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근위대원의 날들 - 8
여름 휴가 1탄
19.
"몸 조심하시구요, 공주님."
"응. 알았어요."
"전화 꼭 하세요."
"알았어요, 걱정 말아요."
이산가족 나셨네. 누가 보면 한 일년 헤어지는 줄 알겠어. 차에 탄 채 창문을 내린 재신을 향해 걱정스럽다는 얼굴을 지우지 못하는 대대장의 뒷모습을 보며 동하가 아니꼽다는 듯 한껏 비아냥거렸다. 재신은 3박 4일 지방의 별장으로 여름 휴가를 떠나는 참이었다. 재신은 시경과 같이 가고 싶어했지만 이미 세상에 드러난 재신과 시경의 관계상 같이 휴가를 가는게 그다지 보기 좋은 그림이 아니란 것을 시경도 재신도 잘 알고 있었다. 하루도 아니라 지방에서 묵는 휴가, 같이 갔네 같은 방을 쓰네 어쩌네 온갖 지저분한 찌라시가 뜰걸 생각하면 같이 가지 않는 편이 나았다.
처음에는 시경과 함께 갈 생각에 들떠 해외로 가겠다며 한껏 기대에 차 있었던 재신이었지만 시경과 함께 갈 수 없게 된 순간 그 기대는 바람빠진 풍선마냥 쪼그라들어 그냥 매년 가던 별장으로 내려가겠다 한 것이다. 재신을 태운 차량이 궁을 빠져나가는 것을 확인한 시경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여름 휴가. 시경이 복귀한 후 첫 휴가였다. 작년에는 복귀한 직후인데다 한창 왕실 공식행사가 많아 아무도 휴가를 쓰지 않았었다. 들어가자. 궁으로 들어가는 대대장의 뒷모습을 보며 서 중사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영 표정이 좋질 않으시다. 저렇게 티가 날 정도로 같이 가고 싶으셨나.
평소 재하의 경호를 맡던 쪽이 재신을 따라 내려간터라, 재신의 전담호위들도 내일부터 재신이 돌아올 때까진 비번이었다. 야, 내일 비번인데 술이나 한 잔 하자. 동하의 선동에 서 중사를 포함한 둘이 따라 나서는 참에 근위대 휴게실 문이 열리고 시경이 들어왔다.
"어, 대대장님! 무슨 일 있으십니까?"
"아니. 물 좀 마시러."
"일 끝나셨습니까? 저희 한 잔 하러 갈건데, 같이 가시죠."
근위대원들을 죽 둘러보던 시경이 웬일인지 알겠다며 먼저 나가 있으라 하고는 정수기를 향했다. 웬일이시지. 공주님이 안계시니 대대장님이 우리 술먹는데 같이 오시고. 의아함도 잠시, 시경이 술값을 내줄거란 기대에 근위대원들의 얼굴이 한껏 밝아졌다. 좋아, 오늘 소령님 지갑 한번 털어보자.
궁에서 멀지 않은 곳의 막창집. 술을 마시던 사람들이 구석 테이블에 앉아 있는 훤칠한 남자 넷을 흘끔흘끔 쳐다본다. 다부진 체격과 준수한 외모를 가진 남자가 넷이나 있으니 눈에 띄는 것도 당연했다. 간간히 시경을 알아본 사람들이 저기, 은시경 아냐? 하고 소근거렸다. 서 중사와 김 소위가 분위기를 띄우고 염동하 대위가 호탕하게 웃는다. 시경은 가끔씩 대화에 끼어들다가 휴대폰을 보는 것을 반복하고 있었다. 계속 영 신경이 쓰인다는 얼굴로 휴대폰을 보는 시경의 손에서 휙, 동하가 휴대폰을 빼앗았다.
"아 진짜, 공주님 뒤통수 간지러워서 못 쉬시겠습니다."
"내놔."
"어련히 잘 계시겠지말입니다."
"내놔. 공주님 열시쯤 연락하신다고 하셨어."
내놓으라며 손을 내미는 시경의 목소리가 딱딱하다. 동하가 못말리겠다는 얼굴로 시경의 손에 탁, 소리나게 휴대폰을 쥐어준다.
"대대장님 기분 모르는거 아닌데, 그거 병이에요 대대장님. 무소식이 희소식, 모르십니까?"
"그랬다가 공주님 어떻게 되셨는지, 몰라?"
날카로워진 시경의 목소리에 테이블이 싸하게 가라앉는다. 유달리 시경은 초조한 얼굴이었다. 아무리 시경이 재신의 대부분 스케줄에 직접 나선다지만 전부는 아니었고 그 때마다 이렇게까지 예민하게 군 것은 아니었다. 심지어 이번엔 공식 스케줄도 아니고 그저 여름 휴가인데. 서 중사는 시경이 잘 이해가 가질 않았다. 입을 다물고 시경을 잠시 보던 동하가 시경의 빈 잔에 소주를 채워주었다.
"술이나 드십쇼."
피곤한 듯 눈가를 만지던 시경이 다시 잔을 비웠다. 주거니 받거니 한참 말없이 잔을 비우자 테이블 위에 빈 병이 또 늘어났다. 고기가 익어가는 불판만 쳐다보던 동하가 불쑥 입을 열었다.
