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근위대원의 날들 - 4
점점 더 한 에피가 길어지는 느낌…
아직 안 끝났습니다!
12.
다시 다리를 쓸 수 있게 된 이후로 이재신 공주의 공식 스케줄에는 많은 강연이 추가되었다. 재신은 늘 다시 일어설 수 있게 된 것을 기뻐하면서도 자신만이 공주라는 이유로 수많은 하반신 마비 환자들 중 혼자 비용이 천문학적으로 드는 수술을 받고 일어날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에 죄책감을 느끼곤 했다. 그 과정 속에 장애를 가진 공주로서 겪어야 했던 상상을 초월하는 고통과 몸이 부서질 정도로 노력했던 재활훈련이 있었음을 누구나 알고 있었지만 재신의 마음에는 언제나 빚이 있었고, 재신은 그 빚을 덜어내는 방법으로 사람들을 만나는 것을 택했다. 줄곧 하고 있던 문화사업과 비주류문화 후원 외에도 재신은 전국을 돌아다녔다. 자신의 이야기를 듣고 싶어하는 사람들을 만나고 희망을 주는 것이 재신의 새로운 기쁨이었다. 덕분에 재신을 호위하는 근위대도 공주를 따라 전국을 다녀야 했다. 지방으로 가면 호위가 훨씬 힘들어졌지만 밝은 얼굴로 사람들 앞에 서는 공주를 모시는 것은 근위대로서도 뿌듯한 일이었다.
서 중사는 구름처럼 모인 대학생들 앞에서 강연을 하는 재신의 모습을 멀리서 자랑스럽게 지켜보았다. 재신은 유독 젊은 사람들에게 인기가 많았다. 대한민국 역사상 유일한 공주, 드라마틱한 인생, 영화같은 러브스토리, 그리고 연예인 뺨치는 아름다운 외모까지. 재신의 모든 면이 사람들의 동경을 샀다. 재신은 지방의 한 국립대학교에 내려와 있었다. 개교 백주년을 맞은 학교에서 특강 연사로 재신을 초청했고, 재신은 스케줄이 된다면 괜찮다며 흔쾌히 허락했다. 좀처럼 볼 수 없는 공주가 온다는 소식에 그 학교 학생들 뿐만 아니라 인근 주민들까지 몰려들어 막상 근위대는 호위가 쉽지 않았다. 어, 어. 더이상 가까이 오시면 안됩니다. 사진을 찍으러 경호선을 넘으려는 주민을 막으며 서 중사는 한숨을 쉬었다. 우리 공주님 너무 인기가 많으셔서 탈이야.
무사히 강연을 마친 재신은 사람들과 같이 사진을 찍어주고 있었다. 찍어도 찍어도 끝없이 몰려드는 사람들에도 인상 한 번 찡그리지 않고 환하게 웃어주는 재신을 보며 근위대는 역시 공주님이라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언젠가 안 힘드시냐는 서 중사의 질문에 재신은 활짝 웃으며 대답했다. 사람들 나랑 사진찍으면, 정말 기뻐하잖아요. 공주랑 사진 찍었다고. 주변에 자랑도 하고, 페이스북에도 올리고, 얼마나 좋아요. 난 한순간 같이 찍어주기만 하면 되는데 그걸로 그렇게 사람들이 즐거워하는데 뭐가 힘들겠어요. 그 때 서 중사는 새삼 공주님을 존경하게 되었다. 진짜 쉽지 않아보이는데.
"공주님, 돌아가실 시간입니다."
"아, 그래요? 알겠어요. 사람들 좀, 부탁할게요."
바깥을 확인하고 돌아온 시경이 재신에게 시간을 상기시켜주자 재신이 알았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순간 휴대폰이며 디카가 후두둑 시경을 향했다. 공주의 남자에 대한 주목도 이젠 익숙한지 표정하나 바뀌지 않은 시경이 다시 바깥의 상황을 보고받는다. 공주님! 우리 학교 캠퍼스 진짜 예뻐요! 공주님! 잠깐만 걸어가시면 안되요? 조금이라도 공주와 더 있고 싶은 마음에 조르는 학생들을 보던 재신이 시경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허락을 구하는 공주의 눈빛에, 결국 시경이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정문에서 차량 대기해."
