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근위대원의 날들 - 9
여름휴가 2탄 + α
20. 서 중사는 모르는 이야기 5
"은시경씨."
"네, 공주님."
"은시경씨이."
"네. 듣고 있으니 말씀하세요, 공주님."
"아이 참!"
대대장실 소파에 길게 기대어 앉아 등받이에 턱을 얹은 채 책상 앞에 앉은 시경을 바라보던 재신이 결국 볼을 부풀리며 역정을 낸다. 영문을 모르겠단 얼굴로 보는 시경이 미운 듯 재신은 소파에서 내려와 콩콩 소리내며 책상 앞까지 다가왔다.
"나 휴가란 말이에요!"
"네, 압니다."
"은시경씨도 오늘 내일 비번이잖아요!"
"그렇긴 한데…"
"같이 놀아준다고 하고선, 일만 하고 있고. 나 또 민폐녀처럼 떼써야 놀아줄거에요?"
잔뜩 삐졌다는 티를 팍팍 내고 있는 재신을 보며 시경이 부드럽게 웃었다. 공주님 급하게 올라오셨으니 근위대 배치를 다시 해야 해서요, 이것만 할게요. 삼십분도 안걸려요. 뭘 다시해요, 나 오늘 은시경씨랑 하루종일 있을건데. 재신이 시경의 손에서 종이를 빼앗아 멀찍이 책상 모서리에 두었다. 곤란하단 눈을 하던 시경이 결국 졌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디 가시고 싶으신데라도 있으세요?"
"은시경씨는 오늘 뭐하려고 했어요?"
"저요? 음… 그냥 집에나 가려 했는데요."
"실장님 계시는 집?"
"아니요, 저 계속 나와서 살아서요. 원룸이 있는데 관사 들어오고 나서는 거의 안갑니다."
"흐음…"
반짝이는 눈으로 시경을 올려다보던 재신이 손뼉을 짝, 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결정! 은시경씨 집에 가요! 그 말에 시경이 눈이 휘둥그레 해져 재신을 본다. 네? 은시경씨 집에 가려고 했다면서요. 그러니까 계획대로 집에 가요. 나도 같이. 콕콕 손가락으로 스스로를 가리켜보이는 재신을 보며 시경은 난색을 표했다.
"안됩니다, 공주님."
"또! 또 안된대! 왜요, 왜!"
"오래 안 들러서 먼지도 많을거고 청소도 안했고…"
"내가 청소 해줄게요. 나 청소 잘해요."
"아니 제가 어떻게 감히 공주님한테…"
"인터넷에서 봤는데, 여자친구가 남자친구네 자취방 청소도 해주고 그런다던데?"
"그건, 그러니까 공주님…"
또 어디서 뭘 읽으신거야. 시경이 정말 곤란한 듯 이마를 짚었다. 여자친구라는 단어에 시경의 얼굴이 화끈화끈하다. 시경의 원룸은 정말 좁고 아무것도 없었다. 육사 시절 방학이나 주말에 아버지가 있는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 껄끄러워 모아둔 돈으로 얻은 원룸이라 위치가 좋은 것도 아니었다. 그런 곳으로 공주님을 모신다니, 무엇보다 자신의 방에 공주님을 들인다는 것 자체가 시경에게는 무언가 불경스러우면서도 마음 속 구석이 꾸욱, 이상하게 느껴졌다. 시경의 반응을 살피며 예쁘게 눈을 깜빡거리던 재신이 애교스럽게 웃으며 시경의 소맷자락을 잡아당겼다.
"응? 가요, 나 은시경씨 집 구경하고 싶어요. 내가 청소도 해주고 밥도 해줄게요. 나 밥 잘해요! 이래뵈도 유학 가기 전에 엄마한테 배워서 이것저것 할 줄 알아요. 가서 밥 먹구 놀다가 자고 내일 오면 안되요? 어차피 휴가인데."
"안됩니다. 좁고… 침대도 소파 겸용 싱글이라 좁습니다."
"좁으면 더 좋지 뭘. 꼭 붙어서 자면 되잖아."
