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근위대원의 날들 - 7
이 시리즈를 쓰려고 했던게 아닌데.
완결자 안붙이길 잘했다…?
바로 전 메모의 화보편.
18.
세계를 돌며 개최하는 국제 인디뮤직 페스티벌이 올해는 대한민국에서 열리게 되어 한참 공주궁이 분주하다. 예전부터 비주류문화를 전적으로 후원해온 재신이 이번 행사에 깊숙히 관여하고 있기 때문이다. 왕실이 전적으로 행사를 후원하는 것은 물론 재신이 직접 홍보대사로 나섰다. 공주가 비주류문화를 아껴온 것은 예전부터 널리 알려져 있었기 때문에 재신이 홍보대사로 위촉되었다는 사실만으로도 행사는 큰 관심을 받고 있었다.
행사의 본격적인 홍보를 위해 주최측은 서울 시내 곳곳과 지하철역에 대형 광고판을 설치하기로 결정했고, 광고판의 여러 타입 중 메인은 재신을 직접 모델로 하는 버젼이었다. 컨셉은 '내 안의 또다른 나'. 우아하고 품위있는 공주 이재신과 자유롭고 파격적인 보컬 이재신의 모습을 함께 보여준다는 내용이었다.
촬영 당일, 재신이 메이크업을 하고 있는 동안 시경은 세트장과 스튜디오의 안전을 점검했다. 최근, 스튜디오에서 화보촬영을 하던 모델이 세트가 무너져 부상을 입는 사고가 크게 보도된 터라 시경은 근위대로 하여금 안전 문제를 철저하게 점검하게 했다. 서 중사는 혹시 스튜디오의 조명들이 떨어지거나 넘어지진 않을지 하나하나 점검했다. 근위대에게 점검 보고를 받고 있는 시경의 자켓 안주머니에 넣어둔 휴대폰이 진동을 울렸다. 휴대폰을 꺼내 액정을 본 시경의 고개가 갸웃한다. 공주님?
"네, 공주님."
-뒤, 뒤.
"뒤요?"
휴대폰을 귀에 댄 채 뒤를 돌아본 시경의 눈에, 문가에 기대어 전화를 받고 있는 재신의 모습이 들어왔다. 풍성한 금발, 눈가를 메운 짙은 스모키, 붉은색의 가죽자켓 아래 받쳐 입은 몸매를 드러내는 미니스커트에 까만 스타킹까지. 시경이 재신을 처음봤던 그 모습이었다. 공주님이다. 우와, 대박. 평소와 전혀 다른 재신의 모습에 주변에서 감탄사가 튀어나왔다. 서 중사의 입이 헤, 벌어진다. 평소에 보는 깔끔하고 우아한 공주님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다. 평소엔 어딜봐도 왕족, 공주의 아우라가 넘쳐흘렀다면 지금은… TV에 나오는 연예인 같은 느낌이었다. 그런데, 예쁘다. 무지하게. 역시 본판은 어디 가지 않는다. 시경은 멍하니 휴대폰을 그대로 든 채 재신을 쳐다보았다. 그런 시경의 얼굴을 관찰하던 재신이 눈웃음을 치며 손을 들어 인사를 했다.
"안녕, 잘생긴 근위대장님?"
어딜 봐도 공주라고는 상상할 수가 없다. 평범한, 아니 평범하다기엔 좀 비범하게 예쁜 락밴드 보컬이다. 그 모습을 잠시 보던 시경이 성큼성큼 다가간다. 재신과 거의 한뼘 거리만큼 다가간 시경이 휙, 재신의 팔목을 잡아 휴대폰을 빼앗더니 그대로 몸을 돌려 벽으로 재신의 팔을 꺾어 밀어붙인다. 대대장을 지켜보고 있던 서 중사의 눈이 휘둥그레해졌다. 왜저래, 대대장님.
"이거 어디서 났어."
어디서 공주님 물건을 가지고 다녀. 목소리는 진지한데 얼굴엔 희미한 미소가 번져 있다. 자세히 보니 꺾은 팔도 시늉일 뿐 하나도 힘이 들어가 있지 않다. 서 중사는 순간 긴장했던 몸이 탁 풀리는게 느껴졌다. 가끔 저 두 분은 진짜 이상하게 놀아. 이상한 역할극이야. 공주님이야 워낙 성격이 저러시다 치지만 대대장님도 가끔 보면 만만치 않게 이상하다. 시경에 의해 벽에 밀어붙여진 재신이 키득키득 웃는다. 와, 이 사람 여전히 터프하네. 자켓을 탁탁 털어낸 재신이 시경을 새초롬하게 올려다보더니 또 눈웃음을 친다. 품위 있는 공주는 하지 않을법한 노골적인 유혹의 시선이다.
"이 오빠는 여전하네, 드레스 입고 잘난척만 하는 애가 그렇게 좋아?"
