들은 갑자기 생긴 일에 놀라 눈만 커다래진 채였다. 그 순간 첨벙, 물에 뛰어드는 소리가 났다.
…응? 서 중사는 눈을 의심했다. 뛰어든건 시경이 아니었다. 동하였다.
그리고 건져올려진건 공주님이 아니었다. 윤희였다.
당황해 물 속을 살피던 시경의 얼굴에마저 황당함이 그려졌다. 공주와 궁인이 빠졌다. 공주의 전담호위인 근위대 중대장이 뛰어들었다. 그런데 여전히 공주는 물에 빠져 있다.
윤희를 풀장 밖으로 건져올린 동하가 윤희가 숨을 쉬는걸 확인하고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괜찮아요? 어깨를 잡고 묻는 동하에게 눈을 질끈 감았다 뜬 윤희가 겨우 고개를 끄덕여보였다. 안심한 듯 동하의 긴장한 얼굴이 살짝 풀어졌다. 그리고 잠시 후, 모두의 시선을 받고서야 동하는 자신이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깨달았다. 동하의 얼굴이 새파래지며 풀장 쪽을 돌아보았다. 그 때, 풀장 안에서 첨벙,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머리 끝까지 흠뻑 젖은 재신이었다.
"고, 공주님!"
"와, 염 대위 그렇게 안봤는데. 내 전담 맞아요? 이거 불안해서 경호 맡기겠어요? 공주는 내팽개치고말이야."
재신이 눈을 깜빡이자 재신의 긴 속눈썹에서 후두둑 물방울이 떨어진다. 아직도 동하의 팔을 꽉 잡고 있던 윤희도 비로소 주변이 보이기 시작한건지 상황을 파악하고는 얼굴이 새빨개진다. 서 중사는 그제야 이 상황을 이해했다. 깜찍한 공주님의 짖궂은 장난을. 시경도 눈가를 쓸어내린다. 아까 그렇게 수영 잘하니 구하지 않아도 된다고 강조한건 이거 때문이었나. 재신이 기분이 상한 듯 얼굴을 굳힌채 입을 열었다.
"공주는 이렇게 물 속에 버려두고, 막 그런다 이거죠. 내가 이거 어떻게 해석해야해? 응? 공주궁에서 지금 공주 몰래 연애사업이 벌어지고 있는건가? 공주궁에서는 공주 허락 없이는 숨도 쉬면 안되는거 몰라요? 은시경씨, 이거 어떻게 된거에요? 근위대 군기가 이래도 돼?"
흘끔, 모두가 시경의 눈치를 보았다. 시경이 고개를 돌려 동하를 쳐다보았다. 융통성이라고는 없는 상관을 가장 잘 아는 동하의 얼굴에 긴장이 흐른다. 시경의 얼굴은 평소와 다를 바 없이 입술이 딱 다물려 무표정했다. 재신만이 시경의 입꼬리가 아주 미세하게 올라간 것을 눈치채고 있었다.
"염동하. 왕실근위대 조항 4조 3항."
"…왕실 근위대는 모든 궁내에서의 사적인 관계를 금지한다. 사사로운 관계가 드러날 시 해당 근위대원은 대대장 직권처분으로 2주 이하의 근신, 2개월 이하의 감봉에 처해진다."
동하의 복창에 윤희의 얼굴이 오히려 더 창백해진다. 어떡해, 나 때문에. 윤희가 도와달라는 듯 재신을 쳐다보았지만 풀장 안의 재신은 나는 모른다는 얼굴로 시경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모든 궁인들과 근위대원들이 시경의 입에서 떨어질 처분을 기다렸다. 서 중사 역시 저도 모르게 느껴지는 긴장감에 몸을 떨었다. 아마도 공주님의 장난인 것 같긴 한데, 표정을 보니 아닌 거 같기도 하다. 게다가 처분은 대대장 직권이니 시경에게 달려 있다. 연애사업 이전에 전담호위로서 공주님의 안전을 최우선으로 하지 않은 것은 큰 처벌대상이었다.
"염동하."