"…공주님, 그렇게 남자 집에 함부로 오겠다고 하시는거 아닙니다."
"뭐가 함부로에요, 은시경씨인데. 그리고 위험한짓은 처음부터 다 해놓고 이제와서 내외할건 또 뭐람."
빨리 결정해요. 은시경씨 집 가든가, 아니면 나 하얏트 호텔에 지금 전화해서 남자친구랑 놀거니까 VIP층 통째로 비우라고 동네방네 소문내면서 떼부린다? 협박도 되지 않는 귀여운 협박을 하는 공주의 사랑스러움을 견디지 못하고 결국 시경이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인다. 꺄, 신난다! 나 준비하고 올게요! 냉큼 시경의 품에서 빠져나와 대대장실을 나간 재신은 삼십분이 채 못되어 돌아왔다. 캐주얼한 블라우스에 짧은 스커트, 어깨엔 가방을 메고 양 손에는 조리실에서 가져온게 분명한 재료들을 한아름 든 채였다. 공주라는 타이틀만 아니면 누가 봐도 남자친구 자취방에 놀러가는 참한 여자친구다. 여자친구. 여자친구. 재신을 보는 시경의 머릿속에 재신의 입술에서 나온 단어가 계속 맴돌았다. 공주님이 내 여자친구. 그런 시경의 눈 앞에서 재신이 휙휙, 손을 들어 움직여보였다.
"뭐해요, 은시경씨? 또 내 미모에 반했어?"
"그런가봅니다."
"무슨 말을 못해. 얼른 가요. 벌써 점심 때도 한참 지났잖아요."
재신이 시경의 팔짱을 끼고 주차장 쪽으로 시경을 이끌었다. 의전차량이나 경호차량이 아닌 시경의 개인차에 타는건 오랜만이었다. 재신을 태우고 운전하는 것이 한두번도 아닌데 목적지가 자신의 집이라고 생각하니 유독 긴장되는 시경이었다. 바짝 굳은 얼굴로 시경은 운전을 하고, 재신은 무엇이 그리 신나는지 콧노래까지 부르며 창 밖을 구경했다. 궁에서 조금 떨어진 주택가는 평일 낮이라 그런지 사람이 없었다. 줄지어 있는 주택들 사이로 아담한 원룸건물이 하나 서 있었다. 여기에요? 재신이 설레는 목소리로 주변을 돌아보았다. 네, 별거 없어요, 공주님. 시경이 재신의 짐까지 양 손에 다 든채로 계단을 올랐다.
"조심하세요, 공주님. 낮은 건물이라 엘리베이터가 없어요."
"응, 나 이제 계단 잘 올라요."
재신의 약한 다리가 걱정이 되어 시경은 3층 자신의 집까지 올라가는 동안 몇 번이나 재신을 뒤돌아보았다. 2층을 지난 재신의 숨이 아주 약간 가빠진 것 같자 차라리 업고 오를까 후회까지 되었다. 공주님한테 이런 좁은 계단이라니. 걱정하는 표정이 역력한 시경의 등을 재신이 팡팡 두드렸다. 정말, 은시경씨는 내가 무슨 떨어지면 깨지는 유리인줄 아나봐. 나 진짜 괜찮아요! 이 정도도 못 걸을까봐?
열쇠로 문을 여는 시경의 등이 바짝 긴장했다. 저, 공주님. 진짜 아무것도 없어요. 깨끗하지도 않을거고… 답지 않게 변명하듯 중얼중얼 입속으로 말을 잇는 시경이 귀여워 시경의 등에 바짝 붙은 재신이 꼭, 시경을 끌어안았다. 고, 공주님. 누가 볼까 시경이 급하게 확 문을 열었다. 오랫동안 사람이 오지 않은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눅눅한 공기가 훅, 코 끝을 스쳐왔다.
"들어오세요, 공주님."