잘생겼는데 너무 재미없다, 오. 빠. 손가락을 들어 시경의 어깨를 콕콕 찌른 재신이 포르르 시경의 사정권에서 벗어나 조명이 켜진 셋트로 들어가버린다. 시경은 피식 웃으며 몸을 돌려 메이크업을 점검받는 재신을 바라보았다. 자신을 보는 경악스러운 주변의 시선들(과 동하의 닭이 되어 날아가버릴거 같은 짜게 식은 눈)은 눈치채지 못한 채.
"공주님, 그럼 촬영 시작하겠습니다."
"네에- 음악 틀어주세요!"
스튜디오에 귀청이 떨어질 것 같은 락음악이 울려퍼지고 재신은 셋트장이 무대인 것마냥 뛰기 시작했다. 재신이 포즈를 취할 때마다 연신 셔터음과 플래시가 터지고 재신의 전담 궁인들이며 메이크업 담당들, 처음엔 경호를 하는 듯 하던 근위대까지 다 공주의 모습을 보느라 여념이 없다. 이거, 모델이 좋아서 사진이 너무 잘나옵니다. 오래 찍을 필요도 없겠는데요. 오히려 고르느라 걱정이겠습니다. 사진들을 확인하는 왕실 전속 사진작가가 연신 만족스러운 얼굴이다.
재신의 모습을 지켜보던 시경이 휴대폰을 들어 멀리서 재신의 사진을 찍는다. 환하게 웃는 얼굴, 흩날리는 옅은 금발. 오늘따라 섹시해보이는 큰 눈과 사랑스러운 입술. 사진 찍는데 여념이 없는 시경의 옆에서 동하가 투덜댔다. 왕족 사진 그렇게 마음대로 찍는거 근위대 조항 위반임다, 대대장님. 모범이 되시진 못할 망정… 들은척도 안하는 시경이 괜히 얄미워 동하만 입술을 쑥 내민다. 아주 그냥 옛날부터 우리한텐 깐깐하게 조항 들이대면서 하지 말란건 자기 혼자 다 했지 그래. 찰칵, 시경이 촬영버튼을 누르는 순간 재신의 시선이 정확하게 시경을 향했다.
"어? 거기 오빠, 한 장 찍는데 만원이야!"
"백만원 선금 낼테니 백장 찍겠습니다."
이제는 재신의 짖궂은 장난에도 특유의 진지한 목소리로 제법 잘 받아치는 시경에 오히려 재신이 깜짝깜짝 놀란다. 어? 약속했어요! 백만원이야! 재신이 윙크를 날리며 시경의 휴대폰을 향해 브이자를 그려준다. 순간 사진작가의 카메라와 시경의 휴대폰에서 동시에 찰칵, 소리가 난다.
스튜디오의 뜨거운 조명에 재신의 턱을 타고 땀방울이 주르륵 흐른다. 물을 마시며 작가가 찍은 사진을 함께 모니터링하는 재신의 입가에도 미소가 번졌다. 이만하면 잘 나왔죠? 그럼요, 공주님이 워낙 한 미모하셔서 아주 좋은 작품이 나올 것 같습니다. 내가 좀 예쁘긴 하죠. 스스로를 예쁘다 말해도 틀린 말이 없어 할 말이 없다. …저럴 때 보면 공주님 진짜 전하와 판박이십니다. 근위대 신참의 말에 서 중사는 고개를 끄덕여 동의를 표했다.
공주님, 갈아입으실 옷 준비되었습니다. 궁인의 말에 재신의 발걸음이 대기실을 향한다. 어딘가 아주 미묘하게 아쉬운 얼굴을 하고 있는 시경을 휙, 돌아본 재신이 쪽, 하고 손등으로 키스를 날린다. 오빠가 좋아하는 애 불러올게. 안녕~ 손가락까지 살랑살랑 흔들어보인 재신이 옷을 갈아입으러 사라지고 남은 것은 세트를 교체하느라 분주한 스텝들, 그리고 어딘지 모르게 흐뭇한 얼굴의 근위대장과 한심함과 부러움이 뒤섞인 눈을 한 근위대원들뿐이다.
기다림이 조금 지루해질 무렵, 스튜디오로 다시 재신이 들어섰다. 또각, 구두소리부터 아까와는 다르다. 모두의 시선이 향한 곳엔 모두가 아는 공주가 서 있었다. 볼륨 있게 올린 붉은색의 머리와 어울리는 살구색의 블라우스와 풍성한 치마는 재신의 평소 의상보다도 유난히 더 고급스럽고 우아했다. 재신을 둘러싼 서너명의 궁인이 치맛단을 매만져주고 입술에 립스틱을 덧발라준 후 마지막으로 머리위에 얹어진 빛나는 티아라의 위치를 조정해주었다. 사진 작가마저도 공주의 모습에 홀려 잠시 멍하니 재신을 바라보았다.