"그거, 대대장님 탓 아닙니다."
"알아."
"자꾸 그러시면 공주님이 싫어하십니다."
"아니까 입다물고 술이나 마셔, 염동하."
지금의 공주님을 보면 가끔씩 깜빡깜빡 잊을 때가 있다. 한두해 전까지만 해도 공주님, 평생을 걷지 못할거란 얘길 들으셨단 것을. 선왕전하의 휴가, 공주님의 사고. 그 때 서 중사는 평범한 일반인이었기에 자세한 이야기는 모르지만 근위대에 들어온 후 얼핏 들은 적이 있었다. 그 휴가 때 있었던 이야기들을. 그래서 저렇게 예민해지신건가. 혹시 또 공주님에게 무슨 일이라도 있으실까봐. 휴대폰을 꼭 쥔 시경의 손이 미세하게 떨린다. 그 때 시경의 휴대폰이 울리기 시작하고 발신인을 확인한 시경의 얼굴이 확 밝아졌다.
"공주님."
-뭐하고 있었어요?
"동하하고 애들하고 술 한잔 하고 있었습니다."
-나 없다고 아주 막 노는구나? 또 막 만취해서 그럴라구.
"아닙니다."
-나 이제 자려구요. 은시경씨 없으니까 재미없다.
"푹 쉬다 올라오세요."
-무사히 잘 쉬다 갈게요. 걱정하지 말구 은시경씨도 내일 비번이죠? 오랜만에 좀 쉬어요. 계속 못 쉬었잖아.
"네, 공주님. 주무세요."
-…은시경씨.
"네?"
-걱정 말아요. 여기 벽난로도 없고, 근위대도 좍 깔렸고, 내 방에 실장님도 있어요.
"공주님…"
-그렇게 불안해하지 않아도 되요. 언제 전화해도 다 전화 받을게요.
"아닙…"
-아니긴 뭐가 아냐. 목소리에서 딱 티가 나는데. 걱정말고 잘 놀아요. 공주가 술값 줄테니까 비싼 술 마셔요.
알겠죠? 스피커 음량이 큰지 또랑또랑한 재신의 목소리가 바로 옆의 근위대원들에게까지 노이즈에 섞여 들려온다. 재신과의 통화가 끝나고 나서야 시경은 비로소 조금 마음이 놓인 얼굴을 하고 있었다. 거보십쇼, 공주님이 걱정 말라시지 않습니까. 공주님이 술값 주신다니 고기 더 시켜주시죠. 동하가 씩 웃으며 분위기를 다시 살렸다. 그 모습을 보던 시경도 피식 웃었다. 다시금 술자리가 무르익어갔다.
몇 병의 빈 술병이 더 늘어나고 넷 다 얼큰하게 취해 있었다. 어느덧 시간은 자정이 넘었고 왁자했던 막창집도 손님이 줄어 주인이 틀어놓은 라디오 소리만이 적막감을 메우고 있었다. 떠들썩 했던 테이블도 이야기거리가 잦아들며 네 사람은 심야 라디오 DJ의 은은한 목소리를 안주삼아 술잔만을 기울이고 있었다. DJ의 멘트가 끝나고, 조용한 나일론기타 반주와 함께 마지막곡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바람, 어디에서 부는지
덧문을 아무리 닫아 보아도
흐려진 눈앞이 시리도록 날리는 기억들
"아, 이거 공주님이 좋아하시는 노래다."
불쑥 김 소위가 엉킨 발음으로 내뱉은 말에 모두들 음악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했다.
어느샌가 아물어 버린
고백의 덧난 그겨울의 추억
아, 힘겹게 사랑한 기억 이제는 뒤돌아 갔으니
"그러네요."
"그러게."
서 중사와 동하도 고개를 끄덕였다. 서 중사는 이 노래를 몇 번이고 들어본 기억이 있다. 순찰을 돌거나 할 때 인적이 드문 후원에서 가끔씩 공주님을 먼발치에서 보게 되는 때가 있었다. 한동안 공주님은 이 노래를 부르고 있을 때가 많았다. 후원의 벤치에 앉아, 아무 반주도 없이 고요한 바람에 나뭇잎 흔들리는 소리를 반주삼아 노래를 부르고 계셨었다. 셋은 멍하니 과거의 기억에 잠겼다. 시경만이 그 안에서 낯선 얼굴을 하고 있었다.
"공주님이? 난 한번도 들어본 적 없는데."
"그야 대대장님은 들어본 적 없으셨을겁니다. 대대장님 복귀하시기 전 이야기니."
시경의 의아한 목소리에 동하가 툭, 대답을 내뱉었다.