시경이 창을 열고 환기를 시키는 동안 방 안에 선 재신은 두리번거리며 집안을 구경했다. 좁다좁다 하더니 정말 좁긴 좁다. 작은 원룸은 공주궁 재신의 드레스룸보다도 작을 것 같았다. 방에는 소파 겸 침대, 작은 앉은뱅이 탁자, TV가 가구의 전부였다. 방에 붙어 있는 작은 싱크대와 부엌도 오랫동안 사람의 손을 타지 않은 살풍경한 모습이었다. 참 주인 닮은 방이네, 그 흔한 액자 하나 없는 방을 둘러보며 재신이 삐죽 웃었다.
"앉으세요, 공주님."
어쩐지 안절부절하는 모습으로 시경이 재신에게 자리를 권했다. 시경은 어찌해야할 바를 모르고 있었다. 물이라도 드려야 하는건지, 뭘 해야 하는건지. 정신을 차리고 보니 자신의 방에 공주님이 앉아 있다. 어둡고 삭막한 방에, 꽃같은 공주님이. 잔뜩 긴장한 시경의 앙 다물어진 입술이 귀여워 재신은 시경을 확 끌어당겨 옆에 앉혔다.
"왜 그렇게 긴장해요, 응? 은시경씨."
"아닙니다."
"아니긴 뭐가 아냐. 여기가 완전 굳었는데? 나 처음 봤을 때보다 지금이 더 긴장한거 같아. 아, 나 이런 은시경 본 적 있어."
"…언제, 말입니까?"
"나 침대로 옮겨줬을 때. …이제보니 은시경씨, 또 대낮부터 이상한 상상 했구나?"
"아, 아닙니다!"
"아니면 아닌거지 말은 왜 더듬는담?"
장난스럽게 웃은 재신이 시경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었다. 부드럽게 흘러내리는 긴 머리카락과 함께 재신이 쓰는 향수 냄새가 희미하게 올라와 시경의 코 끝을 간지럽혔다. 물향같기도 하고, 꽃향같기도 한 투명한 향기. 재신에게 어울리는 좋은 향이라고 생각했으면서도 무슨 향수냐고 물었을 때 예전에 프랑스 향수 회사 회장이 내한했을 때 자신을 위해 만들어준거라는 재신의 대답에 괜히 또 얼굴도 모르는 남자에게 질투심이 든 시경이었다. 고요한 작은 방 안에서 재신이 시경에게 꼭 붙어 기대어 앉은 채로 시경의 손을 만지작거렸다.
"여기 있으니 기분 좋아요. 아무도 없고, 보는 사람도 없고."
궁에 있으면 아무리 둘만 있어도 둘만 있는 것 같은 기분, 안들잖아. 재신의 입가가 예쁘게 호를 그렸다. 그 입술이 너무 예뻐 시경은 고개를 틀어 그대로 재신의 입술에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집에 다른 사람이 있는건, 처음입니다."
"정말? 내가 처음이에요?"
"네. 아버지도 오신 적 없으시니까요."
"우와, 영광이네. 은시경씨만의 공간에 발을 들인거니까."
시경의 허리에 팔을 감으며 소리내어 웃는 재신의 뺨을 시경이 손으로 감쌌다. 재신의 말이 맞았다. 자신만의 공간에 처음으로 발을 들인 사람. 무채색의 집 안에 재신이 있는 것만으로도 총천연색이 입혀지는 것 같은 기분이다. 동시에, 이상할 정도로 심장이 뛰었다. 침대로도 쓰이는 소파 위에 손을 모으고 얌전히 앉아 있는 모습이 시경의 감각신경 끝을 자극했다. 제 영역 안으로 들어온 제 여자를 보는 기분. 아직도 시경의 집에 신기한 것이 남았는지 눈을 깜빡이며 두리번거리던 재신이 시경의 시선을 느끼고 눈을 마주쳐왔다.
"왜요?"
"예쁘셔서요."
"…어우, 정말. 부끄러워."
"예뻐서 예쁘다고 하는건데 왜요."