강당을 나서는 재신의 앞에서 사람들을 막는 시경을 도우며 동하가 작게 속삭였다. 대대장님 너무 물러지신거 아닙니까. 요샌 공주님이 하자는대로 이리저리 다 하십니다. 여기서 정문까지 걸어가는데 사람 막으려면 얼마나 힘든지 모르시는거 아니면서. 퍽, 시경의 다리가 동하의 정강이를 걷어찬다. 아, 진짜. 맨날 나한테 화풀이셔. 이거 서러워서 살겠나. 옛날엔 안됩니다 안됩니다 공주님한테 잘만 따박따박 대들었으면서. 아프다는 티도 내지 못하며 동하가 툴툴거렸다.
시경과 동하가 앞을 막고 서 중사가 재신의 옆에서 사람들이 너무 가까이 오는 것을 제지했다. 캠퍼스의 얕은 비탈길을 걸어내려가며 재신은 학생들이 거는 시덥지 않은 말들에 일일이 다 대답을 해주었다. 공주님! 궁은 밥 맛있어요? 맛있죠. 그런데 엄마가 해주시는게 제일 맛있어요. 요샌 왕비마마도 잘하시구요. 데이트는 어디서 하세요? 주로 궁이죠 뭐. 어디 나가려면 너무 바쁘고 사람들도 많고 그렇잖아요. 은소령님 완전 훈남이에요! 톤이 높은 외침에 앞에 가던 시경의 어깨가 살짝 움찔한다. 그 모습을 흘끔 쳐다본 재신이 활짝 웃었다. 그쵸? 원래 근위대가 얼굴도 좀 봐요. 근데 그 중에서도 내 남자가 제일 잘생겼죠.
거의 정문 근처에 도착한 시경이 재신에게 눈짓을 하고 차를 확인하러 대기하고 있는 차량쪽을 향한다. 재신은 잠시 멈춰서서 캠퍼스의 여름을 눈에 담고 있었다. 영국에서 대학생활을 한 재신에게 한국의 대학교는 언제나 새롭고도 신기한 곳들이었다. 주변을 찬찬히 둘러보던 재신의 눈에 옆에 세워진 게시판이 들어왔다. 재신이 한 발짝 게시판 쪽으로 가까이 가, 어지럽게 붙어 있는 자보며 포스터들을 읽기 시작했다. 동아리 모집, 공연 광고, 금연 프로그램… 그 안에서 재신의 시선이 한 쪽에 머물렀다.
"…아."
근위대와 사람들의 시선이 다 재신이 보고 있는 방향을 향했다. 해가 지나 빛이 바랜, 재작년의 호국보훈의 달 포스터였다.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사람들을 추모하는 포스터에 인쇄된 것은 시경의 사진이었다. 모두가 시경이 죽은 줄 알았던 그 때의, 시경의 모습이 색 바랜 사진으로 남아 포스터로 걸려 있었다. 재신의 시선이 은시경 소령의 이름 앞에 붙은 죽은 이를 뜻하는 한자에 머물렀다. 공주님, 당황한 근위대가 재신을 부르려는 순간 툭, 재신의 뺨으로 투명한 물방울이 떨어졌다.
"어?"
갑자기 피부에 느껴지는 물기에 재신이 손을 들어 뺨을 매만지자, 다시 또 뺨으로 주르륵 눈물이 흘러내렸다. 왜이러지, 이거. 당황한 재신이 닦아내도 닦아내도 눈물은 멈추지 않고 계속 흘러내렸다. 공주님, 울지 마세요. 여학생의 안타까운 목소리가 들리자 재신은 그 쪽을 향해 웃어보였다. 아니에요. 나 괜찮은데? 나 괜찮은데… 어라, 나 왜이러지. 이상하네. 가방에서 손수건을 꺼내 눈가를 꾹꾹 찍으며 재신이 웃어보이려 애썼다.
"아, 미안해요. 진짜. 나 왜이런담, 주책맞게. 분위기만 이상해졌네. 얼른 가야겠다."
"공주님?"
