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근위대원의 날들 - 장마의 끝
"후우, 다 했다."
하늘 너머가 보일 정도로 새파란 하늘을 올려다보던 재신이 굽히고 있던 허리를 쭉 폈다. 계절이 바뀌면 한번씩 꼭 이부자리를 빨고 소독하라며 전화를 걸어온 영선의 말이 생각나 재신은 한가한 틈을 타 혼자 정원에 여름 이불들을 쭉 매달고 있던 참이었다. 주말에 시경을 졸라 연결한 빨랫줄에 팔락거리며 흰 이불들이 긴 그림자를 만들어내는 것을 재신은 뿌듯하게 바라보았다. 공주님, 오늘 하루 휴일이신건데 너무 무리하시지 마시고 주말에 저랑 같이 해요. 아니면 궁인들이라도 불러서 하세요. 재신이 혹 무리하기라도 할까 아침에 출근하면서도 시경은 걱정스러운 얼굴로 혼자 하지 말라며 차에 올라타는 순간까지도 재신을 몇 번이나 돌아보았다. 그 마음을 모르는 것도 아니지만 고작 두 사람분의 얇은 여름 이불 한두개인데 걱정도 태산이라며 재신은 멀리 사라지는 차를 보며 샐쭉 웃었다.
진득하게 피부에 눌러붙던 여름의 더운 공기가 그 새 사라지고 어느새 볕은 따사로워도 뺨에 와닿는 바람은 제법 선선했다. 곱게 정리된 잔디 사이사이에 소담하게 피어난 꽃들을 하나하나 바라보며 재신은 집 주변을 천천히 걸었다. 길었던 장마동안 내도록 삐걱였던 다리도 어느새 가뿐했다. 종아리까지 내려온 치맛자락에 가려진 무릎을 매만지던 재신이 땅바닥에 바짝 붙어 솜털만 남은 민들레 앞에 쭈그리고 앉았다.
여름 내내 지독히도 장마가 길었다. 그림자마저 짓누를 듯이 무거운 공기가 재신과 시경을 짓눌렀다. 짙은 구름 사이로 햇살 한 점 비추지 않는 날들이 길어지면서 재신의 다리에도, 시경의 몸에도 조금씩 무리가 갔다. 재하와 회의를 하던 시경이 무심코 콕콕 찌르듯 아파오는 어깨를 주물렀을 때, 눈치 빠른 재하의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너 아프냐? …아닙니다. 딱히 시경이 정말 아픈지 몰라서 묻는 질문은 아니었다. 시경이 말릴 틈도 없이 재하가 전화기를 집어 들자마자 곧 시경의 수행원들이 회의실로 들어와 시경을 반강제로 데리고 나갔다.
「많이 아파요? 얼마나 아프면 오빠가 막 이렇게 돌려보내, 응?」
「아닙니다. 전하께서 괜히….」
커다란 눈동자가 걱정스레 이리저리 살피는 것을 피해 시경은 민망한 듯 머쓱하게 고개를 숙였다. 아무리 결혼해 많은 것을 터놓는다 하여도 여전히 재신의 앞에서 제 이런 약한 모습을 드러내는 것은 시경으로서는 서툴고 어려운 일이었다. 모처럼 오빠가 쉬게 해줬으니까 우리 그냥 푹 쉬어요. 빨리 들어와. 시경의 손을 잡아 집 안으로 이끈 재신이 소파에 시경을 앉히고 그 옆에 틈없이 붙어 앉았다. 거실의 한 켠을 가린 긴 커튼으로 집 안은 대낮인데도 어둑했다. 목을 죄는 넥타이를 느슨하게 푼 시경이 등받이에 몸을 기대자 재신이 시경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오는 것이 느껴졌다.
「장마 싫다. 그치.」
「그러게요. 우리 공주님 힘들게.」
「장마 싫어. 여름도 싫고.」
꽃망울이 터지던 봄에 만난 사람을 여름의 초입에 잃었던 재신에게 여름은 늘 길고 잔인했다. 신궁 한켠 영선이 정성스레 가꾸던 화초들과 함께 오도카니 정원을 바라보고 있으면 어둡게 쏟아지는 빗줄기들이 늘 재신의 마음 위로 쏟아졌다. 메마른 마음에 얼룩이 지고 그 얼룩이 다시 메말라 갈라져도 기다리는 이는 돌아오지 않았고 휠체어 위의 공주는 그를 맞으러 나갈 수도 없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나야 그 시간들이 희미해지고 그 위로 함께 했던 여름들이 덧씌워질 수 있을까. 기댄 재신의 몸에 조금씩 무게가 실리는 것을 느낀 시경이 가만히 팔을 들어 재신의 어깨를 감쌌다. 섬세하지 못한 손가락이 서툴게 어깨를 토닥이자 길게 드리워진 머리카락을 쓸어넘기는 재신의 입가에도 희미하게 미소가 번졌다.