재신의 뺨이 금방 장미빛으로 물든다. 두 사람밖에 없는 공간의 긴장감이 심장소리를 더 크게 만든다. 나, 나 배고파요! 내가 밥 해줄게요! 벌떡 일어선 재신이 탁자 위에 올려둔 비닐봉투를 뒤적이며 식재료들을 이것저것 꺼낸다. 공주님 그냥 계세요. 제가… 재신의 손에 들린 재료를 시경이 받으려 하자 재빨리 손을 피한 재신이 싱크대 위에 재료들을 올리고 냉장고며 찬장을 열어본다.
"못 미더워 보여도 제법 한단 말이에요, 나. 유학가기 전에 엄마가 많이 가르쳐줬어요. 왕족이라고 여자가 살림도 못하면 안된다고. 냉장고엔 정말 아무것도 없네. 많이 가져오길 잘했다. 앗, 나 냄비 좀 빌릴게요! 밥솥은 있죠?"
찬장을 뒤져 냄비며 프라이팬, 도마를 꺼낸 재신이 싱크대의 물을 틀고 재료 손질을 시작한다. 보기엔 어설퍼보이는데 제법 순서며 분배는 능숙하다. 칼을 쥐고 두부와 감자를 써는 재신이 영 불안해 시경은 옆에서 걱정스러운 눈길로 재신의 손을 주시했다. 조금이라도 베일 것 같으면 바로 칼을 빼앗을 생각이었다. 그렇게 쳐다보면 더 긴장되거든요. 또각, 톡, 톡, 또각, 약간 어설픈 솜씨가 불규칙적인 소리로 들려온다. 재신이 종종거리는 발걸음으로 왔다갔다 하며 찌개 불을 올리고, 계란을 풀어 말고, 두부를 부치자 시경의 작은 원룸에도 음식 냄새가 퍼지기 시작한다. 냉장고에 기대어 재신의 바쁜 옆모습을 보는 시경의 가슴에 묘한 설렘이 깃들었다. 이런 작은 집은 아니겠지만, 솜씨 좋은 재신의 손길이 닿은 예쁜 집, 재신과 함께 하는 저녁, 재신과 공유하는 공간들… 예전에는 꿈도 꿀 수 없었던 상상이 시경의 마음 속에 부풀어오른다. 올려다보고 모셔야 하는 공주님이 아니라, 자신의 아내. 아내…. 시경은 마음 속으로 떠올린 단어에 스스로 깜짝 놀라 저도 모르게 재신의 눈치를 보았다. 재신은 국자를 든 채 호호 입김을 불며 간을 보고 있었다.
"아, 맛있다! 다 됐어요! 옮기기만 하면…"
"제가 옮길게요, 공주님."
냄비 손잡이를 잡으려는 재신을 가볍게 밀고 재빨리 시경이 냄비를 들어 작은 탁자 위로 옮겼다. 자그마한 앉은뱅이상 위에 찌개며 재신이 만든 반찬들, 조리실에서 가져온 밑반찬, 밥공기 두 개, 물 잔 두 개가 꽉 찬다. 두 사람이 마주 앉자 좁은 원룸바닥에도 더이상 틈이 없다.
"어때요? 그럴싸하죠? 보기엔 별로 안 예쁠지 몰라도 맛은 괜찮다니까요?"
"아닙니다, 공주님. 맛있을 것 같습니다."
"정말? …에이, 영 못미더운 표정인데. 이 공주 손에 물이나 묻혀봤나 몰라, 뭐 그런 생각 하는거 아니에요?"
귀엽게 고개를 갸웃거리며 들이대는 재신의 입술에 시경이 가볍게 쪽, 입을 맞추었습니다. 그런 생각 안합니다. 그냥… 좋아서요. 어쩐지… 결혼이라도 한 것 같아서. 저도 모르게 한 말에 히끅, 재신과 시경 둘 다 깜짝 놀라 얼굴이 빨개진다. 달아오른 두 뺨을 감싼 채 눈만 깜빡거리던 재신이 시경에게 수저를 쥐어준다. 어, 얼른 먹어봐요. 식겠다. 시경이 찌개를 한 수저 떠서 먹어본다. 하는 모양새는 영 어색했는데 정말로 맛은 좋았다. 조금 긴장한 표정의 재신이 시경의 눈치를 살폈다. …어때요? 맛있습니다. 망설임없이 정직하게 나오는 대답에 그제야 얼굴 표정이 환해졌다. 그쵸?