"대위 염동하!"
"넌 당분간 공주님 전담호위에서 제외다. 공주님의 안전을 최우선으로 삼지 않는 중대장을 공주님 전담으로 할 순 없어."
"죄송합니다!"
"…그리고,"
시경이 씩 웃었다.
"넌 당분간 비번도 없다. 넌 비번날이면 클럽 가서 여자 꼬시는 거밖에 안하잖아."
"…대대장님!"
"왜, 불만 있어?"
"………근신이나 감봉은 없…는겁니까?"
조심스레 묻는 동하에게 시경이 어깨를 으쓱했다. 궁내에서 사적인 관계가 드러나면 처벌대상이지. 너 뭐, 서윤희씨랑 사적인 관계야? 시경의 물음에 동하가 우물쭈물했다. 윤희는 얼굴만 새빨개져있었다. 그 둘을 쳐다보던 시경이 재신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아직도 풀장 안에 있는 재신이 시경을 향해 팔을 벌렸다. 나 추워요, 꺼내줘요. 재신을 끌어올려주기 위해 무릎을 굽혀 앉은 시경이 재신을 향해 팔을 뻗은 순간, 재신이 시경을 확 잡아당겼다. 풍덩, 하는 소리와 함께 시경이 머리부터 풀장으로 빠졌다. 푸핫, 푹 젖은채 몸을 일으킨 시경을 보며 재신이 까르르 웃었다.
"은시경씨도 푹 젖었네. 어떡하죠?"
이왕 이렇게 된거 나랑 놀아요. 재신이 사르르 웃으며 고개를 갸웃해보이자 턱 끝을 타고 물방울이 톡, 떨어져 맑은 소리를 냈다. 시경이 뭐라 대답하기도 전 재신이 휙, 궁인들을 쳐다보았다. 서영씨, 난 은시경씨랑 놀거에요 이제. 탈의실 반대편에 다른 풀장 있어요. 그 쪽이랑 12층 뷔페 인원어치 다 계산해놨으니 근위대원들이랑 다들 더 놀다가 저녁 먹어요. 김 소위, 서 중사도 오늘 수고 많았으니까 놀다 가요.
"윤희씨 미안해요. 난 그냥 장난 좀 치려고 했던건데."
"아, 아니에요 공주님."
"염 대위가 좀 데려다주죠?"
"네… 네?"
"싫어요? 싫으면 김 소위가 데려다주든가."
"아… 아닙니다!"
"아, 그리고 염 대위."
"네, 공주님!"
"아까 도촬한 사진 지워요. 막 그렇게 수영복 입은 아가씨 사진 몰래 찍는건 좀 아니죠."
…아까 찰칵 소리가 그거였나. 짜게 식은 눈으로 서 중사가 돌아보자 답지 않게 동하는 언제나 능글맞은 그답지 않게 귀까지 시뻘개져 있었다. 가봐. 시경의 허락이 떨어지자 동하가 조심스럽게 윤희를 일으켜주었다. 두 사람의 뒷모습을 보며 재신이 웃었다. 꼭 말 많은 남자들은 멍석을 깔아주면 못한다니까. 풀장에 기대어 있던 몸을 일으키며 재신이 시경에게 한발짝 다가갔다. 물에 젖어 무거워진 자켓을 벗겨 던지고 재신이 스르륵 시경의 넥타이를 풀었다.
"재밌었죠?"
"놀랐습니다. 갑자기 빠지셔서."
"그래도 용케 기억했네? 난 또 먼저 뛰어들까봐 걱정했는데."
"거의 뛰어들뻔했습니다. 염동하가 1초만 늦게 뛰어들었으면 제가 들어왔을겁니다."
"난 구하지도 않았는데 뭘."
"저도 설마 진짜 그럴줄은 몰랐죠."
"염 대위 작은오빠랑 비슷해서 내가 저런 타입 잘 아는데, 바람둥이에 여자 잘 아는것처럼 말해도 정작 좋아하는 사람한테는 완전 서툴다니까."