분위기를 수습하려 애쓰는 재신을 향해 돌아오던 시경이 재신의 붉어진 눈가를 보고 순간 표정이 굳어 달려왔다. 무슨 일이세요. 잔뜩 굳은 표정으로 묻는 시경에게 재신이 아무것도 아니라며 웃어보인다. 무슨 일이야. 시경의 시선이 서 중사를 향했다. 착 가라앉은 상관의 시선에 서 중사는 무어라 대답도 하지 못하고 눈짓으로 포스터를 가리켰다. 재신의 어깨 너머로 자신의 포스터를 마주한 시경의 입술이 굳게 다물렸다. 은시경씨, 차 기다리겠어요. 빨리 가요. 더 늦게 가면 궁에 밤늦게 도착하잖아. 조르듯 재신이 시경의 옷자락을 잡아당기는데도 시경은 한동안 모서리가 닳고 색이 바랜 그 포스터를 가만히 응시했다. 은시경씨, 재신이 다시 한 번 시경을 부르는 순간, 시경이 팔을 뻗어 재신을 와락 끌어안았다. 어… 어? 휘청이며 시경의 품에 안긴 재신이 왜 이래요, 사람들이 봐요. 하고 투닥거리며 시경의 몸을 밀어내려 했지만 시경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은시경씨! 시경의 어깨에 얼굴이 파묻힌채로 품에서 빠져나오려 하는 재신의 등을 시경이 천천히 쓸어내렸다. 경건하기까지 한 그 손길에, 서 중사는 자신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죄송해요, 공주님. 나지막히 울리는 목소리에 시경의 품에서 빠져나오려 몸을 밀던 여린 손이 결국 시경의 옷자락을 움켜쥔다.
"내가… 죄송하다고 하지 말랬잖아요…"
다시금 시경의 옷자락이 젖어들었다. 아까와 달리 어깨를 들썩이며 눈물을 쏟는 재신이 한참을 울고 울음을 그칠 때까지 시경은 가만히 그 자리에 서서 재신의 등을 쓸어주었다. 모두가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여름의 새들만이 하늘 위를 빙빙 돌며 몇 번 지저귀다 떠났다. 한낮의 햇살이 시경의 등으로 내리쬐었다.
한참 울고 난 재신이 빨개진 눈을 꾹꾹 눌러 닦으며 코를 훌쩍였다.
"난 몰라, 이게 뭐야 공주가. 절대 내가 여기서 이렇게 청승떨었다고 인터넷에 올리면 안되요. 알았죠?"
부끄러운 듯 상기된 뺨을 감싸며 재신이 학생들에게 확답을 받듯 주변을 죽 둘러보고는 빠른 걸음으로 차 쪽을 향했다. 시경은 묵묵히 그 뒤를 따라가 차 문을 열어주고는 재신이 차에 타자 조수석에 올랐다. 피곤했는지 창 밖을 잠깐 보다가 금방 잠든 재신을 확인한 뒤, 시경은 에어컨 방향을 조절하고 운전을 하고 있는 서 중사에게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보훈처 포스터 전국에 남아 있는거 전부 수거해."
네.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서 중사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철지난거긴 하지만 확실히 좋지 않은 포스터였다, 그건. 누구에게나.
13. 서 중사는 모르는 이야기 4
WOC 시즌이 다시 다가오면서 재하와 항아는 남북합동훈련에 큰 공을 들였다. 훈련 교관으로 대회 출전 경험이 있는 영배와 강석이 방남하자 재하는 간만에 다같이 술이나 한 잔 하자며 시경과 동하까지 불러들였다. 처음에 재하는 별장으로 나가려 했지만 국왕의 일정이 워낙 바빴고 임신중인 항아가 많이 움직이는 것을 불편해 해, 결국 모임은 조촐하게 궁 안에서 이루어졌다.
"이거이 배부른채 만나려니 민망합네다."
"그런 말씀 마시라요. 김항아동지 잘 지내는걸 보니 보기 좋디요."
"야, 내가 얼마나 잘해주는데. 그치, 항아야?"
항아의 부른 배를 신기한 눈으로 이리저리 살피는 영배의 옆에서 재하가 자랑스러운 듯 한참을 잘난 남편에 대해 유세를 했다. 벌써 둘이서 소주 세 병을 비운 동하와 강석은 동하의 스마트폰으로 태티서 뮤직비디오를 보고 있었다. 이거, 완전 신곡. 나온지 한달밖에 안된거라니까. 다른 체니들은 어디갔네? 얘네 셋만 따로 나온거야. 남사스럽게 이거이 머리도 시뻘겋고 뭐하는 거네? 시덥지 않다는 듯 말하면서도 강석의 눈은 화면에 고정되어 있었다. 그런 그들 사이에 섞여 웃으며 시경도 술잔을 기울였다.