사이좋게 숟가락을 부딪혀가며 식사를 한 두 사람은 서로 설거지를 하겠다며 또 한참을 투닥거렸다. 결국 재신을 반강제로 소파에 앉힌 시경이 설거지를 하는 동안 재신은 무릎을 감싸안고 시경의 뒷모습을 쳐다보았다. 든든하고, 반듯한 등. 재신의 입가에도 미소가 어렸다. 정리를 끝내고 이번에는 청소를 하겠다는 재신을 말리다 결국 시경은 재신과 함께 청소기를 돌리고 집안의 묵은 먼지도 털어내야 했다. 귀하디 귀한 공주님이 근위대장 원룸을 청소해주고 있단걸 전하가 알면 노발대발 하며 영창에 보내겠지만 이상하게 시경은 그 시간들이 불편하거나 싫지 않았다. 오히려 즐거웠다. 유리창을 반짝이게 닦은 재신이 쭉 팔을 뻗어 기지개를 켰다. 어느새 창 밖에 노을이 붉게 물들고 있었다.
"와, 시간 빨리 가네. 벌써 해 지려고 해요."
"그러게요, 공주님."
"나 이제 피곤해요. 쉴래."
"여기 앉으세요."
시경이 옆으로 조금 비켜 앉으며 재신의 자리를 만들어 주었다. 시경에게 꼭 붙어 앉은 재신이 시경의 어깨에 기대었다 무릎에 누웠다 꼼지락거리며 장난을 쳤다. 시경은 재신의 묶어올린 머리카락을 손에 감은채 부드럽게 쓸어내렸다. 귀 옆으로 삐져나온 잔머리를 세심하게 넘겨주고 나비모양의 작은 귀걸이를 한 귓불과 이어지는 가는 목을 쓰다듬자 재신이 간지러운 듯 어깨를 움츠렸다. 시경의 무릎을 베고 반쯤 누워있던 재신의 시선이 TV 옆에 세워둔 기타에 닿았다.
"은시경씨."
"네, 공주님."
"노래 불러줘요."
"…네?"
"노래요. 기타도 있잖아. 기타 칠 줄 안다면서요. 나 언니한테 다 들었어요. 나는 맨날 노래하는데 은시경씨는 안하고. 응? 노래."
내가 밥도 차려주고 청소도 했잖아요. 노래 해줘요. 곤란한 얼굴의 시경을 올려다보며 재신이 조른다. 입술을 비죽이다가 눈웃음을 치다가 이리저리 애교를 부리는 모습에 시경은 정신이 혼미해져 결국 못이기는 척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요즘 노래도 모르고 기타도 안 친지 오래되어서… 공주님에 비하면 부끄러운 수준인데요. 팔을 뻗어 기타를 쥔 시경이 기대에 찬 재신의 눈빛이 부담스럽다는 듯 웃었다. 쿵, 쿵, WOC 멤버들과 있었을 때는 이렇게 긴장되지 않았는데 숨이 찰 것 같은 긴장감에 기타를 쥔 손이 가볍게 떨려왔다.