장난스럽게 웃는 재신의 티셔츠를 말아올린 시경이 재신의 머리 위로 옷을 벗겨냈다. 물에 흠뻑 젖은 셔츠를 벗자 과감하게 파인 수영복에 아슬아슬하게 가려진 재신의 가슴골과 가느다란 허리, 군살 하나 없는 배가 드러났다. 다른 남자 얘긴 그만 하세요. 마음에 안든다는 듯한 시경의 얼굴을 올려다보며 재신이 시경의 입술에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멍석이 아니라 금방석을 깔아줬는데도 제대로 말 못하면 남자도 아니지. 그런 남자에게 내 궁인을 줄 순 없죠. …그럼 이제 둘이서 놀아볼까요? 입술을 마주댄채로 재신이 웃었다. 어쩔 수 없다는 듯 웃어버린 시경의 흠뻑 젖은 팔이 재신의 허리를 감싸안았다.
23. 염 대위가 모르는 이야기
"서윤희씨가 염동하에게 관심이 있는 것 같습니다."
"어, 완전 눈치 없는 은시경씨까지 알 정도면 완전 소문 다 났겠네."
"알고 계셨습니까?"
"옛날에 알았죠. 공주궁의 모든 길은 이재신에게 통해요."
"궁내연애는 금지입니다만, 주의를 줄까요?"
"뭘 주의를 줘요, 남여상열지사에. 그렇게 따지면 은시경씨가 제일 근신대상인거 알죠? 궁내연애 금지인데 이렇게 당당하게 이 시간에 공주방에서."
"그건…"
"그리고 둘이 아직 사귀는 것도 아닌데 뭘. 염 대위 남자답지 못하게 말이야."
"서윤희씨의 일방적인 감정같아보였습니다만."
"아니야, 염 대위도 좋아해."
"공주님이 어떻게 아십니까?"
"척 보면 딱 알지, 뭘."
잠옷을 입은채 청초한 맨얼굴에 로션을 바른 재신이 묶었던 머리를 풀며 옆에 서 있던 시경을 올려다보았다. 시경은 영 마뜩치 않다는 듯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왜 또 그런 얼굴이에요, 뭐가 맘에 안들어서. 호위에 집중해야 할 근위대가 다른 쪽에 신경을 쓰는건… 은시경씨. 재신이 시경의 말을 끊었다. 염 대위 잘 하는거 알잖아요. 내 경호 소홀히 하고 그러는 일 없을거에요. 그렇지만… 여전히 무언가 말하려는 시경의 손에 재신이 빗을 쥐어주었다. 자, 나 머리 좀 빗겨줘요.
시경이 재신의 긴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빗겨주는동안 거울을 보는 재신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이거 또 공주가 나서줘야돼. 내가 진짜 큰 인심 썼다.
그리고 며칠 뒤 재신은 시경에게 두 가지를 확인시켜 주었다. 염동하 대위도 마음이 있다는 것, 그리고 시경의 염려대로 어찌되었건 조금은 재신의 호위에 소홀해진 것. 시경은 진지하게 동하를 어떻게 해야할지 복잡한 기분이 되었다.
염 대위 외전은 '염 대위의 러브스토리'라는 뜻이었는데 어쩐지 댓글 달아주신 분들이 다들 '염 대위 시점의 은신'이라고 이해하신 것 같아 어쩌지, 하고 잠시 고민. 사실 정확하게는 '염 대위의 러브스토리를 만들어주는 공주님'이라고 해야하나.
뭐, 넣고 싶었던 은신도 깨알같이 넣었으니까요. 하하하하하 둘이 수영장에서 잘 놀고 있음.
오늘의 넣고 싶었던 장면들
1. 도촬 염동하
2. 시스루 공주님
3. 수영복 고르는거 지켜보는 시경
4. 풍덩
5. 공주님 머리 빗겨주는 기사님
염동하 대위는 내건데… 흑흑
써놓고 보니 아깝다 내가 가져야 하는데…
깜찍하게 화려한 오지랖을 펼치는 공주님도 어쩐지 써보고 싶었다. 센스만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