"리강석 너 그러다 장가 못간다. 티파니같은 애가 어디 흔하냐."
"내래 그래도 염동하보다는 빨리 가지 않갔소."
"뭐임마?"
"고만들 하시라요. 다음 순서 어차피 정해져 있는데."
항아의 다음 순서, 라는 말에 모두의 시선이 시경을 향했다. 시경과 공주의 교제 사실은 북한에도 이미 알려져 있었다. 셋의 눈이 급 흥미로 번뜩였다. 난감한 표정의 시경을 구제해준 것은 노크소리였다. 들어오시라요. 항아의 대답에 문이 살그머니 열렸다. 열린 문 틈으로 고개를 들이민 것은, 재신이었다.
"방해해서 미안해요. 엄마가 안주거리 좀 가져다 주라고 하셔서…"
성기게 땋은 머리를 늘어뜨리고 편한 원피스를 입은 재신이 커다란 쟁반을 들고 방으로 들어섰다. 엄만 뭘 이런걸 재신이를 시켰어. 재하가 투덜거리는 사이 재빨리 시경이 일어나 쟁반을 받아들었다. 뭐 더 필요한건 없어요? 둘러보며 묻던 재신이 자신을 향한 북한 장교들의 흥미어린 눈빛에 움찔했다.
"은시경동지는 좋갔습네다. 이런 고운 공주님 모시고."
"은시경동지 결혼하면 우리도 내려와야…"
"야, 다 내려와. 다."
"대대장님 언제 결혼하십니까? 기다리다 목 빠지겠습니다."
술에 취해 떠들썩한 말들이 싫지 않은 듯 시경은 수줍게 웃었다. 재신과 시경을 번갈아가며 보던 재하가 씩 웃으며 시경의 잔을 채웠다.
"야 그래 니들, 언제 결혼할거냐? 국혼 준비할거 많으니 날짜 빨리빨리 잡아야돼."
"겨, 결혼은 무슨. 그런걸 벌써 생각해."
불쑥 말을 자르는 재신에 시경이 고개를 들어 재신을 쳐다보았다. 당황한 듯 입술이 파르르 떨리는 재신이 재빨리 돌아섰다. 필요한거 있으면 불러요. 빠른 걸음으로 방을 나가버리는 재신의 뒷모습을 보는 시경의 눈에 당황이 어렸다. 모두들 잠시 놀란 얼굴로 공주를 쳐다보았지만 이내 잊고 다시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단 한사람, 시경만 빼고. 술잔을 쥐는 시경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정말 당황한 듯한 재신의 목소리가 머릿속을 맴돌았다.
시경은 재신과 자신이 결혼할 것이란 데에 한치도 의심을 가져본 적이 없었다. 시경은 재신을 사랑했고, 재신 역시 시경을 사랑했다. 그 사실은 두 사람도 국왕도 왕실도 국민도 모두 알았다. 결혼은 정말 시간의 문제였다. 시경은 재신이 결혼 이야기를 꺼내지 않는 것은 돌아온지 얼마 되지 않은 자신과 좀 더 연애를 하고싶어서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오늘 재신의 태도는 그게 아니었다. 재하와 모두의 결혼 이야기에 재신은 진심으로 당혹스러워했다. 시경은 가슴이 쿵 내려앉았다. 재신이 자신과 다른 생각을 하고 있을 수도 있다. 그걸 깨달은 순간 시경은 겉잡을 수 없는 불안에 휩싸였다.
밤이 늦자 피곤한 항아가 먼저 자리를 뜨고, 만취해 뻗은 셋을 근위대가 질질 끌다시피 해 데리고 나갔다. 방 안에는 재하와 시경만이 남았다. 묵묵히 술을 마시는 시경을 가만히 보던 재하가 툭, 입을 열었다.
"재신이, 너랑 결혼하기 싫어서 저러는거 아니야."
재하의 말에 테이블만 보던 시경이 고개를 들었다. 끝을 모르고 가라앉은 눈동자 속의 불안을 읽은 재하가 짧게 한숨을 쉬며 잔에 얼음을 몇 개 더 집어넣었다. 삼남매의 하나뿐인 여동생. 재강보다는 자신과 닮은 점이 많은 재신을 재하는 본능적으로 이해할 수 있었다. 시경이 술을 채워주자 재하는 단숨에 잔을 비웠다.