그대 사랑하오
아직도 사랑을 알지 못하지만
이 나이 되도록
그대 사랑하오
그대의 눈빛은 영원히 빛나오
날 믿어 주오
그대가 나를 모른다 해도
그러다 날 버린다 해도
바보처럼 그 자리에서… 사랑하오
나는 약속하오
우리의 사랑이
영롱한 빛으로 물들 것임을
그대가 나를 모른다 해도
그러다 날 버린다 해도
바보처럼 그 자리에서… 사랑하오
그대 사랑하오
말로 다 이 마음을 표현 못 하지만
난 사랑하오
그대가 이 마음을 허락해 준다면
이 세상 끝까지
함께하겠소
그대 사랑하오
And I always love you…
말로는 다 못 하오
난 사랑하오
노래가 끝나고도 부끄러워 귀가 빨개진 채 기타만 만지작거리는 시경의 뺨에 재신이 쪽, 입을 맞추었다. 그제야 돌아본 시경의 눈에 감동으로 반짝이는 재신의 눈동자가 들어왔다. 너무 좋아요. 감동적이야. 어떡하지? 나 은시경씨가 방금 전보다 더 좋아진거 같아. 환하게 웃는 재신의 얼굴을 보며 시경이 쑥쓰러워 애꿎은 아랫입술만 물었다. 시경이 기타를 내려놓자 그대로 재신이 시경의 품 안으로 안겨들어왔다. 처음부터 맞춘 듯 품에 딱 들어오는 몸의 사이즈. 시경의 몸이 뒤로 넘어가고 재신의 등이 석양으로 붉게 물들었다. 여기 좁아요, 공주님. 좁아서 더 좋지 뭐. 은시경씨는 싫어요? …아니요. 싫을리가요. 시경의 팔이 재신의 허리를 감아 끌어 당겼다.
21. 은시경은 모르는 이야기
"…어? 실장님!"
"공주님."
"여기서 뭐하세요?"
"잠이 와서 커피 한 잔 하고 있었습니다."
앵무새를 어깨에 얹은 채 궁 안을 산책하던 재신이 규태를 발견하고 걸음을 빨리 하자 한 손에 종이컵을 들고 있던 규태가 재신에게 고개를 숙여보였다. 늙으니 영 예전같질 않습니다, 허허. 근무시간에 커피를 마시는 모습같은건 평생 보인 적 없던 규태가 보인 빈틈이 부끄러웠는지 괜한 변명을 덧붙인다. 괜찮아요, 일 많으시잖아요. 여기 앉아서 드세요. 벤치에 앉길 권한 재신이 규태의 옆에 나란히 앉았다. 포르르, 앵무새가 재신의 손등에 앉는 모습을 보던 규태의 시선이 재신이 끼고 있는 반지에 닿았다. 규태의 시선을 눈치챈 재신이 아, 하고 살짝 반지를 손으로 가렸다.
"죄송해요, 이거 은시경씨가 준건데 제가 맘대로…"
"아닙니다, 공주님."
재신의 오른손 약지에 끼워져 있는 반지는 도금이 거의 벗겨진 낡은 반지였다. 잘 닦여 있었지만 오래되고 비싼 물건이 아닌 듯 군데군데 도금이 벗겨져 있었고 가운데 박힌 올드한 디자인의 붉은색 큐빅도 영롱한 빛을 잃은지 오래였다. 어딘가 아련한 눈으로 반지를 보던 규태가 한숨처럼 말을 내뱉었다.
"시경이가 그 반지를 가지고 있었군요. 안사람 물건은 다 버린 줄 알았는데…"
"은시경씨가 그 때, 몰래 가지고 있었다고… 죄송해요. 제가 받을 물건이 아닌데."
무거운 마음에 재신이 반지를 만지작거렸다. 시경의 집에 갔던 날, 시경의 품에 폭 안긴 채 장난을 치던 재신에게 시경이 주고 싶은 것이 있다며 서랍에서 낡은 패물함을 꺼내왔다. …어머니거에요. 그 말에 재신은 받을 수 없다며 도리질을 쳤다. 어머니가 이 반지를 좋아하셔서, 늘 끼고 계셨어요. 돌아가실 때까지도. 어린 마음에 그러면 안되는걸 알면서도 유품 중에서 몰래 가지고 있었어요, 계속. …은시경씨한테 소중한거잖아요. 은시경씨 어머니‥거잖아요. 눈물이 그렁한 눈으로 고개를 젓는 재신의 손을 들어 시경이 반지를 끼워 주었다. 시경의 어머니가 끼던 것과 똑같은 오른손 약지에. 반지는 맞춘 듯 딱 맞았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가족이 없는 것 같은 기분이었어요. 아버지는 늘 바쁘셨고 전 형제도 없었으니까요. 마치 처음부터 가족같은건 존재하지 않았던 것 같은 그런 기분이 들었어요. 아버지와도 가까워지기 어려웠고요. 이 반지만이 저한테도 부모님과 다 함께 행복했던 순간이 있었다는 증거 같았어요.」
「그런데 왜 이걸 나한테…」
「공주님이 내 가족이 되어줬으면 좋겠어요.」
오늘 공주님 보면서,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오늘처럼 공주님과 같은 집에서 시간을 공유하면서… 그렇게 살았으면 좋겠다고. 지금 당장은 아니지만, 공주님이… 내 아내가 되어줬으면 좋겠어요. 재신의 하얀 손에 끼워진 반지에 입을 맞추며 시경이 진지하게 속삭였다. 재신의 눈에서 톡, 눈물이 떨어졌다. 전하께도 말씀드리고, 공주님께도 다시 정식으로 청혼할게요. 우리, 결혼해요.