「비 그치면 밖에 나가볼까요, 공주님?」
「응, 그래요. 우리 밖에 나가서 재밌게 놀아.」
꼭 붙들고 있던 손을 깍지껴 쥐며 재신이 시경의 손가락을 만지작거렸다. 오롯이 둘만 남겨진 기분이 싫지 않아 재신은 시경의 어깨에 머리를 기댄채 그대로 눈을 감았다. 곁에 시경이 있다는 것을 새삼 실감할 때면 하루하루 흘러가는 일상도 지치게 내리는 비도 다 새로웠다. 새롭게 심장을 뛰게 하고, 인생에 축복을 내리게 했다. 겹쳐진 커튼 사이로 어느새 내려앉은 초저녁의 붉은 햇살이 거실로 새어들어왔다. 비도 그쳤는지 창문을 두드리는 소리도 잦아들어 고요한 집 안에는 재신과 시경의 숨소리만이 소근거렸다. 그렇게 긴 장마의 끝자락을 밟아가던 날도 있었다.
후우, 무릎을 감싸고 앉은 채 입으로 바람을 불자 몽글한 민들레씨가 나풀나풀 날아갔다. 아, 나 미쳤나봐. 별것도 아닌데 왜 이렇게 웃음이 나지. 투명할 정도로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흩날리는 민들레씨를 보며 재신이 배시시 웃었다. 끈적한 여름에는 내도록 기분이 별로더니 선선한 가을 바람이 불어오기 시작하자 작은 일에도 괜히 웃음부터 났다. 재신은 아예 털썩 자리를 잡고 앉아 하늘을 보기 시작했다. 꾸준히 불어오는 바람에 단정히 올려묶은 머리 사이로 삐져나온 잔머리들이 살랑거렸다.
"아, 우리 신랑은 언제 퇴근하려나."
쭉 팔을 뻗어 기지개를 펴는 재신의 얼굴이 밝았다. 나란히 빨랫줄에 걸려 팔락이는 새하얀 홑이불들마냥 재신의 마음도 얼룩 한 점 없이 맑았다. 으쌰, 자리를 털고 일어나 재신이 빈 빨래바구니를 집어들었다. 집 안으로 들어가는 재신의 뒷모습이 가벼웠다. 이제는 돌아올 사람도 있었고, 맞으러 나갈 두 다리도 있으니 또 계절이 지나고 장마가 다시 찾아올 무렵에는 길고 어두운 빗줄기도 괜찮을 것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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곧 온다고 했는데… 그 말 쓰자마자 이렇게 바빠질줄은 몰랐습니다 흑. 두어줄 써놓고 몇 주 뒤에 보니 대체 뭘 쓰려고 했는지도 기억이 안나고 오랜만에 쓰려니 손가락도 잘 안 움직이는데 지금 맞게 쓰고 있는지, 이게 공주님과 은시경이 맞는지 스스로도 좀 낯설어서 걱정이 됩니다. 좀 더 길게 쓰고 싶었는데 결국 손이 안풀려서 너무 짤막하기도 하고 하하하…T▽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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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잘 지내고 있습니다. 좀 바빠지기도 했고 이래저래 작년처럼 새벽까지 글을 쓸 체력이 되질 않아 절어 지내기도 했지만 간간히 드라마도 보고 팬질도 하고 소소하게 보내고 있었어요. 방명록과 덧글에 제 안부를 물어주시고 또 기다려주신 분들이 너무 감사한데 하하하 너무 많이 밀려서 이제는 답글을 달 엄두도 내지 못하고… 정말 죄송합니다 그렇지만 다 읽었고 하나하나 늘 감사하게 여기고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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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장마가 너무 길어서 장마 끝날 무렵에 두 사람 다 아프면 어떡하나, 그런 생각을 잠깐 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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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언제 오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너무 늦지 않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좋은 계절 행복하게 보내고 계시길 바랄게요.