"너도 알지. 왕족의 결혼, 그냥 보통 사람들처럼 사랑해서 하는거 아니란거. 형은 운이 좋았어. 형이랑 형수는 연애결혼이었지만 형수 집안이 워낙 좋잖아. 원래도 왕실 며느리 후보 중 하나였어. 외가가 외무부 장관에 친가가 제철 재벌이니까. 따지고 보면 나랑 항아도 시작은 어디까지나 전략적인 맞선이었고. 남북관계를 위해서. …우리 셋 다, 어릴 때부터 알고 있었어.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 그런거 우리한테 무리라는거. 근데 그거 아냐? 거기에 대처하는 방법이 우리 셋 다 달랐다는거."
재하가 든 유리잔을 가볍게 찰랑이자 얼음이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시경은 말없이 재하만을 계속 쳐다보았다.
"형은 왕비가 될만한 여잘 사랑했지. 형다운 방법이었어. 나는, 너도 알잖아. 내가 얼마나 밖으로 나돌았는지. 피한거지 난. 근데 재신이는 어땠는지 알아? 걘 아예 아무한테도 마음을 안줬어."
너, 니가 재신이 첫 남자친구인거 알아? 재하의 말이 툭, 시경의 마음에 돌을 던졌다. 재회했던 날, 처음이라던 재신의 수줍은 고백이 떠올랐다. 그렇지만 아예 자신이 그녀의 첫 남자친구일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움찔, 떨리는 어깨를 보며 재하가 손바닥으로 눈을 쓸었다.
"생각을 해봐. 재신이가 어디가 모자라. 얼굴 이쁘지, 날씬하지, 똑똑하지, 노래도 잘해. 따르는 남자가 한둘이었겠냐. 어쩌면 재신이도 마음 속으로 좋아했던 남자가 있었을지도 모르지. 근데 걔 그런거 한번도 티를 낸 적이 없었어. 물론 공주가 남자 소문 안좋으면 왕자보다 더 안좋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걘 누구를 좋아해봤자 그 사람이랑 결국은 이루어질 수 없을거라 생각해 일찌감치 포기한거야. 결혼이 비즈니스라고 생각하면 차라리 마음이 편하고 행동하기도 편하니까."
비스듬히 앉아 있던 재하가 몸을 일으키며 시경을 마주보았다. 국왕의 눈을 피할 생각도 못하고 시경은 아직도 바르르 떨리는 입술을 애써 깨물며 재하의 입에서 나올 다음 말을 기다렸다. 술에 취해서인지, 아니면 늘 듣는대로 자신이 눈치가 없어서인지 시경은 재하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건지 잘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근데 그런 걔가 선택한 남자, 너야. 은시경. 공주가 체신머리도 없이 좋아한다고 말하고 차이고, 죽었다는데도 기다리고, 걔 너 정말로 좋아해. 솔직히 넌 내가 생각한 매제상에 들어맞는 구석 하나도 없지만, …재신이가 너 좋아하잖아. 좋아했잖아, 그 힘든 때부터. 한번도 그런 적 없던 애가 온동네에 너 좋아한다고 티를 다 내고 다니는데 내가 어떻게 말려. 그래서 나 너한테 중국 가기 전에 재신이 만나고 가라고 한거야. 그 때 나 솔직히 니가 재신이 어떻게 생각하는지 확신 없었어. 나 너를 친구라고 생각하고, 부하로서도 가장 믿어. 그래서 오히려 니가 재신이에게 대하는게 남자로서 그러는건지 근위대장으로서 그러는건지 확신이 안 서더라. 근데 말꺼낸 순간 니 얼굴 보고 알았어. 너도 참, 은근히 얼굴에 다 티가 나거든."
잠깐 말을 끊었던 재하가 시선을 창 밖으로 돌렸다. 그답지 않게 말을 고르는 모습에 시경의 어깨가 긴장했다. 공주님이 그렇게 자신을 좋아하신다는데, 그렇다는데. 그건 스스로도 의심한 적이 없었는데, 그렇다면 대체 왜.
"재신이, 겁나는거야. 너를 너무 좋아하니까, 너랑 결혼해서 너 왕족 만드는게."