그 날의 기억을 다시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재신은 체온이 오르고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너무나 진지하고 경건했던 시경의 고백에 재신은 몇 번이고 울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언제가 되든 기다릴 수 있다고, 은시경씨 신부가 되는 그 날까지 기다릴거라고 재신은 시경을 꼭 끌어안으며 대답했다. 재신은 기다릴 수 있었다. 죽은 사람 만날 날도 기다렸는데 산 사람의 청혼 쯤 못기다릴까.
그 날 이후 재신의 손가락에서는 그 반지가 떠나지 않았다. 궁인들은 재신의 옷차림이나 메이크업에 어울리지 않는다며 다른 반지를 권했지만 재신의 고집이 완강해 결국 반지는 계속 재신의 손가락에 남아있게 되었다. 재신의 손을 보던 규태가 한 손을 재신에게 내밀자, 재신은 저도 모르게 규태의 손바닥 위에 자신의 손을 올렸다. 희고 고운 재신의 손을 보던 규태가 희미하게 웃었다.
"안사람 손도 이렇게 희고 예뻤답니다."
재신은 정말 오랜만에 보는 규태의 웃는 모습에 마음이 아릿해왔다. 궁으로 복귀한 후 규태는 묵묵히 비서실장 일을 계속 해왔다. 재하는 규태의 죄를 철저히 비밀에 부쳤다. 그건 규태를 위해서라기보다는 가장 큰 피해자였던 재신을 포함한 다른 사람을 위해서기도 했고, 그보다는 나라 전체를 위해서기도 했다. 재하는 더이상 클럽M으로 인해 나라가 흔들리고 사람들이 흔들리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한순간의 판단미스로 수십년의 세월을 실족한 측근의 죄를 묻는 것보다는 왕으로서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 재하에게는 더 중요했다. 그가 사직했던 진짜 이유에 대해 아는 사람은 재하와 항아, 시경, 그리고 시경이 말해 알게된 재신 뿐이었다. 심지어 다른 궁 안의 핵심 인물이나 대비조차도 알지 못했고 그저 재하의 변덕과 규태의 건강문제 때문이었다고만 알고 있었다. 그 후 재신은 딱 한번 규태와 단 둘이 마주한 적이 있었다. 아직 재신이 휠체어에 앉아 있던 때였다.
「제가 어떻게 실장님께 죄를 묻겠어요.」
나중에 큰오빠랑 언니 만나시거든 그 때 용서를 구하세요. …그리고, 은시경씨에게도. 재신은 규태를 미워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용서하지도 않았다. 그 때의 재신에게는 더이상 누군가를 미워할 마음도 용서할 마음도 남아있지 않았다. 공주의 가슴은 텅 비어 어떤 감정으로도 채워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때로부터도 또 계절이 흘렀고, 공주는 긴 고통 끝에 다리를 되찾게 되었고, 또 시간이 흘러 죽었다 알려졌던 공주의 연인이자 실장의 아들이 돌아왔다. 공주는 미소를 되찾았다. 공주의 안에서만 멈추었던 계절도 다시 변하기 시작했다.
"이 반지는, 제가 안사람한테 선물한겁니다."
"실장님이요?"