바람은 또 어디에서 불어오는지
내 마음에 덧댄 바람의 창 닫아보아도
흐려진 두 눈이 모질게 시리도록
떠나가지 않는 그대
대대장님 복귀하시기 전에 이 노래 참 많이 부르셨지 말입니다. 후원에 혼자 앉아 계시길래 멀리서 보면 한동안 늘 이 노래였습니다. 김 소위가 말을 덧붙였다. 김 소위는 동하와 더불어 예전부터 2중대에 있었던 부사관 출신의 장교였다. 서 중사는 묵묵히 가사를 곱씹었다. 근위대에 들어온지 얼마 되지 않았던 서 중사는 무엇이 그리도 공주님을 애달프고 쓸쓸하게 만드는지 알 수 없었다. 공주님의 목소리는 늦가을의 바람보다도 외로웠고 서글펐다. 서 중사는 공주님의 끝 모를 마음 속 심해에 무엇이 가라앉았는지 알고 싶었지만 도무지 알 방법이 없었고 그걸 알법한 근위대원들은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약속이나 한 듯.
시경은 말없이 테이블 위를 쳐다보았다. 무엇을 생각하는지 알 수 없는 표정이었다. 그리고 이내 넷 다 아무 말도 하지 않게 되었다.
혼자라는게 때론 지울수 없는 낙인처럼
살아가는게 나를 죄인으로 만드네
혼자라는게 때론 지울수 없는 낙인같아
살아가는게 나를 죄인으로 만드네
혼자라는게 때론 지울수 없는 낙인처럼
살아가는게 나를 죄인으로 만드네
혼자라는게 때론 지울수 없는 낙인같아
살아가는게 나를 죄인으로 만드네
"소령님."
반복되던 후렴의 가사가 잦아들 무렵, 동하의 시선이 시경을 향했다. 시경은 대답하지 않고 고개를 들어 동하를 쳐다보았다.
"공주님께 잘하십쇼."
잘하셔야 합니다. 소령님은, 공주님 절대 울리시면 안됩니다. 툭 치면 눈물이 터질 것 같이 우그러든 눈으로 시경을 바라보던 동하가, 그대로 테이블에 머리를 쿵 소리나게 박았다. 잘하셔야 합니다. 잘하셔야 해요. 소령님은 진짜 나쁜 남잡니다. 난 진짜 나중에 죽으면 소령님 한대 패러 가려고 했어요. 진짜로. 그렇게, 공주님 가슴에 피멍들게… 우리 공주님 울지도 못하시고 그러셨던거 진짜, 소령님. 그러는거 아님다… 웅얼거리던 말도 이내 입 속으로 사라지고 동하는 그대로 잠들어버렸다.
"얘 좀 업어서 방에 던져놔."
동하의 정수리를 보던 시경이 계산서를 집어들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김 소위와 서 중사는 동하의 두 팔을 한 쪽씩 들쳐메고 부축했다. 중대장님, 정신 좀 차려보십쇼. 중대장님. 비틀비틀, 동하의 걸음에 힘이 들어가질 않았다. 환궁한 김 소위와 서 중사가 동하를 다시 추스려 관사 쪽을 향했다. 시경은 셋이 관사 현관 카드키를 찍는 것을 확인하고 뒤돌아섰다.
"안 들어가십니까, 대대장님."
"난 바람 좀 쐬다가. 먼저 들어가고 내일 잘 쉬어라."
"알겠습니다. 대대장님도 쉬십쇼."
김 소위가 염동하 대위의 포켓을 뒤져 방 키를 찾는동안 서 중사는 후원 쪽을 향하는 시경의 뒷모습을 쳐다보았다. 혼자라는게 때론 지울 수 없는 낙인처럼 살아가는게 나를 죄인으로 만드네. 혼자라는게 때론 지울 수 없는 낙인같아 살아가는게 나를 죄인으로 만드네. 이제는 들을 수 없는, 다시는 듣고 싶지 않은 공주님의 쓸쓸했던 목소리가 마음을 스산하게 감돌았다.
그리고 다음날, 서 중사는 외출 준비를 하던 중 창 밖으로 환궁하는 의전차량을 보고 헐레벌떡 대대장실로 달려갔다. 시경은 이미 자리에 없었다.
"하루 노니까, 별로 재미 없는거 있죠? 그래서 궁인들은 그냥 놀라구 두고 나만 올라왔어요. 궁에 왔으니까 비번인 은시경씨가 놀아줘요. 알았죠?"
차에서 폴짝 뛰어내린 재신이 궁에서 달려나온 시경을 향해 환하게 웃었다. 응? 일한다 어쩐다 하기만 해봐. 갸웃, 고개를 기울여보이는 재신을 보며 시경의 입가에도 미소가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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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면서도 사람이라면 누군가 '그 때 내가…'라는 후회를 한다. 두 사람이 행복한 것이 좋아 의도적으로 원작에서의 슬픔을 거의 다 거세시켜버린 이 시리즈지만 안면도에서의 일은 시경의 마음 한 구석에 후회로 남아있을거란 생각도 들었다. 그래서 자신이 갈 수 없는 재신의 휴가에 더 예민하게 반응했던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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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경이 죽었던 시간들. 공주 뿐만 아니라 시경의 부하들에게도 큰 상처였을 날들. 서로가 너무 아파서 말조차 꺼낼 수 없었을 날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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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 어디에서 부는지. 루시드 폴의 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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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하루만에 돌아와버린 공주님이랑 은소령이랑 뭐했는지는 다음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