의외의 말에 시경이 재하의 옆모습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아오, 정말. 아직도 그 기집애 그런 생각 할 줄은 몰랐는데. 재하가 짜증스럽게 머리를 흐트러트렸다.
"너랑 재신이 결혼하면, 너 왕족 되는거야. 이 눈 많고 사람 많고 거추장스러운 궁 안 사람 되는거라고. 물어뜯길 곳도 많고, 오해도 많고, 이유없이 널 헐뜯는 사람도 많겠지. 재신이 그게 겁나는거야. 니가 자기랑 결혼하면, 여태까지처럼 평범하게 살아갈 수 없으니까. …아니 근데, 따지고보면 니가 뭘 그렇게 평범하게 살았냐? WOC 차출되기 전까진 그랬을지 몰라도, 궁 들어오고는 너만큼 다이나믹하게 산 사람도 없는데."
말하다 말고 울컥해 딴 길로 새는 재하의 뒷말은 더이상 시경의 귀에 들리지 않았다. 재신이 그런 것을 두려워할거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시경에게 그런 것들은 큰 문제가 아니었다. 중요한 것은 재신과 함께 하는 것이었다. 재신의 곁에 있는 것에 대해 그정도 각오도 없진 않았다. 오히려 시경이 걱정하는 것은 자신이 재신과 함께 함으로서 재신이 부족한 남자를 골랐다는 말을 듣는 것이었다. 복잡한 얼굴의 시경을 본 재하가 마른 세수를 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결혼이 비즈니스라고 생각하면 피차 그로써 얻는게 있으니 그런 걱정 안하지. 근데 너희 둘, 그런거 아니잖아. 재신이 왕족이 어떤건지 끔찍할 정도로 잘 알아. 다리 잃고 왕족이 겪을 수 있는 밑바닥까지 가본 애야. 그래서 더 그런거야. 사실 그거 다 별거 아닌데. 그치 않냐?"
한 쪽이 휘청거릴 때 다른 한 쪽이 지탱해주고, 그렇게 함께 하면서 더 강해지는거 아니겠어. 손을 툭툭 털며 재하가 일어서자 시경도 재하를 따라 일어섰다. 걔 아직도 겁 많아. 특히 너에 대해서는. 걔도 여자야. 그러니까, 재하의 눈이 시경을 향했다.
…재신이, 잘 좀 부탁해. 오빠로서 하는 말이야.
재하가 나간 빈 방에 시경은 한동안 홀로 서 있었다. 사랑하고 사랑하면서도 마음 속의 불안을 감추었고 피하려 했다. 두 사람이 가진 아픔은 하나씩 하나씩 함께 하면서 희미해져갔지만 그렇다고 모든 것을 없었던 일처럼 만들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몰랐었다. 예전의 자신이 일개 근위대장으로서 감히 공주님을 마음에 품을 수 없다는 신분차로 괴로워했던 것 만큼 재신도 그녀가 왕족이라는 것 때문에 자신과의 미래에 대해 걱정하고 있을거라고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하, 눈가를 쓸어내린 시경이 방을 나섰다. 처음엔 빠른 걸음이던 것이, 공주궁에 가까워졌을 때는 거의 달리다시피 했다.
"…공주님."
노크에 대한 대답도 듣지 않고 연 문에, 음악을 듣고 있던 재신이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술자리 끝났어요? 피곤할텐데 가서 자지 않구. 웃는 얼굴이 무색하게 붉어진 눈가가 먼저 눈에 띄어 시경은 말없이 성큼 방 안으로 들어섰다. 평소답지 않은 시경의 모습에 재신은 또 취했어요? 하고 농담을 던졌지만 시경은 대답이 없었다. 방 안에 적막이 내려앉았다. 공주님. 시경의 목소리가 무겁게 바닥으로 가라앉았다.
"기억나세요?"
"뭐가…요?"
"저 중국 가기 전, 그 비디오."
비디오, 라는 말에 재신의 몸이 파르르 떨렸다. 다시 떠오른 아픈 기억에 벌써부터 재신의 눈동자가 일렁인다. 시경은 천천히 재신이 앉아 있는 침대 옆에 걸터 앉았다.
"공주님께 어울리는, 멋진 남자 되어서 돌아오겠다고 했잖아요."
"…응."
"저 지금도, 노력하고 있어요."