"찍으면 되나요?"
스튜디오를 죽 둘러보며 재신이 묻자 그제야 작가가 고개를 끄덕였다. 재신은 사뿐사뿐 걸어 세트에 들어섰다. 두 번째 촬영은 더 빨리 진행되었다. 공주로서 태어나서 지금까지 죽 분기별로 왕실 홈페이지며 공식 잡지용 프로필 사진을 촬영해야 했던 재신이 이런 스타일의 촬영에 익숙한 탓이었다.
재신의 환한 미소가 피어날 때마다 찰칵, 찰칵 하며 작가의 카메라에 사진들이 쌓여갔다. 촬영은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예상보다 한시간이나 일찍 끝난 촬영에 뒷정리를 하는 스탭들도 싱글벙글이다. 후작업 완료되면, 사진 보내드리겠습니다. 고생 많으셨어요. 앞으로도 잘 부탁드려요. 작가의 인사에 재신이 미소로 화답하며 수행원들을 데리고 먼저 스튜디오를 떠났다. 건물을 나오자 재신이 휙, 뒤돌아 바로 뒤에서 따라오던 시경에게 불쑥 얼굴을 들이댔다.
"보여줘요."
"뭘, 말씀이십니까?"
"사진. 나 찍었잖아요."
"아…"
시경이 뭐라 대답하기도 전 시경의 휴대폰을 빼앗은 재신이 마음대로 잠금을 풀고 사진첩에 들어가 시경이 찍은 사진을 보기 시작한다. 백만원 선금 낸다더니 정말 백장을 채울 기세였는지 오늘 찍은 사진만 수십장이다. 공주 의상의 사진도 많지만 압도적으로 많은건 금발 가발에 화려한 차림을 한 때의 사진들이다.
"처음 봤을 땐 양아치라더니."
"지금도 양아치같다고 생각합니다만 예쁜건 부정할 수 없습니다."
"그 때도 예쁘다고 생각했어요?"
"예쁘다고는 생각했습니다."
"예쁘다고'는'? 예쁘다고는 생각했는데 뭐?"
"예쁘긴 한데, 왜 저러고 있나 했죠."
재신의 입이 딱 벌어진다. 와, 진짜 이 사람. 끝까지 이러네. 그리고 재신보다 더 경악의 눈을 한 근위대원들이 시경을 쳐다보았다. 대대장님 진짜 저러다 언젠가 영창 가시는거 아닐까. 동하만이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다. 그럴리가 없지. 처음 봤을 때 품위 운운 했는데 영창 갈거였으면 그 때 갔다. 잠깐 비죽, 입술을 내밀던 재신이 시경에게 휴대폰을 돌려주며 장난스레 웃는다.
"그럼 이건 필요 없겠네?"
그러면서 보여준 것은, 재신의 휴대폰. 옷을 갈아입기 전이었는지 금발의 재신이 깜찍하게 브이를 그리며 찍은 셀카다. 주세요. 무뚝뚝한 시경의 입가가 미묘하게 씰룩거리는 것이 재밌어 재신이 다시 휙 돌아 차에 올랐다. 싫-어요. 보내주세요, 공주님. 대대장 체면도 없이 눈썹 끝이 축 쳐져 애원하는 시경의 모습도 이제 근위대원들에게 제법 익숙하다. 처음엔 그나마 장소는 가리시더니. 이젠 보는 눈도 신경 안쓰신다 이거지.
며칠 후, 서울 시내와 지하철 역들에 커다랗게 재신의 사진들이 걸렸다. 곱게 손을 모은 아름다운 공주의 모습과 마이크를 들고 열정적으로 노래하고 있는 모습. 전혀 다른 모습이었지만 별처럼 반짝이는 눈동자만큼은 같아, 「내 안의 또다른 나」라는 주제와 더없이 잘 어울리는 화보였다. 제작된 브로셔는 순식간에 동났고 지하철 광고판을 뜯어가려는 공주의 광팬이 공공재 훼손으로 연행되는 해프닝까지 있었다.
그리고 공주의 사진 바로 옆 자리엔, 국군 홍보의 달을 맞아 국방부가 내건 광고판이 자리하고 있었다. 정복 차림으로 절도 있게 경례를 붙이고 있는 시경의 사진이.
툭하면 첫만남 재현놀이중.
대대장의 권위와 위엄은 안녕히안녕히… 비밀연애도 다 들통난 마당에 그런건 이제 없다.
윤찡 인터뷰대로 무한 닭살커플.
시경의 소박한 욕망: 양아치 공주님이랑 클럽에서 이런거저런거 해보는거… 대대장님 오늘 꿈에 나올듯.
공주님은 결국 은소령한테 백만원 받아냄. 현금으로 받은건 아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