"사법고시 준비하던 시절, 어떻게든 안사람을 잡아야겠는데 고시생이 무슨 돈이 있었겠습니까. 종로거리 돌아다니며 발품팔아 산 반지 끼워주며 결혼하자 했습니다. 결혼하고 고시만 붙으면 더 좋은걸로 해주겠다고."
정작 법관이 되고는 바쁘다 바쁘다 하며 집에도 못 들어가고 끝내 새 반지 하나 못해주고 안사람 병으로 떠나야 했지만요. 규태의 입가에 쓴웃음이 걸렸다. 주름이 자글자글한 규태의 손이 재신의 반지낀 손등을 가볍게 쓸었다. 그래도, 공주님이 끼시니 안사람 생전처럼 이 반지도 참 예쁩니다.
"공주님."
"…네?"
"제가 시경이 태어났을 땐 안사람과 함께 있지도 못했는데, 공주님 태어나셨을 때는 궁에 있었습니다."
공주님은 어릴 때부터 참 예쁘고 영민하셔서, 제 마음에도 이 다음에 크면 누구와 결혼하게 되실지 괜히 아까운 마음이 들고 그랬습니다. 규태가 남은 커피를 다 들이키고 빈 종이컵을 구겨 주머니에 넣었다. 가는 금테 안경 너머로 규태의 눈이 가만히 재신을 응시했다.
"제가 죄 많고 못난 애비입니다. 그래도 제 아들, 잘 부탁드립니다. 공주님."
"네…?"
혹시라도 제가 마음에 걸리시면 늙은 애비가 죽은 다음이라도 시경이는 기다릴 놈입니다. 규태의 말 뜻을 알아차린 재신이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왜 그런 말씀을 하세요, 실장님. 그 때 말씀드렸잖아요. 제가 어떻게 실장님께 죄를 묻겠어요. 지금 저, 걸을 수 있잖아요. 그리고 설령… 제가 실장님을 미워한다 하더라도, 실장님 은시경씨 아버지시잖아요. 그거 하나만으로도 저, 실장님 원망할 수 없어요. 제… 시아버지 되실 분이잖아요. 규태의 손 위에 자신의 손을 겹쳐 쥔 채 재신이 눈을 마주쳐보였다. 호수같이 큰 재신의 색 옅은 눈동자가 끝을 모르게 깊었다. 규태는 다시 보일 듯 말 듯 희미하게 웃었다. 재신도 살며시 마주 웃었다.
"아저씨, 어디 계셨어요! 한참 찾았… 어? 넌 왜 아저씨랑 같이 오냐?"
복도 끝에서 서류를 한 손에 든채 빠른 걸음으로 걸어오던 재하가 규태, 그리고 규태의 팔짱을 꼭 낀채 다정하게 걸어오는 재신을 보고 걸음을 멈추었다. 뭐야 이 분위기? 너 벌써부터 막 아저씨 편들고 그래? 기가 차단 표정으로 보는 재하에게 재신이 흥, 하고 고개를 돌렸다. 그래. 예비시아버지한테 점수 좀 땄다, 왜. 야, 너. 너. 시, 시아버… 너 누구 맘대로 국혼이 그렇게 쉽게… 재신의 거침없는 발언에 당황한 재하가 연신 재신에게 삿대질을 하고 재신은 그 큰 눈을 더 크게 뜨며 재하를 쳐다보았다. 허허허, 규태만이 웃으며 재하의 손에서 자연스럽게 서류를 받아들고는 비서실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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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가 in 은시경집: 밥먹고 청소하고 노래하고 재우고 반지 줌. 순서가 고민 많았다. 재우고 노래하고 밥먹고 반지 줄지 밥먹고 재우고 노래하고 반지… 순서가 젤 고민이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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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름의 당위성 부여를 위한 노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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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오 - 윤상의 곡. (duet with 김현철)
노래가 반응이 좋다보니 계속 넣게 되네요 하하하 BGM 리스트라도 만들어야 할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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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다음은 염대위 외전(+ 물론 은신의 다른 이야기들). 염대위를 둘러싼 한 편의 로맨틱코미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