"시경씨 이미 충분히 좋은 남자에요. 나에겐 과분할정도로 멋지고, 좋은 사람이에요."
"저, 부족한 점 많지만 잘 흔들리진 않아요. 흔들리지도 않고, 쉽게 상처받지도 않아요. 공주님만 제 곁에 계시면."
그러니까… 혹시라도 제가 걱정되신다면, 그러지 않으셔도 되요. 공주님 불안하게 해드려서 죄송해요. 믿음직스럽지 못한 남자라서. 그래도, 이렇게나 공주님을 좋아하니까… 언젠가 저와 결혼해주시면 안될까요. 어느새 끌어안겨진 따뜻한 품에서 결국 재신이 또 뚝뚝 눈물을 흘린다. 요샌 자꾸 공주님을 울리기만 하네요. 그렇게 말하는 시경에게서도 희미한 물내음이 났다. 울면서도 끝내 그러겠다고 대답은 하지 못하는 재신을 숨막힐정도로 꽉 끌어안으며 시경이 재신의 귓가에 속삭였다.
"그럼 저, 다른 여자랑 결혼해요?"
"응…?"
"아니면 공주님은, 다른 남자랑 결혼하실겁니까? 그럼 저는 공주님 결혼식을 경호해야 할겁니다. 눈부신 웨딩드레스 입고, 저 아닌 다른 남자 손 잡는 공주님을 봐야 하는데. 전 그런거 못해요. 결혼식장 뒤집어놓을겁니다. 쿠데타 할거에요."
"…은시경씨가 퍽이나."
결국 시경의 품 안에서 재신이 웃음을 터뜨린다. 전 진지합니다, 공주님. 시경의 진중한 목소리에 결국 재신이 팔을 둘러 시경의 등을 안았다. 옛날엔 은시경씨 겁쟁이라고 그랬는데, 내가 더 겁 많죠. 겁나고, 무서워요. 은시경씨를 내가 힘들게 하는걸까봐. 빙글빙글 재신의 손가락이 시경의 등에서 원을 그렸다. 사실은, 결혼하고 싶어요. 근데 그 생각을 하면 자꾸… 무서워져서. 혀 끝으로 웅얼거리는, 겨우 나온 진심에 시경이 안심한 듯 웃었다.
"다행이다."
"뭐가요."
"혹시라도 정말 공주님이 저랑 결혼하시기 싫으신걸까봐 걱정했어요."
"그랬으면, 딴 여자랑 결혼하게요? 꿈도 꾸지 말아요."
재신의 얼굴이 금방 새침해졌다. 이제야 평소의 재신다워진 모습에 시경이 재신의 이마에 가볍게 입술을 눌렀다. 어차피 금방은 안되겠지만, 좀만 기다려요. 나 은시경씨한테 시집갈거니까. 그보다 은시경씨가 프로포즈부터 먼저 해야겠지만. 공주한테 하는 프로포즈, 신경 좀 써야 할거에요. 달콤하게 웃는 재신의 입술에 시경의 입술이 내려앉았다. 그리고 그 날, 은시경 소령은 새벽녘까지 공주의 방에서 나오지 않았고 여동생이 걱정되어 이른 아침부터 재신의 방을 찾은 재하에게 둘 다 한소리씩 들어야 했다.
서로가 너무 좋아서 스스로가 불안한 모습. 그런 불안을 또 함께 이겨나가는 모습. 그런 것들이 좋다. 그렇게 서로서로 손을 잡고 한발씩 나아가는 것이 사랑이라고 생각하기에.
이 시리즈의 재하 전하는 너무 멋있어서 내가 다 반해버릴 지경. 남매분량이 시망이었던만큼 남매의 이야기도 자꾸 욕심이 난다. 참 예쁜 남매인데.
결국 못넣었지만 넣고 싶었던 재하와 은시경 사이의 개드립.
야, 너 아무리 내가 밀어준다고 해도 사고치면 죽인다. 재신이 임신시키기만 해봐.
그런 걱정 안하셔도 됩니다.
그래, 내가 너한테 뭔 이런 걱정을 하겠냐.
(…피임은 철저히 하고 있습니다. 라는 말을 꿀꺽 삼키는 시경)
그리고 본의 아니게 공주님 모쏠 만듬. 죄송합니다 공주님 그 미모에...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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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지난 포스터는 바로바로 철거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